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희 아버지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셔서요. 시간되시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경비실에 맡겨놓고 알아서 휴대폰을 찾아가길 바랐던 그의 생각과 달리 직접 만나서 물건을 받고 싶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꽤 적극적이었다.
“저보다 저희 아버지를 조금은 더 아실 것 같아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간은 편하신 대로 맞출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간곡한 남자의 부탁을 거절하자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하는 수 없이 바쁜 일정이 있는 이틀을 보내고 나서 만나기로 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은 건지 어느 순간부터 주변사람들과 인간관계가 확대되면서 자신이 참견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 것 같다. 아저씨를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인맥은 형성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지내기로 마음먹는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그가 조금 벌어져 있는 커튼을 닫고 햇빛을 차단한 채 명상에 잠겼다. 어둠속에서 자그맣게 보이는 한줄기 빛이 날카로운 가시가 된 듯 정돈된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불면증을 탓하며 간단히 허기를 채운다.
오늘은 주기 적으로 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을 가는 날이다. 감정조절장치를 받은 뒤 예전처럼 약을 찾는 일은 없었지만 혹시 모를 기계의 오작동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 했다. 주치의가 바뀐 후 두 번째로 찾아간 병원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입구부터 들려오던 클래식 음악은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정적으로 바뀌었고 바쁘게 움직이던 간호사들은 전보다 적어진 인원만이 자리를 지킨 모습이다. 어색해진 풍경을 뒤로한 채 익숙한 발걸음은 원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어 주변을 살펴보니 원장실마저 안정적이고 편안했던 인테리어는 온데간데없이 밝은 색의 페인트와 독특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돌아가신 의사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면 몹시 슬퍼하실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병원을 세우고 알리기까지 고생했던 이야기들을 전해들은 터라 바뀐 환경이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편해진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밝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주치의의 얼굴이 보인다. 서둘러 약을 받고 집에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가 앉은 의자 하나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필요한 감정을 숨기고 의사에게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들만 적당히 건네고 진료를 마무리하기 위해 애쓴다. 그가 한 말들 중엔 마땅히 메모할 만한 것이 없는지 처음부터 멈춰 있던 펜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두 끝나고 의사의 당부만을 남긴 채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한동안 멈춰있던 펜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뚜껑으로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딱’ 소리를 낸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사의 마지막 당부는 예상외의 질문으로 흘러갔다.
“혹시 다른 사람의 원한으로 힘들어 한 적은 없었나요?”
타인이 그에게 가질 법한 불미스러운 감정은 오래 전 친척들과 인연을 끊고 난 뒤 완전히 분리된 일이라 생각했다. 인간관계를 넓히지 않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나날 속에 별 다른 악연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짐작한 듯 정적을 깨고 의사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간다.
“원한이라는 것은 당사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도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굳이 떠오르는 분이 없더라도 항상 조심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예전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치료를 받을 때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분노와 상처들을 위로 받고 아픔에 대한 눈물을 닦으며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의사가 바뀌고 나서부터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결국 굳게 다물었던 입을 통해 의사를 향한 서러운 이야기들이 터지고 만다.
“저는 저의 마음을 이해 해줄 만한 담당 의사를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몇 년 동안 불안한 마음을 안고 병원을 찾아다니다 만난 분이 돌아가신 김성남 선생님이었습니다.”
주치의의 사망에 의해 받은 아픔들과 상처들이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채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 참아왔던 그동안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원장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 저에게 안정을 주던 병원의 모습과 저의 마음까지 모든 게 뒤틀린 것 같습니다.”
제법 당황스러울 만한 이야기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의사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에게 원한을 갖고 있을 만한 사람들이 왜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대로 당신에게 묻고 싶군요. 당신이 치료하는 환자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존재를 떠올려야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계신가요? 또 그 질문을 통해 제가 당신에게 원한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예상하신건가요?”
한 번을 쉬지 않고 토로하는 말 속에는 이미 정리되어가는 마음속을 흔들어버린 복잡한 생각들이 담겨져 있었다. 더 이상의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은 듯 그의 입이 닫히고 나서야 시끄러웠던 원장실에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더 이상은 이 병원에 올 이유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옆에 놓인 가방을 챙겨 오랫동안 그와 함께 했던 병원을 떠나기로 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박차고 나오자 정적 속에 바쁘게 움직이던 간호사들이 나와 다급히 붙잡는다. 잠깐 사이의 의사의 지시를 받은 가녀린 몸에 간호사들이 병원을 나서려던 그의 팔을 잡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병원을 다니면서부터 안면을 익혀 온 익숙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순식간에 터져버린 분노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장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봐왔던 수간호사가 직접 나선다.
“잠깐 저리로 가서 차만 한잔 하고 가시죠. 지금은 너무 흥분한 상태시라 이대로 나가시면 전처럼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을 떠올리다 막무가내로 병원을 빠져 나온 그는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마음 속 화를 터뜨린 적이 있었다. 수간호사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를 만류했고 결국 그녀의 말을 듣는 게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비좁은 탕비실에 나란히 앉아 뜨거운 커피를 식혀가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간다. 그의 마음이 편안해져 가는 것을 느낀 수간호사가 먼저 이야기를 건넸다.
“오래 전부터 이 병원에서 치료 받으며 상태가 호전 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10년 전 쯤 이었나요? 제가 이곳에서 간호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였어요.”
이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 온 간호사의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회상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바뀐 환경에 염려스러울 만한 인물이기에 잠깐 동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돌아가신 원장선생님은 저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실수도 잦고 눈물도 많은 간호사가 환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리 없으니까요.”
힘들게 입을 연 간호사는 자신의 일들을 떠올리며 낯선 환경을 괴로워하는 그의 마음을 함께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1년, 2년이 지나고 제가 수간호사가 되었을 때 선생님이 저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이제 어떤 사람이나 환경에서 일을 하든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를 위로하던 이야기 속에는 돌아가신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낯선 사회생활을 하며 몇 번이나 다쳤을 마음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선생님의 죽음은 수간호사에게도 이겨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저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병원에 찾아오신 환자들 역시 그렇게 마음먹을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모든 병이 완치돼서 세상으로 나가게 되도 환경이나 사람의 영향으로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요. 아마도 지금껏 치료받고 계셨던 불안장애도 이미 나았을지 몰라요. 다만 완치판명을 내렸을 때 찾아 올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부작용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것 아닐까요?”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통해 그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찾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은 이미 치료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가 없던 그가 사회생활을 하며 느낄 자연스러운 심리적 압박을 의지할 사람은 없었다. 돌아가신 의사선생님이 그가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스스로 이야기를 들어주길 자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번도 하지 못한 생각들을 통해 이미 떠날 것을 준비하고 계셨던 건 아닐지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