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지옥연애환담
작가 : 황도톨
작품등록일 : 2017.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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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악의 하루
작성일 : 17-06-27     조회 : 476     추천 : 2     분량 : 9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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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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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제 제일 일거야, 이제 마지막 일거야 라고 멍하니 방심하고 있을 때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진언이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최악의 뉴스를 멍하니 들으면서 쥐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젓가락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체 멍 하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저 요망진 입술을. 생각해보면 오전에 나쁜 소식을 전해 온 것도 저 요망한 주둥이였다.

 

 

 “뭐.. 라고요?”

 

 

 어이없어하는 진언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2년 동안 진언은 몇 번 들어와보지도 못한 회의실로 한 대리가 진언을 호출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한 거 같기는 했다. 평소 진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이사원이 히죽 웃는 얼굴을 봤을 때부터 감이 안 좋기는 했다. 그래도 지금 진언이 들은 말은 너무 그냥 이상한 감을 운운하기엔 너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게.. 이게 원래 정식으로는 과장님이 말씀하셔야 되는 게 맞긴 한데, 자기가 말하긴 좀 그렇다고, 나 더러 좀 부탁을 해서, 하는 말이거든? 그러니까 이게 순전히 내 의견은 아니라는 거지. 그건 이해하지?”

 

 “아뇨, 전혀 이해 못하겠는데요. 아니, 제가 이해를 못한다는 건 한 대리님께서 이 말을 하는 게 한 대리님이 의견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 못한다는 건 아니고요. 왜 제가 재계약이 안 된다는 거죠? 아니, 그걸 떠나서 분명히 처음 입사 때, 그냥 2년 계약직은 그냥 통과의례일 뿐이고, 2년 뒤에는 정규직으로 전환 될 거라고 분명히.. 아니, 이건 한 대리님이랑 이야기 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진언씨, 흥분하지 말고.”

 

 “지금 제가 흥분 안하게 생겼나요? 2년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 될 거라고 말씀하셔서 2년 동안 회식 한번 참석 못하고, 보너스 한번 못 받고 참았는데, 정규직 전환은커녕 재계약을 안 되게 되었으니, 다음 달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는데?”

 

 “회식... 가고 싶었었어?”

 

 “그 말이 아니잖아요!”

 

 진언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2년 동안 있으면서 진언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한 대리는 움찔하고 말았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진언이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라는 알 수 있었다. 김과장은 어째서 이 일은 자신에게 맡긴 걸까? 원래는 자기가 할 일인데... 진언의 1차 실무진 면접을 본 것도 김과장이었고, 진언의 말대로 입사 후의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한 것도 전부 김과장이었으며, 총무과의 수장을 엄연히 김과장이었으니, 인사과를 겸하고 있는 총무과이니 인사의 총괄책임자 역시도 김과장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싫은 일 대신 하는 게 아랫사람 일이지 뭐.’

 

 

 한 대리는 속으로 김과장을 원망하면서도 이해하며, 화난 진언을 달래려 다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뭐 김과장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김과장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면 뭔데요?”

 

 “아니, 그러니까 뭐... 회사 방침이라는 거지.”

 

 “하루아침에 말 바꾸는 게 회사 방침인가요? 아니면, 처음 입사 시킬 때는 감언이설로 꼬드기고, 퇴사 처리 할 때는 안면몰수 하는 게 회사 방침인가요?”

 

 “그게 아니라, 회사 방침은 사실 나도 모르겠고, 김과장님도 모르지. 그냥 그러라고 하면 그러는 게 우리 일 이라는 거지. 진언씨가 이렇게 해도,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김과장님이랑 이야기 할게요.”

 

 “김과장님이랑 이야기해도 어쩔 수가 없다니깐.”

 

 

 한 대리는 진언을 좀 더 달래보려고 했지만 진언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매서운 눈빛을 방안 어딘가를 노려보기만 할뿐, 한 대리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거부했다. 곤란한 표정이던 한 대리를 결국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계약직인 진언이 이렇게 버티고, 정규직이면서 사원도 아니라 나름 대리라는 직급의 한 대리가 이렇게 물러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지만, 지금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한 대리도, 진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한참을 진언이 혼자 바닥을 노려보는 와중에 슬쩍 회의실 문이 열리고, 김과장이 들어왔다. 김과장의 얼굴에도 미안함이 가득했다. 사실 면접 때부터 진언을 좋게 보고, 일 잘한다고 예뻐했던 김과장이었다. 오죽하면 정규 입사자인 이사원보다, 진언을 더 좋게 보고, 칭찬을 더 많이 하자 질투난 이사원이 진언에게 쓸데없이 경쟁심을 불사 지르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입버릇처럼 진언이 빨리 정규직 전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것도 김과장이었다. 진언 같은 사람이 회사에 많아야 일이 잘 돌아간다며. 그럼 김과장이었으니 진언에게 퇴사라는 요청, 아니 선고를 하는 것이 많이 껄끄럽기도 하긴 할만 했다.

