셋째인 현천만이 가끔 하산하여 세간에 도인의 풍모를 보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호 무림은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는 무리들의 긴장은 불길 앞으로 내몰린 승냥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천의 하산 소식과 함께 그의 행로(行路)가 알려지면 사마의 무리들은 앞 다투어 산중으로 피하거나 문을 닫아걸고 칩거했다.
현천의 하산과 그들의 입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꼴이었으니 그들이 현천자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도우(道友)에게는 어버이요 스승이었으나, 사마외도에게는 염왕(閻王)과 같은 존재. 그가 바로 무당의 현천자였던 것이다.
현천은 불진(拂塵)으로 간간이 좌우 어깨를 가볍게 털어내고 있었다. 깨끗한 몸에 세속의 먼지가 앉는 게 싫은 모양이다.
동안(童顔)의 젊은 도사는 등에 한 자루 청강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금색의 수실이 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보름 전 무당을 떠나 호남의 악양에 있는 운수장(雲水莊)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편한 길을 택해 낭야 벌판을 가로질러 가려다가 뜻밖의 싸움에 길이 막혀 멈춘 것이다.
“사숙,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걸까요?”
젊은 도사 허죽이 물었다. 어딘지 어눌한 음성이었다. 그는 무당의 장문인 현도자의 막내 제자였다.
허자 돌림의 이대 제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모두 현도자의 제자들이었다. 현문과 현천은 아직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 일곱 명의 이대 제자들 중 여섯 명은 하나같이 영기발랄하고 재기가 출중하여 무당의 다음 대를 맡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현도자가 말년에 거둔 이 허죽이라는 제자는 그렇지 않았다. 멀쩡한 허우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은 답답하리만큼 처지는 바가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사형들과는 달리 허죽은 공들여 열을 가르쳐도 그 중 하나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심성이 중후하고 온화한 것은 칭찬할 만했지만 그건 도관을 지키고 제사를 주관하기에는 제격일지 몰라도 무당의 심오하고 박대한 비전을 계승 발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질이었다. 그래서 말년에 거둔 이 제자는 현도진인의 근심거리였다.
현도가 현천에게 허죽을 맡긴 건 무당산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 아둔하고 어눌한 제자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 주려는 뜻이었다.
강호라는 곳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면 허죽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보았던 것이다.
“허허허, 무엇 때문이겠느냐?”
무심결에 되물으며 현천자는 엉뚱하기만 하여 곧잘 제 사형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하는 사질을 돌아보았다.
허죽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듯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현천자가 혀를 찼다. 이 단순한 사질은 가끔 엉뚱한 생각에 스스로를 묶어놓곤 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한번 생각에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꿈쩍 하지 않았다.
허죽은 사부를 대신하여 그의 사형들로부터 무예를 전해 받고 있었다. 검술은 대사형인 허산(虛山)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는데, 열심히 검술을 배우다가도 한번 제 생각에 빠져들면 사형이 무어라고 하든 마이동풍이었다.
허산이 화를 내고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하늘을 보고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허산은 허죽에게 검술을 가르쳐야 할 시간이 되면 아예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드러누워 있기 일쑤였다.
화가 나서 철구(鐵求)를 던지며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벌을 내려도 그만이었다.
종일 두 손으로 무거운 철구를 번갈아 던지고 받아내면서도 허산의 눈은 초점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의문에 스스로 해답을 찾기 전까지는 몇 날 며칠이라도 그랬다. 그리고 기껏 눈을 빛내며 던진다는 질문이 또 가관이었다.
“사형, 왜 직두일선(直斗一仙)의 초식은 꼭 찌르는 것이어야 하나요?”
거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허죽에게 연공을 시켜야 하는 시간이 되면 그의 사형들은 모두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피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허죽은 무당의 제자이면서도 무당의 무공을 몰랐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종일 개울가에 앉아서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거나, 숲 속에 누워서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흥이라도 일면 춤을 추듯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어서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허죽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현천자는 무어라고 대답을 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하루 종일이라도 저러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익 때문에도 싸우지. 빼앗기 위해서 싸우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싸우고. 미워하기 때문에 싸우기도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허죽이 귀를 기울였다. 온 정신을 다 모아서 사숙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현천자가 빙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죽으려고 싸우기도 한다. 살아 있다는 걸 감사하며 싸우기도 하고, 또 살아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남과 싸우지 않을 때는 자신과 싸우고, 자신과도 싸우지 않을 때는 무언가 싸움거리를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
허죽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대저 사람이란 이처럼 항상 싸우지 않고는 못 사는 존재인지도 모르지. 싸운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멍한 얼굴로 사숙의 입만 바라보던 허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심각해진다.
“우리가 도관에서 도를 수행하기에 열심인 것도 따지고 보면 도라는 놈을 상대로 하여 싸우는 것이지. 네가 묵상하는 것도 네 스스로의 화두를 상대로 한 싸움 아니겠느냐?”
