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앞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를 타기 위해 지갑을 찾았다. 평소에 타고 다니던 차로 운전을 하며 다니기에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병원이었다. 만나서 물어야 할 일들이 많을 것 같아 서둘러 입구로 향한다.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시선들 사이로 수간호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안녕하세요. 간호사님.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 같네요. 저희 집에 오신 이후로 연락도 드리지 못했네요.”
큰 신세를 지고서도 연락 한 번 하지 못 할 만큼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마음을 이해해준 간호사가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지금은 어떠세요? 아픈 데는 없으신 거죠?”
가장 먼저 그의 건강을 챙기는 말 속에 가족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게 나눠야 할 대화들이 있을 것 같아 퇴근시간 까지 간호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또 돌아가신 의사선생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있을 지금의 원장을 만나야 할 것 같다. 진료예약을 서둘러 마치고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앉아있을 자리로 향한다.
새로 구비된 의료용 기계들이 병원을 가득 메워 예전만큼 기다릴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병원을 구경하던 그에게 구석진 방에 기계를 만지고 있는 직원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의료용 기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전문가인 듯 했다. 신기한 기계들을 지나 일에 집중하는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신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처음 뵙는 분 같네요.”
평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던 그가 용기 내어 말을 걸어본다. 짧은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계신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그녀를 이곳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갈수록 어이없는 일들은 계속해서 그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게 된 건지 먼저 묻지도 않았기에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리긴 애매한 일이었다. 잠시 비좁은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취직하셨다고 한 회사가 여기였어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마지막 만남이 아저씨와 함께였던 것이 떠올라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말을 걸지만 생각 보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아직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때 그렇게 가버리고 다시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바쁘다보니 좀처럼 기회가 없었네요.”
그때의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원망의 말을 꺼내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그의 마음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그녀의 아버지가 새로 오게 된 원장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럼 아버지가 혹시 이 병원 원장선생님이신가요? 의사선생님 밑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해보지를 못해서요.”
원장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서인지 돌려서 표현하는 그의 질문에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스며있었다.
“여기서 원장선생님이 계신 분이 저의 아버지인건 맞아요.”
“아버지인건 맞는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정확히 할 수 있는 답변을 흐릿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또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제 친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요. 지금 두 번째 아버지와 같이 일하는 셈이죠.”
무거운 가정사를 터뜨린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 보인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단 생각에 이야기를 듣던 그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그가 진료 받을 순서가 다가와 짧은 대화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원장실 문에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실내 인테리어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전에는 없던 긴장감이 몸을 경직되게 만든다.
“오랜만이네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하고 가시더니 금방 돌아오셨네요.”
그에게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고민하며 찾아온 이곳이 원장에게는 짧은 찰나처럼 느껴진 것 같다. 더 이상의 악감정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고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지난 번 일은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 다른 일은 없지만 종종 찾아뵙고 상담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오게 되었습니다.”
길고 긴 인사를 들을수록 살짝 올라가는 입 꼬리가 유난히 거슬려 보인다.
“그래요. 요즘 상태는 어떤가요? 제가 처방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호전 되신 건가요?”
병원의 진료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환자로만 생각했는지 단어선택에 대한 배려가 없어 보인다. 설령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상태라도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네. 요즘에는 약도 거의 먹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 증상이 나타날 때면 가벼운 산책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비밀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어느 누구도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 역시 숨겨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예전처럼 거짓말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기에도 풀어야 할 거짓의 사건들이 무척 많이 쌓여있었다.
마주 앉은 두 남자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에도 어색할 만큼 대화는 좀처럼 진전되지 못한다. 그가 준비해 온 질문을 던지기 위해 생각을 정리 할 때 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며칠 전 저희 병원 수간호사를 댁으로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지만 딸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 아프셨던 것 같더군요. 왜 굳이 저희 병원 사람을 부른 건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그날 그가 아팠던 것과 수간호사가 자신에게 달려와야 했던 일을 설명하자면 감정조절장치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하필 쓰러져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원장이란 것 때문에 그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똑똑’
구석으로 내몰리는 다급함이 정점으로 치닫는 시점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그 날 일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녀가 원장실을 찾았다. 밖에서 원장선생님과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을 만큼 허름한 방음시설은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와 준 그녀를 반갑게 맞는다. 하지만 의사는 마저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지 딸의 방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치열한 두 사람의 눈치 싸움이 계속 되다 기다림을 참지 못한 여자가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하세요.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이 분한테 신세진 게 있어서 제가 대접하기로 했단 말이에요.”
미리 이야기 되지 않은 약속이 적절한 안전장치가 되어 강펀치를 맞을 뻔 한 그를 구출해 준다. 수세에 몰려 하지 못한 질문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다만 오늘의 경기력이 원장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 일 것 같아 잠시 휴전을 선포한다.
“저 그럼 예약한 식당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 진료 때 말씀 드리도록 하죠.”
여유롭게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괜한 심술을 부리던 의사도 무언가 작정한 듯 떠나는 두 사람을 날카롭게 노려본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뜨거운 눈빛이 뒤통수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편, 조용한 곳을 찾아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은 근처 벤치에 앉아 미리 포장 해온 커피를 마신다. 소중한 점심시간을 자신 때문에 음료수 하나로 버티게 한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여자가 이내 그의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복잡한 심경을 얘기한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그 날 수간호사님이 오셨다는 걸 아버지한테 말한 건 제가 아니에요.”
의사에게 전해들은 말과 다른 내용에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분명 원장실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는 자신을 구출해 준 아군이다. 하지만 경비아저씨를 무슨 이유로 내 쫓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쉽게 마음을 열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앞에서 무언가 결심한 듯 길고 긴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제가 일주일 째 연락도 없이 잠에 취해 있을 때 아버지가 실종신고를 하려고 하셨대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이 됐고 제가 머무른 장소가 전에 살던 아파트로 나왔겠죠.”
그로 인해 봉변을 당한 여자의 뒷이야기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던 것 이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묵묵히 듣는 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