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 홍련아. "
" 장화 언니. "
눈을 떳다.
칠흑같던 검은 빛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더니 뒤이어 엄청난 불길이 붉은 눈동자를 더욱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바닥에 힘없이 털썩, 주저않았다.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 왜 그러세요, 언니. 일어나세요. "
그때, 상냥한 미소를 내보이며 한 여인이 다가와 장화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동생이자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되어버린 홍련이었다. 그녀는 5년전, 보았던 얼굴과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냥 어리기만 했던 철부지 아이가 아닌, 완전히 화려한 꽃을 가진 여인이 되어버린 그녀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장화는 홍련이 뻗은 손을 애써 모질게 뿌리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그분을 죽이고도 감히 이곳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어졌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서 보신다면 통곡을 하셨을거다! "
" 언니. 통곡이라뇨. "
홍련이 상체만 반쯤 숙이며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 오히려 좋아하셨어야지 않나요? 그 덕분에 아버님께서 황제 자리까지 오르셨는데 이 정도야 약과 아닌가요? "
" 홍련아! "
" 이런. 우리 언니는 아직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다니까? "
저런 비아냥 거림.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최소한 옛날까지는.
" 하늘의 주인이 황제라는 개소리는 없어진지 오래예요.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백부께서 행사하신 권력 또한, 부질없는 것이지요. 바로 언니의 힘이요. "
" 그렇다고 네가 옥쇄를 가질거 같니? "
" 그게 무슨 소리죠? "
홍련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속에서 부터 올라오는 안타까운 마음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뻔한 장화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 네가 옥좌에 앉게 된다 한들, 넌 죽는다는 말이야. 언젠간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거니까! "
" 지옥이라. 좋네요. "
" 뭐? "
" 애초에 괴물이 태어났으면 지옥에서 살아야하는게 마땅한거 아닌가. 안그래요, 장화 언니? "
하하하! 오른손엔 서슬퍼런 날이 선 칼을 쥔 채, 거리의 미친 노인들처럼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광기어린 웃음을 토해냈다. 그 웃음이 짐짓 슬퍼보인다는 생각은 오직 언니인 장화만이 할 수 있었다.
점차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홍련의 눈빛이 돌변했다. 손에 쥔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예리한 칼 끝을 바라보던 장화가 얼굴을 굳혔다.
" 날 죽일거니? "
" 전 이미 폐륜을 저지른 이 입니다. 한번 저지른 폐륜. 두번이라고 못 저지르겠나이까? "
홍련의 눈동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언니를 죽일 수 있다는 욕심과 드디어 목적을 이룬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 부디 하늘에서 아버님과 그분을 만나시길. 언니가 좋아하시는 담소라도 나누세요. "
그녀가 혀로 요염하게 붉은 입술을 쓱, 훑었다. 그 순간.
" ! "
장화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 * *
황세민형, 517년.
" 아이참, 장화언니도. "
분홍빛 꽃송이가 만개하니 활짝 열린 창문 안으로 따스한 빛 한줄기와 함께 분홍 꽃잎이 방안으로 조용히 떨어졌다. 동시에 꺄르르, 어느 여인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다과상 하나를 두고 마주앉은 홍련은 눈앞의 언니를 보며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볼에 붉으스런 홍조가 띈것으로 보아 또 장화가 그녀에게 짖꿎은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얼마안가 가까스런 웃음을 멈춘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 그럼 이불위로 확! 넘어뜨려야죠! 도망 못가게! "
" 그러다가 초야(初夜)에서 신부가 신랑을 덮쳤다는 소문나면 어쩔려고 그러니. 잘못하단 욕정에 안달난 부인 된다? "
" 까짓꺼. 남편의 물건에 환장한 부인 한번 되보죠, 뭐. 아마 옆동네의 아낙네들까지 절 부러워 할걸요? "
" 그게 뭐야. "
이번엔 홍련의 언니, 장화가 조신하게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동생인 홍련은 장난끼 넘치고 밝은 성정이었다.
거리낌없이 모두를 대하고, 가끔 황당한 사고를 치는 홍련은 가문 안에선 골칫덩이로 불리지만 적어도 장화에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러니 이번 혼사도 별 탈이 없어야 할텐데.