 

 

 “말씀 해보세요.”

 

 

 김과장이 들어올 때부터 우물쭈물, 의자에 앉고 나서도 우물쭈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자, 답답했던 진언이 먼저 말문을 텄다.

 

 

 “한대리한테 들은 대로 지, 뭐... 아니, 나야 정말 진언씨 아끼는 거 알잖아. 진언씨가 내 밑에 있었으면 했고. 응? 진언씨가 그건 더 잘 알잖아.”

 

 “근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정규직 전환은 고사하고, 재계약도 안 되니, 다음 달에 퇴사를 하라뇨? 아니, 퇴사도 아니죠, 계약만료죠?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알지, 알지. 진언씨 마음. 근데 내 마음도 좀 알아줘. 나는 진짜 진언씨랑 일 하고 싶다니깐? 근데 회사에서 계약을 갱신 안한다는데, 정규직 전환은 안 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그래?”

 

 

 “그러니까, 왜 안한다는 건데요? 왜 약속을 안 지킨다는 건데요? 분명히 저 입사할 때 말씀 하셨잖아요. 2년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 된다고. 그냥 인턴기간이 조금 긴 거랑 똑같은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인턴도... 뭐.. 다 정규 입사하는 건 아니니까….”

 

 “과장님!”

 

 “그래. 알지, 알아. 내 입으로 말해놓고 기억안난다고 하면 내가 죽일 놈이지. 근데 진언씨, 진짜 나 좀 살려주라. 나도 그때는 회사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고, 지금도 그냥 회사가 그렇게 안 된다고 하니까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응? 올해에 정규직 채용이 없다는 데 내가 뭐라고 해? 인원 필요 없다고, 재계약 안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냐고. 나 그냥 과장이야. 그것도 입사 20년에 10년째 과장인, 만년과장. 회사에 줄 하나, 끗발 하나 없는 그냥 그런 아저씨야.”

 

 

 결국 마지막은 자기신세타령으로 끝나고 말았다. 진언도 아무 말이 없고, 김과장도 아무 말이 없었다. 서로 자신의 신세만 곱씹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건 만년 과장이든 뭐든 회사에 남은 김과장의 처지가 훨씬 좋은 처지라는 거였다.

 

 

 짧은 침묵 뒤에 눈치를 보던 김과장이 먼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앉아서 생각 정리 좀 하고, 그러고 사무 봐. 아니면 좀 바람 쐬고 점심 먹고 나서 일 봐도 되고.”

 

 

 툭- 하고 김과장이 진언의 어깨를 쳤다. 평소 같으면 수고해- 라는 정도의 의미였을 텐데, 오늘의 그 툭- 에는 참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거 같아서, 진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고, 김과장이 나갔다. 진언이 혼자 남자 눈물은 더욱 차올라서, 진언의 눈 안에 그렁그렁 맺혔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진언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또 깨달았다. 왜 하필, 자신이 정규직을 전환될 때, 회사는 더 인원을 뽑지 않겠다고 한 건지. 왜 하필, 많은 회사 중에서 이런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한 건지. 왜 하필, 장학금 조금 더 받겠다고 그 대학에 들어갔던 게 스펙이 조금 모자라 이런 회사에 지원 하게 되었던 건지, 또 그렇게 따지자면 왜 집에 돈 든다는 이유로 학교 다닐 때 임원 같은 걸 하지 않아서 내신 스펙을 쌓지 않았던 건지, 아니 그렇게 올라가자면 왜 돈이 없는 집에 태어나서, 왜 하필 우리 아버지가 중학교 때 돌아가셔서...

 

 

 -아니야!

 

 

 계속 이유를 찾으려 거슬러 올라가던 진언을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적어도 그때 까지 올라가서는 안됐다. 오늘 자신의 해고를, 자기 집안 사정까지 끌어들여서는 안됐다. 적어도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을,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해서는 안됐다.

 

 

 “하아...”

 

 

 작은 한숨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내 탓이야. 그냥 내 탓이야. 내가 모자란 탓이야.

