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고 외롭던 시간이 끝났다. 별거 아니었던 일생이 찬란해질 날이 다가왔다. 매일을 힘들게 하던 슬픔과 분노, 기쁨이 나에 의해 조절된다. 모두가 어렵게 느끼던 마인드컨트롤은 동전 뒤집듯 쉬운 일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던 불안장애는 그를 늘 숨 가쁘게 만들었다. 가까운 사람을 만나도 문득 느껴지는 답답한 느낌은 약물에 의해서만 호전증세를 보인다. 집보다 더 익숙한 상담실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멈춰있던 심장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마음의 결정은 내렸나?”
어려서부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선생님의 눈빛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밤새 고민하다 내린 답을 꿰뚫은 것 마냥 편안한 자세가 굳게 다문 입을 쉽게 열어준다.
“네. 밤새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은 처음가진 생각과 달라지지 않더군요. 이제 조금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낡은 종이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던 펜 끝이 속도를 줄이다 이내 멈췄다. 뜨겁게 데워진 커피 한 모금이 절실할 때 쯤 구석에 있던 종이 뭉치가 그의 앞에 놓인다. 매일 상태변화를 기록할 감정기록서 뒤엔 비밀유지각서가 있었다.
“효과는 보장하지만 물건에 대한 비밀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 되네. 오로지 너를 위한 물건일 테니까.”
담담하던 그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결정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았다. 감정에 대한 기복이 매 순간을 괴롭혀왔기에 불안한 인생보다 중요한건 잠깐의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슥슥슥..’
물건에 대한 존재여부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손에 쥐인 펜이 무겁게 느껴진다. 비밀을 유지한다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억눌린 감정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 일 없던 듯 집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물건을 놓고 조립을 시작한다. 스피커처럼 생긴 작고 네모난 사물이 어떤 가치가 있을지 시험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차분히 설치를 마친 그가 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태엽으로 만들어진 볼륨 버튼을 조금씩 돌리다 손을 뗀다. 이제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머릿속에 단 세 가지 숫자만을 떠올리고 호흡을 유지한다. 아무런 감정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움에 다가갈 준비를 갖춘다.
생각보다 천천히 미세한 감정 선에 닿은 것 같다. 가만히 눈을 떠 가슴위로 손을 올리자 빠르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여유를 찾아 가고 있었다. 잠깐의 명상 때문인지 처음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서투르지만 수동적으로 감정을 조절한 건 우울한 인생에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며칠만 연습하면 감정에 의해 나타난 자살충동이나 삶에 대한 우울함 정도는 쉽게 털어버릴 듯하다. 맑은 공기를 마신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고 평소에 자주 마시던 뜨거운 커피도 기분 좋게 넘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감정조절장치를 알게 해준 의사에게 감사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다.
다음 날이 되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의사를 찾아간다. 모두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유일하게 달라진 그의 미소가 여유로워 보인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바쁘게 펜을 움직이고 있을 의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무리하게 일을 한 것일까? 한참을 기다리다 앞에 놓은 테이블을 조심히 두드려본다.
평소와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오늘따라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안색이 낯설다. 의자 밖으로 떨어진 한 쪽 손을 보고 굳은 몸을 흔들다 이내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년간 그와 이야기를 나눠준 친구는 한 장의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음을 택했다. 경찰은 특별한 타살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시간이 지나도 떠난 자에 대한 아쉬움이 홀로 남겨진 것에 대한 불안함으로 변질해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그에게 스스로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현실은 제법 빨리 닥쳐왔다. 남들처럼 술을 들이키지도 못하는 체질 때문에 하루 온 종일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제법 많은 밤을 보내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거실로 자리를 옮긴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뿐이었지만 더 이상은 끼니를 거스른 채 시간을 보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장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수년전과 다를 것 없이 매몰차 보인다.
한동안 먹지 않았던 생식이 그의 배를 채우자 잊고 있던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의사의 죽음으로 외면당한 반가운 선물이었다. 가슴 속에 가득 찬 공허함이 사라질 수 있다는 장담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장치 앞에 다가선다.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어떠한 단어도 안정을 가져다 줄 감정은 없었지만 이미 분노와 슬픔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상태였다. 기쁨과 즐거움을 조금씩 돌려놓고 처음 기계를 가져다 놓은 날처럼 자세를 취해본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몇 번의 심호흡을 반복하다 지친 몸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채 서서히 잠에 빠졌다.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던 평소와는 다르게 꿈속에서 펼쳐진 유년시절의 일들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눈을 뜨면 그리웠던 시절의 만남이 아쉬움으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지만 무리하게 꿈에서 깨고 싶진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깬 그가 시계를 보다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간 시간에 아쉬움을 느낀다. 무겁던 평소의 몸 상태와 달리 가벼워진 마음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보지 않던 TV를 틀다 의아함에 몸을 돌려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5월 12일 오후 2시’
그가 잠들어버린 날에서부터 무려 4일이나 지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