" 걱정하시 마세요, 언니. 이번 혼사는 성공시킬거니까. 혼담이 들어온 이가 다름아닌 대사농(大司農)의 장남이 아닙니까? "
" 대사농께선 언제 오신다 하였니? "
" 음. 아마 보름 후 일거예요. 최근 황제 폐하께서 펼치신 정복전쟁때문에 바쁘시다고 하시더라고요. "
그렇구나. 장화는 탁자위에 놓인 작은 찻잔을 조심스레 잡은 뒤, 입가로 가져가 마시기 좋은 따듯한 녹빛의 찻물을 천천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홍련은 최근 성년의 나이를 맞이한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대뜸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봐도, 또 봐도, 자신의 언니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기품있고 절제된 행동과 뛰어난 학식, 거기다 차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까지. 어찌 자신과 저리 다를 수 있을까.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거 맞아?
" 장화 언니. "
" 응? "
" 언니는 언제 쯤, 시집 가실 거예요? "
" 어? "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장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아니, 그렇잖아요. 언니처럼 이쁘고 착한 규수가 어디있다고 왜 혼담이 없는지. 에휴, 사내들 눈이 다 파먹혔나? "
" 홍, 홍련아. "
평소처럼 홍련의 거침없는 언변에 장화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 난 아직 혼인할 마음이 없어. 일단 네가 좋은 짝을 찾아 행복하길 바라. "
" 씨잇. 전 언니가 빨리 혼인하셔서 귀여운 조카 보고 싶은데… . 아! "
그러다 난데없이 홍련이 박수를 짝, 치며 연못의 깊은곳과 같은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 언니. 장화 언니. 잠깐만 이리 와보세요. "
" 왜 그러니? "
갑자기 홍련이 가까이 와보라 하자 어떨떨해진 장화가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었다. 뭔가 좋지않은 기운이 온 몸에 엄습했지만 동생이 할 행동이 궁금했기도 했던지라 그녀는 순순히 홍련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에 맞추어 실 마냥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들이 스르륵, 팔 선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홍련이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열린 창문 밖을 곁눈질 하더니 장화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번에 열리는 신년 장에 가셔서… . "
그렇게 은밀한(?) 자매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 * *
같은 시각. 어느 따사로운 오후였다.
" 그래서 대장군은 지금 후경(황세민형의 변방)에 있단 말이냐? "
" 예. 폐하. 그래서 지금 막 대장군께 서신을 보내어 이를 알렸사옵니다. "
" 잘하였군. 그럼 대장군에겐 따로 보고 할 일이 생기지 않는한 정복전쟁에 중점을 두도록 연을 보내지 말게. "
" 예, 폐하. "
보고있던 상소를 내려놓은 황제가 눈이 뻑뻑한지 두 눈구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 행동에 곧장 그의 옆에있던 내시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 폐하. 혹 어디 편찮으시옵니까? "
" 아니다. 단지 요즘 잠을 못자서 피곤할 뿐. 신경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
" 안그래도 그리하여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연해주(서방의 나라의 고유 술)을 준비하도록 해두었습니다. 정사가 끝나시거든 한잔이라도 들으십시요. "
" 고맙구나. "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한 내시가 뭇내 고마워, 황제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제가 나랏일을 보는 집무관밖에서 왠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놓거라! 잔뜩 격앙된 목소리와 품위없는 말 솜씨. 뒤이어 들려오는 궁녀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그 여자 군. 밖깥의 소리로 금게 상황을 파악한 황제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어두어졌다.
이에 괜히 제 발을 저린 내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 송, 송구하옵니다. 오늘 아침부터 귀비 마마께오서 폐하와 오찬(아침식사)을 함께 하시길 원하셨으나 제가… . "
"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그리 사죄하진 말거라. "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신경질적으로 집무관안에 들어오는 문을 노려보았다. 저 밖에 그 역겨운 여자가 서있었다.
가증스런 년.
" 폐하를 뵐 것이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
" 아, 아니됩니다. 지금 폐하께선 집무를…! "
"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느냐! 나는 이 나라의 귀비 이니라! 감히 한낮 궁녀 따위가 나에게 말대꾸를 하는것이냐! "
저 목소리를 보아하니 어지간히 화가난 모양이군. 멍청한 건지 아둔한 것인지 제 주제를 모르고 어디서 개새끼가 짖는구나.
황제는 귀비의 온갖 망언을 고스란히 전해들으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몸을 이르켰다.
