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가만히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웃기네요. 별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찾아온 기분 좋은 감정은 어색했던 자리를 빛내는 최고의 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소파로 다가가 웃고 있던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기댄다. 지금부터 사소한 행동이나 장난들은 서로에게 웃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머릿속에 미리 그려놓은 상황들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잠깐 동안 차를 마시고 집으로 가려던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다 이내 잠이 들었다. 눈꺼풀이 금세 감길 만큼 쏟아지는 졸음이 감정조절장치의 장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보다 이내 감겨버린 두 눈이 좀처럼 기운을 찾지 못한다. 서로에게 머리를 기댄 채 아쉬운 시간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다음 날에도 두 사람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쳐다본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이 몇 시인지 알기에는 부족한 단서였다. 미리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휴대폰으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한다,
'8월 13일 8시 35분‘
순식간에 잠이든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황급히 방에 놓인 거울로 달려가 자신의 얼굴을 살핀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분 좋은 꿈에 허우적대던 몰골은 말로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잠에서 깬다 해도 지금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잠들어있는 그녀를 흔들어본다. 감정버튼을 최대치로 돌려놓은 탓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던 그녀가 결국자리에 누워버렸다.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대로 방치 할 수는 없었다. 안방에 넣어둔 이불과 베개를 가져와 최대한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던 잠깐의 시간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심장과 맥박은 모두 정상 이었지만 무조건 괜찮다고 안심 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수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수간호사님. 지금 저한테 급히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설명은 오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간호사가 오는 동안 잠에 빠져있는 그녀를 깨워봤지만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아무런 미동 없이 자리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 나간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간호사의 품엔 각종 물품들이 들려있었다.
상황 설명을 하기도 전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급히 심박 수를 체크한다. 혈압과 맥박도 빠뜨리지 않고 확인 한 뒤 옆에 서 있는 그를 향해 물 한 컵을 주문했다.
“다행이네요. 몸에 별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깊이 잠든 사람처럼 기본적인 신체반응은 하고 있어요.”
그가 챙겨온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서는 가방 속에 챙겨온 영양제들을 꺼내 링거를 놓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깨어나는 게 더 힘들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모든 조치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그에게 잠깐 팔을 내어줄 것을 요청했다. 잠에서 깨어있는 그도 보통의 사람들보다 많이 야윈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난생 처음 집에서 맞아보는 링거였지만 치료해 줄 사람이 왔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전처럼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병원에 반차를 내고 왔다는 간호사는 제법 오랜 시간 집에 머물렀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미 비밀유지각서에 동의한 탓에 하고 싶은 말들을 쉽게 털어 놓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중요한 몇 가지들을 상의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돌아가신 의사선생님께서 정말 자살하신 거라고 생각하세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와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먼저 꺼내보았다. 각자에게 소중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면 비밀보다 무거운 주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 중에 하나임은 분명했다.
“제가 생각하는 선생님은 누구보다 환자분들을 사랑하셨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들이 온전히 세상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죠.”
자신에 입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간호사 역시 조심스러웠는지 천천히 마음을 열어 말을 잇는다.
“그때가 병원에 찾아오는 모든 환자들에게 중요한 시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물론 병원에 있던 직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요. 상황적으로 봤을 때 어떤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나실 분은 아니었죠. 다음 날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이 남겨 놓으셨거든요.”
그가 혼자 상상하던 생각보다 더 구체적인 진실을 알고 있는 간호사의 말들은 의사선생님의 죽음을 더욱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확실하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감정조절장치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한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를 알기 힘든 사건이었다.
“간호사님 말씀처럼 그때는 선생님과 저에게 치료에 대한 계획들이 만들어져가는 중요한 시기였어요. 저는 환자였으니까 혼자서는 앞으로의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더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자살이라는 증거도 없었으니까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들은 결국 자살을 단정 짓기에는 모자란 여러 정황들을 향해 있었다.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은 늘 아프게 다가오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끝은 더욱 슬프기 마련이다. 그때에 대한 기억이 그랬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경찰에서 내놓은 이유들이 더욱 납득 할 수 없던 것이다. 서로가 갖고 있던 진실을 조금씩 털어놓자 그날 벌어진 일들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사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하나 더 있어요.”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던 그가 무언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그때 링거를 맞고 있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간호사가 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선다.
“환자 분 정신 차리세요. 깊이 잠이 드신 것 같은데 제 말 들리시면 눈을 깜빡여 주시겠어요?”
몽롱하던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씩 떨려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뜰 정도로 상태는 호전되고 있었다. 옆에 놓인 의료도구로 혈압을 체크하던 간호사가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정도면 웬만큼 의식을 회복 하신 것 같아요. 영양제는 다 투입 된 상태라 따로 조치할 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주의사항들을 전달하던 간호사가 시계를 보고서는 흐트러진 짐들을 하나 둘 챙겨 넣는다. 아마도 둘의 관계를 배려하기 위해 서둘러 집을 떠나려는 것 같다.
“빨리 기운 차릴 수 있게 옆에서 잘 돌봐주세요. 아까 못 들었던 얘기는 다음에 듣도록 할게요.”
집을 나서기 전까지 빠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을 마치고서는 급히 자리를 떠난다. 결국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와 준 간호사에게도 감정조절장치에 대한 이야기는 털어 놓지 못했다.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던 그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자신 때문에 깊이 잠들다 이제야 깨어난 그녀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곧장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어있는 물 잔을 채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녀에게 조금 씩 떠 먹여 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기운을 차리던 그녀가 조금씩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고 있었다. 지금 벌어진 일들에 대한 설명과 진실을 전해야 할 순간이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실보다 지켜야 할 비밀들이 더 많다는 것이 유일한 정답일 뿐이었다. 머릿속에 복잡한 고민만을 담고 있는 그를 대신해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지금 제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거죠?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술에 취한 것처럼 웃다 잠들어 버린 기억이 나요,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스스로 자리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지금 상황에 대한 모든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상과 빗나간 상황들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다. 어쩌면 모든 것들을 밝혀야만 하는 순간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