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병원에서 더 이상의 약은 처방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본인을 대체할 좋은 선물을 주고 가셨거든요. 간호사님 말을 듣고 보니 제가 굳이 바뀐 원장선생님을 탓할 이유도 없을 것 같네요.”
사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는 그를 붙잡고 짧은 시간동안 들려준 이야기는 스스로를 돌이키게 만들었다. 지금껏 중증의 환자라고만 자신을 방어해 온 사람에게는 세상에 남겨진 이로써 가장 어울리는 완치 통보였다.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무례하게 문을 열고 떠났던 원장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이곳을 찾을만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직접 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닫아 놓은 펜 뚜껑을 만지작거리던 의사는 돌아온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젊은 사람으로서 연장자에게 남기는 말이 아닌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도리로써 짧은 사과를 건넨다. 물론 의사의 말이 매 순간을 힘겹게 싸워온 그에게 불쾌한 모독인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의사선생님이 변화시킨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위한 행위 인 것이다. 잔뜩 날카로워진 마음이 너그러워지자 미처 끝내지 못한 의사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직접적인 표현이 불쾌하셨다면 저 또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부 드리고 싶은 말은 누구에게든 원한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의사로써 환자에게 원수가 되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필요한 말이거든요.”
본인의 실수를 몇 분 만에 잊은 것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의사를 보며 완치 된 마음이 다시 떨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병원을 찾아 온 것은 분명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함께 그를 지켜봐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당당히 병원 밖을 나선다.
집으로 돌아와 감정조절장치부터 작동시키고는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잊기 위해 자리에 앉는다. 오랫동안 간직하던 아픔을 날려버리기엔 기쁜 감정이 필요했다. 기쁨의 버튼을 적당히 돌려놓고 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집중한다. 이번에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음 속 깊은 곳에 표현할 수 없는 좋은 감정이 찾아왔다.
그렇게 한참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어두운 밤까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도 호감이라 표현하기엔 부담스러운 마음이 언제쯤 확실해질지는 알 수 없다. 하루 온 종일 떠오르는 사람 수를 세어보니 적지 않은 관계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에 잡힌 약속을 위해 기계를 끄지 않은 상태로 잠이 든다.
고작 이틀의 시간을 지나 찾아 온 만남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잡혀있던 고정 스케줄처럼 지루한 느낌이 그를 괴롭힌다. 어느 새 가까워진 아저씨와는 다르게 난생처음 보는 아들을 보자니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이미 시간에 맞춰 도착한 카페 안에는 유행이 지난 음악만이 좁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몇 분 뒤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문을 열고 아저씨와 닮아있는 사내가 도착한다. 한 눈에 봐도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아저씨를 빼다 박은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던 손을 들어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음료를 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짧은 만남을 계획했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에 먼저 입을 연다.
“아저씨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마지막 날 아침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조금 놀랐네요. 여기 두고 가신 휴대폰입니다.”
먼저 용건을 꺼내고 가만히 반응을 살핀다. 역시나 준비해 온 말이 있었는지 갈 곳을 잃어버린 눈동자는 그를 주시했다.
“감사합니다. 직접 전해드릴 말도 있어서 이렇게 만나 뵙자고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경비 일을 그만 두게 되신 건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그를 찾아 온 사내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일이 떠오른 듯 좀처럼 구긴 인상을 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다른 분들도 아버지 나이가 되면 어쩔 수 없이 퇴직 하시는 경우가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일을 그만두는 과정이 조금 정상적이진 않은 것 같더군요.”
밤새 술자리를 함께 한 아저씨에게도 전해 듣지 못한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갑자기 일터를 떠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무슨 이유에서 그에게 이런 말들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저는 단지 이 아파트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상회도 물론 참여하지 않고 있고요. 그저 정해진 사항들을 전달 받았을 뿐인데 굳이 저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네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아있던 음료수를 모두 들이켜던 사내는 처음 보는 그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저희 아버지가 평소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억울하게 해고당한 일이 있었거든요. 다행히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많이 호전된 상태셨습니다. 약은 종종 드셨지만요. 아버지가 다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퇴직 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들과 아저씨의 불안정한 감정들 모두 염려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굳이 그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별 다른 말이 없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다.
“아파트에 항의 해보려고 했지만 입주민 외에는 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여기 부당한 해고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도움 주실 수 있는 상황이 되신다면 꼭 읽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사내의 손에 의해 전달 된 증거들은 전부 문서로 이루어진 내용들이었다. 이 자료들을 읽고 아파트 주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관계들을 정리하고자 했던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하기에는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일단 가져오신 내용은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정확한 답변은 내놓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선다. 얼핏 차가워 보일 수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복잡한 일들을 뒤로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일 외에는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병원과 아저씨의 일들이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다고 느낀 지 한 달이 지났다. 매일을 소설의 스토리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빼놓지 않고 챙겨 먹던 약도 더 이상은 입에 대지 않았다. 불안감이 심해질 때면 감정조절장치를 잠깐 돌려놓는 것이 전부이다. 옆집에 살던 여자가 가끔 생각나는 것 외엔 크게 불편하지 않은 나날이었다.
이제는 글 속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완전한 몰입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등장인물 중 하나가 아이의 복수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어는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만큼 더러운 인격이었다. 어두운 소설 속에는 온전하지 못한 인격의 죽음은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다는 법칙이 존재한다. 이것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첫 번째 원칙이었다.
며칠 째 밤샘 작업을 하며 보낸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보인다. 피곤함을 풀기 위해선 기계의 작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늘은 가벼운 맥주와 함께 여유를 부리고 싶은 날이다. 냉장고에 넣어 둔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어 금세 목을 축였다.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이 긴장감을 풀어주는 것 같다.
한 번 쯤 어떤 도움도 없이 잠을 자보고 싶어진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쯤 혼자만의 힘으로 잠이 들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침대보다 익숙한 소파에 무거워진 몸뚱이를 올려놓고 눈을 감는다. 술김에 희미해지는 기억 사이로 조금씩 졸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수면 방법에 실패하지 않도록 구겨진 이불을 덮어 체온을 유지한다.
한순간에 찾아온 피로가 그를 꿈의 세계로 인도한다. 오랜만에 꾸게 된 꿈속에는 글 속 주인공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타락으로 더러워진 아이는 복수를 꿈꾸며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알린다.
‘이제 곧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칠 거예요.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나에게 큰 상처를 줬거든요. 아저씨도 알잖아요. 어른들은 자기밖에 모른 다는걸요.’
그가 만들어 놓은 어린 아이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비밀을 말한다. 어른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와 닿았다. 겁이 많은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난 부모님과 오로지 돈만 챙겨가길 원했던 남은 사람들. 모두가 그를 외면했던 이기적인 존재이다.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몇 번이나 찾아와 본인들의 사악함을 잔인하게 확인시킨 사람들. 그들에게 벌이 내려진다해도 굳이 돕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