" 폐, 폐하. 귀비마마를 돌려 보내겠…. "
" 아니. 귀비가 나를 만나러 이리 와주었는데 가만히 돌려보내면 섭하지. "
겨우 오찬 한번 같이 안했다고 저리 개지랄을 떠니 주인이 한번 때려줘야 말을 들을 것이다.
암, 그렇지. 저딴 개간년은.
황제는 단상에서 내려와 문앞까지 걸어나갔다. 걸음이 원래 빠른 그였던터라 금세 문앞에 당도했다. 그가 동그란 문 고리를 잡았다.
콰앙-.
" 이 년을 내…. "
" 이게 무슨 일이요, 귀비. "
" 폐하! "
문을 열고 나온 그의 등장에 일제히 모든 궁녀와 내시들이 상체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건 귀비의 측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오직 귀비만이 황제의 모습에 반색하며 그의 쪽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폐하, 소비. 폐하의 용안을 뵈러 왔나이다. "
" 잘 오셨소. 귀비. 내 안그래도 그대를 보러갈 참이었는데. "
" 폐하… . "
그리 악을 쓰고 저작거리의 왈패들처럼 패악을 부렸던 귀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음에 담은 사내 앞에선 여인에 불과했다. 그녀가 감동받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자 황제가 낮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이 여인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맞아떨어져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 장 내관. "
" 예, 폐하. "
" 지금 당장 나갈 채비를 하거라. "
" 폐하? 나갈 채비라뇨? "
내관에게 내려진 명령에 의문을 표한 귀비를 보며 황제가 일부러 모두가 다 들으라는듯이 말했다.
" 밖에 나간지도 꽤나 오래되었는데 이참에 귀비랑 같이 바람이나 쐐고 오지. "
" 폐하! 그게 정말 이옵니까? "
그의 말이 굉장히 반가운듯 귀비는 두 손을 맞잡으며 뛸듯이 기뻐했다. 그녀의 행동에 황제는 그저 가식적인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을 한다면 궁녀들이든 내관들이든 전부 귀비와 황제는 금슬이 좋다는 말이 황궁안에 다시한번 떠들석하게 만들게 뻔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 어서 준비하시오. 귀비. "
" 예, 폐하. "
당신의 가문을 좀 더 끌여들일 수 있으니까.
그의 진짜 속마음은 일도 모르고 귀비는 연실 신이난듯한 콧소리를 내며 집무관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귀비의 비단 치맛자락이 끌려 눈에 보이지 않았을때까지 집무관 문앞에 서있던 황제는 별안간 쿡쿡, 웃음을 흘렸다. 알다가도 모를 멍청한 여인이다.
너무 쉽게 넘어와서 아주 갖고 놀고 단물을 쪽쪽 빨아먹기 좋은 상대로 그녀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황제란 자리에 앉으면 어느정도의 적이 따르는 법 이거늘, 황제 다음으로 가장 권력을 쥔 대승상의 외동딸을 후궁으로 들이니 황태자때 등을 돌렸던 대신들이 들개같이 자신의 편에 서는 우스운 일이 일어났다.
이래서 전 황제들이 후궁들을 들여 대신들의 발목을 잡는가, 싶었다. 물론, 대승상의 딸 하나만으로 파급력이 크니 굳이 다른 여인들을 따로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괜히 그랬다가 애꿎은 후궁들 싸움에 말려들어 되려 목이 조일 위험을 감수 해야지.
" 장내관. "
" 예, 폐하. "
" 당장 무위장군을 불러오거라. "
" 예? 하지만 지금 귀비 마마께오서… . "
" 나가기 전에 그를 먼저 만나 상의할 것이 있으니라. 어서 불러오거라. "
"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그의 말을 알아들은 장 내관이 쏜살같이 집무관을 벗어서 무위장군을 부르러 대외청으로 향했다.
황제는 미련없이 뒤를 돌아 다시 집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앉고나서 그가 먼저 한 일은 다름아닌 상소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가 붓을 들었다.
지금쯤, 귀비는 제 궁에 가서 신이나게 치장을 할것이 눈에 선히 보였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시간이 있었다.
거의 한 8각(1시간) 정도면 끝날 일이었다.
그렇게 약 1각(15분) 후. 장내관의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푸른 빛이 감도는 청색 관복을 입은 무위장군, 휘는 궁정의 경비를 담당하는 무위영(武衛營)의 총 책임자 였다. 얼굴 한쪽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그는 들어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더니 황제에게 먼저 예를 올렸다.