 

 

 진언은 억지로, 억지로 자신을 탓했다. 그 방법 외엔 진언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김과장의 말대로 김과장을 탓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고, 일개 계약직 직원인 진언이 회사에 무슨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아니, 할 수는 있겠지만 들어 주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아...”

 

 

 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두 번의 한숨에 차올랐던 눈물도 어느새 들어가 버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이던 진언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하자! 아직 잘린 거 아니잖아. 일해야지.”

 

 

 두 번째는 점심 식사 후의 일이었다. 대부분 점심을 사 먹었지만, 진언은 도시락파여서 다이어트 한다고 도시락을 싸오는 여직원 한명과 같이 회사 안에서 먹고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는 집에 언제 이야기를 하느냐였다. 바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새 직장을 구하고 나서 해야 할지, 근데 그 새 직장이 언제 구해질지 알아서 언제 말해야 하는 건지, 도통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해야 할 텐데, 면접이라도 잡히면 반차를 내고 가야할거 같은데, 남은 연차 개수는 또 몇 개인지, 이걸 또 면접을 보러 간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개인사정이라고 말하면 되는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쌍둥이들 생각도 났다. 이제 둘 다 고3이고, 둘의 내년 대학 입학을 위해서 들어둔 3년짜리 적금이 생각났다. 한 달에 12만 5천 원씩 2개, 3년짜리 적금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그게 뭐야? 라고 할 만한 금액이었지만, 진언네 형편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 금액도 10만원과 15만원을 가지고 엄마랑 어지간히 옥신각신하면서 그럼 그 중간으로 하자며 정한 금액이었다. 그때가 생각이 나서 진언은 피식 웃어버렸다.

 

 

 -정언이는 공부도 잘해서 의대 같은데도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면 저 적금으로는 어림도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중에 자기같이 나중에 더 좋은데 갈 걸이라고 동생이 후회하느니, 진언의 등골이 휘어지더라도 좋은데 보내고 싶은 게 욕심이었다. 대학을 생각하니 딱 10번이 남은 학자금대출도 걱정이었다. 이제 열 번이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10번이 까마득한 횟수로 느껴졌다.

 

 

 돈- 돈- 돈-

 

 

 그 놈의 돈이 원수였다.

 

 

 "진짜? 대박~"

 

 

 조용하던 사무실에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점심시간이라고 밥 먹으러 나왔던 사람들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맛있게 드셨어요? 뭐 드셨어요? 라며 생글거리며 말을 걸었을 진언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다이어트 한다는 여직원도 산책이라도 나갔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 사무실 눈치를 보는 것 같던, 목소리들이 연이어서 들려왔다. 돈 걱정을 하던 진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올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럼, 상무님 딸이 다음 달부터 우리 총무과 수습으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수습은 무슨 수습이야, 그냥 말만 수습이지, 그냥 입사하는 거지."

 

 "저희 이번에 채용하는 인원 없다면서요."

 

 "정규 채용이 없다는 거지, 특채찮아 특채. 특채가 괜히 특채겠어?"

 

 "뭐야~ 진언씨는 정규전환도 안 해주고, 재계약도 안한다면서, 낙하산만 하나 내려 보내고. 하아- 상무님 따님이면, 뭐 시키지도 못하겠네."

 

 "그렇지 뭐. 이제 복사도 각자 하고, 커피도 각자 타고, 뭐 그런 거 각자들 해야지."

 

 "아니, 그게 무슨 수습이야. 상전이지."

 

 "당연히, 상전이지. 내 생각엔 그 상전이 김주임 대리 다는 거보다 더 빠르게 대리 달걸? 대리가 뭐야? 2년 내에 차장쯤 달지 않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 진언씨.. 사무실에 있었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진언이 사무실 사람들을 쳐다보다 다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로 진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진언과 딱 눈이 맞아버린 사람은 김과장이었다. 김과장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진언의 눈치를 살폈지만, 서리가 폴폴 날리는 진언의 눈빛에 그냥 깨깽- 하고 눈을 깔고 말았다. 김과장이 당첨된 걸 알아챈 사무실 사람들은 재빨리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결국 김과장은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서 진언의 앞에 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렇게 됐어. 미안해, 진언씨."

 

 "그러니까... 상무님 따님을 꽂으려고 제가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꼭 그렇다기 보다는... 시기가 안 좋았지."

 

 "시기가.. 안 좋았.. 다뇨?"

 

 "상무님 딸 유학 끝난 시기랑 진언씨 계약만료일이 딱 맞았다보니..."

