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늦도록 생각에 잠긴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일인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는다. 자신이 하던 일까지 막아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오로지 돌아가신 의사선생님에 대한 예의이고 그와 가까워진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진실과의 싸움을 힘겹게 하는 동안 요즘 들어 요란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늦은 시간에 찾아올 만한 손님이 누구일지 서둘러 현관문을 열어 확인한다. 그의 시선이 향한 현관문 밖에는 낮에 보았던 원장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었다.
“집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집에 찾아 온 걸 보니 오늘 밤도 편하게 잠이 들기는 틀린 것 같다. 허락도 없이 신발장에 신발을 던져놓고 집안을 둘러보던 원장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해가며 그를 다독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아파였는데 집안을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 같지 않게 깨끗하게 해놓으셨네요.”
그 어떤 칭찬도 반갑게 들리는 말은 한 문장도 없었다. 벗어놓은 외투와 신발을 신겨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이 집에 찾아온 이유에 대해 들어야 할 것 같다.
“집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저한테는 반가운 손님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유가 중요합니까? 그저 제가 진료하고 있는 환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 차 왔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마치 집을 사러 온 사람처럼 집안 곳곳을 살피던 의사의 발길은 감정조절장치 앞에 멈춰 섰다. 겉으로 보기엔 낡은 오디오와 다름없어 보이는 물건에 관심이 생긴 듯 한참을 들여다본다. 잠시 버튼을 유심히 바라보다 원장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감정조절장치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안됩니다. 그건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맡기신 유일한 유품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동하실 거라면 당장 집에서 나가세요.”
무례한 원장의 행동에 잔뜩 화가 난 그가 기계를 건드리려던 손을 세차게 내려친다. 갑작스러운 저지에 당황한 의사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듯 웃음을 보였다.
“이거 참. 큰 실례를 범했네요. 전 단지 오래 전 보았던 물건인 것 같아 관심을 가진 것뿐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목적으로 비밀리에 유통되던 것이었죠.”
감정조절장치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찾아 온 것 같다. 아무래도 위험한 손님을 더 이상 이 집에 있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병원과는 상관없이 가족들과 음악을 즐겨듣던 물건입니다. 지금은 작동되지 않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선물이라고요. 더 이상 불쾌한 상황은 만들지 마시고 당장 댁으로 돌아가시죠.”
의사의 양 쪽 어깨를 붙잡아 거세게 현관 쪽으로 밀쳐낸다. 원장의 무례한 행동보다 지금껏 비밀을 유지해 온 것에 대한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웠다. 현관으로 밀려난 의사도 더 이상 이 집에 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선다.
“함부로 이곳에 찾아오는 일은 더 이상 없길 바랍니다.”
마지막 그의 경고가 끝나자 나갈 준비를 마친 원장도 떠나기 전 몇 마디 말을 던진다,
“이 집에 찾아 올 일은 없겠지만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방문할 수 있다는 건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정조절장치를 발견한 원장은 그를 긴장 시킬 이유기들만 남긴 채 유유히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의사 외에도 기계를 보았던 사람은 너무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이 오기 전까지 미리 주의 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 가장 커 보인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할 것 같다는 판단에 날이 밝는 대로 편집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아홉시 정각에 맞춰 도착한 출판사에서 그와 이야기 할 것이 남은 편집장을 만났다. 연락도 없이 방문한 이유를 말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그날 제시하셨던 모든 조건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원고를 마감하도록 하죠. 그때 말씀하신 작업실은 어떤 위치나 환경도 좋습니다. 서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침부터 다급히 찾아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느닷없는 말에 한결같던 표정의 편집장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비록 먼저 제안한 일이긴 했지만 며칠은 생각하고 결정 할 것 같던 분위기는 금세 역전되어 있었다.
며칠 후 익숙한 아파트를 떠나 머물게 된 작업실에 작은 트럭 한 대가 도착한다. 남자 혼자 머무는 공간에 그리 많은 짐은 필요 하지 않을 것 같아 중요한 물건들만 챙겨왔다. 물론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자리에는 안전하게 포장 된 감정조절장치가 자리 잡는다. 적은 양의 짐이었지만 혼자서 운전과 이사를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생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비치 된 상태라고 한다.
잠시 동안 바뀌게 된 생활공간이 그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도록 이사에 대한 사실은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원래 살던 공간에 남아있는 가구들이 자리 잡아 사람이 머무는 것처럼 보이게 해줄 거라 생각한다.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작업실은 여느 아파트처럼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지 않고도 짐을 나를 수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 줄지어 피어있는 잡초가 그를 반긴다.
반나절 동안 이삿짐을 정리하고 노트북 옆에 감정조절장치를 올려놓았다. 지금껏 주로 이용한 생활공간이 거실인 탓에 남들 눈에 쉽게 보일 수밖에 없던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선택인 듯하다. 그렇게 챙겨온 모든 짐들이 자리를 잡자 제법 사람이 사는 공간다워 보였다.
첫 날부터 작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 공간을 사용할 기간을 연장시키고 싶다면 최대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서둘러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머릿속에 있던 내용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생각 안에 살고 있던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고 시작했던 복수들은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글쓰기를 놓은 시점부터 옮기지 못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기 위해 가볍게 감정의 버튼을 돌려 분위기를 정돈했다.
따뜻한 커피가 식어버리고 들리지 않던 자동차 소리가 커져갈 때 쯤 피곤에 지쳐 반쯤 눈이 풀려버린 그가 마당으로 나온다. 창문을 신문과 암막커튼으로 감춰버린 탓에 바깥세상을 보기 위해선 현관문 밖을 내다보아야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해는 완전히 뜨지 않았지만 날이 밝아졌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제 스쳐 지나간 잡초들을 뽑아내기 위해 마당 한편에 놓인 낡은 면장갑을 살폈다.
이미 전 주인이 많은 잡초를 뽑은 후였는지 구석구석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부지런히 일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쯤 감긴 눈으로 잡초를 제거하다 아파트보다 작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완전히 잠을 떨쳐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집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편집장이 출근 전 그의 작업실을 방문 한 것이다.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은 짐정리는 끝났지만 아직 손님을 앉힐만한 여유 공간이 부족한 탓에 그대로 바닥에 앉아 차를 내왔다.
“미리 말씀하시고 오셨으면 의자라도 놓아뒀을 텐데, 혼자 있을 공간이라 부족한 것들이 많네요.”
잠시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집이긴 했지만 그 곳의 주인인 자신이 변변치 못한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게 미안하게 느껴진다. 앞에 놓인 차를 조심스럽게 맛 본 편집장은 딱딱한 바닥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자연스레 하려던 말들을 꺼내었다.
“더 좋은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에 준비하다보니 아무래도 장소가 협소한 면은 있는 것 같군요.”
아직 하루밖에 지내지 못한 곳임에도 불안함을 피해 아지트가 되어 줄 공간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감정조절장치를 놓을만한 안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집은 무척 마음에 듭니다. 같은 장소에서만 계속 일하다보니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적당한 타이밍에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급하게 구한 것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것들이 원고를 쓰는 데 있어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던 편집장에게 당부할 말이 떠올라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연다.
“혹시 회사에서 저에게 작업실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정도 되죠?”
어쩌면 아파트를 잠시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 챈 사람들 중 하나가 그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 수 있을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