황제는 즉시, 일어나라 명 했고, 그의 말에 휘는 번개같이 일어섰다. 황제가 말했다.
" 내가 부른것은 다름아닌 윤씨 일가(家) 때문이다. "
" 윤씨 일가(家)라 하심은 관청의 낭관(郎官) 아닙니까? "
" 그래. 요즘 윤태겸이 은밀히 승상의 본가에 가는 것이 확인 되었다. "
황제의 말에 휘는 복잡한 표정을 짓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 … 윤태겸의 조상이 무관직을 맡아 황궁에서 일을 하였다곤 하나 딱히 대승상과의 인연은 없었습니다. 근데 어찌…? "
" 확실히 지금까지 보면 대승상과의 연줄은 딱히 없다. 하지만 최근들어 승상의 본가(家)에 가는 이상 뭔가 있다는거지. 그걸 조사해줬으면 해. "
" 알겠습니다. 그럼 제 수하를 시켜…. "
" 아니. 수하를 시키면 안돼. 네가 직접 하도록. 그리고 수상한 점이 있을시 바로 보고해. "
" 명 받들겠습니다. "
휘가 고개만 까딱 숙였다. 그러자 황제는 마음에 든다는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 그리고 오늘 귀비와 저잣거리로 나선다. "
" 저잣거리라면 황도 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맞아. 요즘 귀비를 너무 내버려 둔거 같아서. 관리를 해야지. "
휘는 그의 충직한 신하임과 동시에 그의 얼마없는 친우였다. 황제의 성정을 익히 알고있던 그는 황제가 하는 말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 그럼 전과 같이 말 두필을 준비하겠습니다. "
" 그럴 필요 없다. 오늘은 걸어서 행차할거니. "
" 하지만 호위께서 지금 후경으로 향하신 지금. 그분보다 더 잘 지켜들일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
" 나도 칼은 배웠느니라. "
" 농이 아닙니다.
휘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어디서나 암살당할 수 있는것이 황제였다. 조정에선 온갖 아부와 아양을 떨며 다 들어주던 대신들이 뒤에선 더러운 꼼수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든 그를 지킬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최측근이자 또 다른 친우인 대장군이 후경으로 정복전쟁에 관하여 나가있는터라 현재 황궁안에서 그보다 더 무술 솜씨가 좋은 이는 무위장군인 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휘가 나가게 되면 황궁안에서 통솔할 사람이 부족해 진다.
" 걱정하지마라. 그리 멀리 나가진 않을거고 금방 돌아올 거니까. "
" 알겠습니다. "
" 마지막으로… . "
황제는 팔을 뻗어 아까전, 작성한 상소를 잡곤 돌돌 말아 휘에게 내밀었다. 휘는 얼른 그의 앞에 다가가 노란색 비단에 붉은 끈으로 묶인 상소를 건네받았다.
" 이 상소를 황문에 붙여. "
" 상소에 적힌 내용을 어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그의 질문에 황제는 이유모를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면 열어보라는 뜻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자 휘는 붉은 끈을 풀어 상소를 펼쳤다.
[ 螳螂窺蟬 ]
당랑규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뜻으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 거리를 생각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 즉, 이건 도발이었다.
* * *
신년 장.
이 장은 일년에 한번, 봄에 열리는 장으로 총 오일 동안 벌어지는 하나의 축제였다. 특히, 황궁이 자리하고 있는 황도의 신년 장은 봄을 시작함으로써 백성 모두 편안하고 따듯한 한 해를 보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터라 더욱 의미가 깊었다.
또한, 이날 만큼은 저잣거리로 일반 백성들이나 노릿꾼이 나와 흥을 곧구고, 오색의 기녀들이 나와 꽃잎과 술을 팔며 사내들의 욕정을 달구었다.
귀족들까지 장터로 나와서 함께 술을 먹고 기녀들의 아리따운 춤을 보며 놀 정도이니 옆의 서나라와는 천지차이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 언니! 이리오시라니까요?! "
" 천천히 가렴. 그러다 넘어진다. "
그 장터에서도 눈에 띄는 두 여인이 나왔으니 간만에 사내들의 눈 요깃거리론 최고의 대상이었다. 관아의 최고 무관직을 맡고있는 아버지의 두 딸인 그녀들은 황도에선 꽤나 유명한 자매로 통했다.