“그럼 그 싸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도를 깨우쳤다고 할 수 있겠군요.”
“허허, 글쎄다. 인간의 허울을 쓰고 살아가는 이상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말끝에 현천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본산의 주신(主神)인 원무신(元武神)도 따지고 보면 득도하여 한 일이 자소면양(紫宵面陽)이라는 요귀와 싸워 물리친 것 아니겠느냐. 그러하니 득도한다는 것도 결국 싸우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터. 너의 질문은 너무도 어려워 이 사숙도 모르겠구나.”
허죽이 시무룩한 모습이 되어서 다시 자신의 생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현천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두원표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유칠의 좌우군 전위들이 어느새 본진에까지 쇄도해 들어 자신이 아끼고 아끼던 철기들을 도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기세를 제압당한 철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그런 두원표의 철기들을 유칠의 기병들이 맹렬한 기세로 뒤쫓았다. 함성과 비명이 처량한 말울음 소리와 뒤섞여 낭야 벌판을 가득 메웠다.
대형을 잃은 채 열 조각, 스무 조각으로 분리된 철기들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람과 말 모두가 철갑으로 중무장한 철기들은 오직 적진에 뛰어들어 짓밟고 부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백 기나 이백 기씩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들어가면 적으로서는 마치 거대한 철벽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아의 구분이 없이 어지러운 난전에 휘말려서는 오히려 그 철갑이 장애가 되었다. 대열을 잃고 쫓기는 철기들은 무거운 철갑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고, 사람도 그와 같았다.
가볍게 무장한 유칠의 경기병들이 좌충우돌하는 것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철갑과 함께 위력을 발휘하던 장창들마저 거치적거리는 짐에 불과했다.
십여 기씩 쪼개진 두원표의 철기들은 경기병을 뒤따라 뛰어든 유칠의 보군들이 휘두르는 칼이나 도끼, 철퇴 등에 맞아 다리가 꺾이고 머리가 부수어져 나뒹굴기 바빴다.
철기들은 이제 마치 개미떼처럼 와글거리며 달려드는 보군들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하나, 둘 말에서 떨어진 철기병들은 곧 유칠의 보군들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난도질당한 시체들만 즐비하게 깔렸다.
후진에 배치했던 보군들도 어쩔 줄 몰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군의 임무는 철기를 보호하고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밀려나고 있는 철기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두원표의 보군들은 철기 때문에 오히려 발이 묶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속을 철기를 뒤쫓아 뛰어든 유칠의 경기병들이 마음껏 휘저으며 내닫고 있었다.
두원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대로 두면 자신의 철기는 물론 선봉군 일만 전체가 회생 불능으로 무너질 게 뻔하지 않은가.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저의 실책이었다. 비로소 군령대로 놈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지키고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움직여 나올 때 철기를 휘몰아 정면으로 쳐부수어야 했던 것이다.
‘실기했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철기를 운용해볼 새도 없이 아차, 하는 순간에 먹잇감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게 다 저놈 때문이라는 원망이 들었다. 어금니를 악문 두원표가 아수라처럼 날뛰며 자신의 위병들을 박살내고 있는 도무연을 노려보았다.
저놈이 미친 듯 뛰어들어 선두의 철기들을 동요시키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버릴 수 없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적의 목책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도 결정적인 실수였다. 굳게 지키고 있는 적에게 근접하지 말라는 병법의 기초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게 다 제가 적을 너무 가볍게 보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후회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군령을 어긴 죄로 참수를 당해도 좋았다.
두원표가 칼을 뽑아 들었다. 뛰쳐나가려는 그의 말고삐를 위사장 홍계문(洪契紋)이 붙잡았다.
“장군, 철기는 틀렸습니다. 장군께서는 뒤로 물러나 남은 기병과 보군을 추슬러 반격을 꾀하셔야 합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지금 두원표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기서 등을 보인다는 건 상승무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제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차라리 난중에 칼에 맞아 목이 떨어질망정 뒤를 보일 수는 없다.
“놔라!”
두원표가 칼등으로 홍계문의 어깨를 치고 이내 말을 달려 나갔다. 그에게는 이제 도무연만이 목표였다. 그를 도륙하지 않고서는 이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선 유칠의 보군들을 닥치는 대로 쳐 넘기며 곧장 도무연을 향해 나아가는 두원표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의 뒤를 위병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 서로를 격려하며 한 덩어리가 되어 쫓았다.
“장군, 선봉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참장 허유중(許有中)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왕중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직 접전했다는 보고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봉이 무너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 군막을 나간 왕중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을 바라보았다.
뿌연 먼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어지럽게 내닫고 있는 철기들이 행오(行伍)를 잃고 무질서한 걸로 보아 틀림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왕중석은 한동안 멍하여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조심하라 일렀건만 결국 두원표가 혈기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오리 남짓 떨어진 황토언덕 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