한명은 침어낙안 (沈魚落雁) 이라 불리는 미인의 차녀, 홍련과 경국지색 (傾國之色)인 장녀, 장화는 수많은 사내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 우선 저기에 있는 엿부터 사먹어요. 그리고 나서 꽃 장식도 좀 사고. "
" 우리 여기 놀러 나온거 아니라고 했잖니. "
" 에이, 그래도 기왕 나왔는데 뭐라도 사먹고 해야죠. 금강산도식후경! "
아이마냥 천진난만하게 웃는 홍련을 보며 장화는 뒤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도 꽤 오랜만에 나온 밖이라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싶었다. 남들의 노골적인 시선들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생과 나온 나들이를 망치기는 싫었다.
장화는 방에서 은밀히 나눈 홍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신년 장에 가서 우리 괜찮은 사내놈 하나 건져봐요.
- 뭐?
- 원래 신년 장엔 미남들도 모이는 자리라구요. 얼마나 좋아요?
- 혼담이 오가는 처녀가 할 말은 아닌거 같은데.
- 하핫! 뭐 어때요? 아직 혼인도 안하였잖아요?
도무지 못말린다니까.
어째 그리 변함이 없는지 장화는 그런 홍련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홍련이 웃으며 밝고 힘차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프거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 언니! 저기에서 씨름 하나봐요! 우리 구경… 꺄악! "
" 홍련아! "
해맑게 웃으며 씨름판이 있는 곳을 손가락하던 홍련이 뒤로 걷다 그만 지나가던 행인과 부딧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깜짝놀란 장화는 서둘러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넘어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노랑빛의 비단 치마가 흙으로 조금 더러워지긴 했으나 이쯤이면 그냥 털어도 무난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치마보다 동생의 상태가 더욱 걱정되었다.
" 괜찮니? 홍련아? "
" 으응. 괜찮아. 아, 깜짝이야. "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장화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홍련은 몸을 돌려 자신과 부딧친 행인을 보았다. 우선 먼저 조심성없이 부딧친건 그녀였으니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하는것이 맞기 때문이었다.
" 괜찮소? "
" … ! "
그러나 자신과 부딧친 행인을 보자 홍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6척쯤(180cm) 되는 큰 키에 호리호리 하지만 강직한 체구의 사내는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얀 피부와 검은 눈동자가 신비스러워서 홍련은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그리 잘생긴 사내는 또 처음이었다.
" 저기 괜찮소? "
" 네, 네?! "
그가 되물어 보기전까진 멍때리던 그녀가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러자 그것이 부끄러운지 그녀가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 미안하오. "
" 괘,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송구… 합니다. "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개미처럼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때, 사내의 옆에서 까랑까랑한 여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낭. 왜그러시나요? "
눈매를 홱, 치켜올리며 사내에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불쾌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의 말에 사내는 애써 미소지으며 여인을 달랬다.
" 나의 과오로 부딧쳤소. "
" 송, 송구합니다. "
" 송구하면 되었습니다. 낭. 괜찮으신지요? "
" 그렇소. "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홍련은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사묻혀 버리는듯했다. 낭. 그게 저 사내를 부르는 호칭인건가? 그리 부른다는것은….
' 혹시 연인…? '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홍련의 마음 한구석이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파왔다. 생전 처음본 사내인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혼란스러운듯 좌우로 흔들렸다.
" 송구합니다. 제 동생때문에 괜스레 나으리까지 부딧치게 되었습니다. "
" 전 괜찮으니 동생분을 챙겨주십시요. "
" 예. 살펴가세요. "
홍련을 부축하던 장화는 사내를 힐끔, 보곤 사과의 말을 건냈다. 그녀의 사과까지 받으니 사내는 좀 난감한 얼굴로 옆에 끼고있던 여인과 함께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어느새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남은 장화는 홍련의 어깨를 감싸쥐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고개만 숙인 채 가만히 있었던 동생이 걱정되었다.
" 홍련아. 왜그래? 넘어진데가 아퍼? "
" 아니… 아니야. "
홍련은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예전처럼 환히 웃었다. 얼굴에 물들여진 붉은 홍조가 눈에 거슬렸으나 장화는 애써 동생의 얼굴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며 앞을 보았다.
저잣거리의 활기찬 모습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