 

 "마침.. 이었다는 거예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또 한 번, 김과장이 진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다였다. 운이 나쁜 것.

 

 

 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것을 진언은 겨우겨우 참아냈다. 상무 딸로 태어나, 유학만 다녀오면 직장이 생기는 건 그냥 운이 좋은 거였고, 2년 동안 고생해서 계약직을 끝내고 나니, 해고만 남은 건 그냥 운이 나쁜 거였다.

 

 

 억울했다. 하지만 또 그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것은 회사를 마치고 나서였다. 해고 통보를 받은 날도 칼퇴는 없었다. 분명 근로계약서는 9시 출근 6시 퇴근이었는데, 원래 그런 거라며, 예의라며 회사는 8시 30분에 출근하기를 강요했다. 퇴근 역시도 원래 그런 거라며, 일찍 마치면 6시 반에서 7시였다.

 

 

 오늘 마치고는 남자친구에게 푸념을 하리라. 오늘은 맥주 한 잔에 주정을 좀 부리더라도,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을 아주 조금은 보여도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이해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맥없이도 약속장소는 김밥천국이었다. 평소에 둘이 자주 가던 곳이었지만, 그래도 오늘 거기는 좀 아닌 거 같아 항의의 표시를 했던 진언이었지만, 일단은 거기서 보자는 말에 져주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오면 주문을 하겠다며, 오도카니 앉아 있노라니 피식 웃음이 났다. 무슨 술집이나 근사한 밥도 아닌, 그저 한 끼 때우러 오는 사람이 보통인 김밥천국에서 일행이 오면 주문하겠다니...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문득 웃기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한 대리의 얼굴의 보였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진언을 보았는지 한 대리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진언의 앞에 앉았다.

 

 

 "시켰어?"

 

 "아직."

 

 "이모~ 여기 김밥 두 줄이랑.. 어... 네, 뭐 그냥 그렇게 주세요."

 

 

 진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한 대리가 주문을 했다. 아니, 지금은 한 대리라고 부르기 보다는 지훈씨라고 불러야 할 거다. 진언의 남자친구, 한지훈.

 

 

 "내가 점심에 김밥이 먹고 싶었는데, 그놈의 김과장, 순댓국 지겹지도 않나."

 

 

 혼자 주문을 하고, 혼자 툴툴 거리고, 혼자 젓가락을 집었다. 미리 가져다준 단무지 하나를 베어 물고, 그제야 진언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 오늘 좀 그랬지?"

 

 

 지금 단무지가 입에 넘어가니? 라는 표정의 진언을 보고 지훈이 입을 떼었다. 좀 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알아주는 구나 싶어 진언의 마음 한구석이 찡해왔다.

 

 

 "김밥 나왔다 먹자!"

 

 

 아주머니가 금방 김밥을 썰어 나오자, 지훈이 눈이 금방 그쪽으로 쏠렸다.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먼저 제 입으로 김밥이 들어갔다. 진언의 눈물도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허겁지겁 김밥 한 줄이 벌써 지훈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진언의 입으로 들어간 건 딱 두 개 였다. 이제 좀 배가 차는지 된장국을 한 모금 마시더니, 지훈이 진언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 눈치 보지 말고 먹으라는 듯 진언은 김밥을 조금 더 지훈 쪽으로 밀어주었다. 지훈도 그런 진언을 보며 하나다 김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선 조금 씹다가 다시 진언의 눈차를 보았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진언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훈을 쳐다보았다. 말 꺼내기가 껄끄러운지 지훈이 몇 번이나 제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침으로는 안 되겠는지, 옆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네가 오늘 좀 많이 힘들었잖아. 그래서 내가 오늘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건지 싶기는 한데..."

 

 "뭔데?"

 

 "그게... 우리 헤어질까? 아니, 아니. 우리 헤어져."

 

 

 툭- 하고 진언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진언을 모습을 보자 양심에 찔리는지 슬쩍 지훈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슬

 쩍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 하나를 더 꺼내 진언의 앞에 세팅을 놓는 지훈이었다.

 

 "뭐라고?"

 

 "헤어.. 지자고."

 

 "왜?"

 

 "왜라고 하면... 뭐.. 이유는 많은데..."

 

 "많다고?"

 

 

 헤어지는 이유가 많다고 하는 지훈에게 버럭 진언은 소리를 치고 말았다. 진짜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어제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사이좋던 남자친구가 헤어지자는데, 어떤 이별의 낌새 하나 없던 인간이 헤어지자는데 이유가 많단다.

 

 

 "왜 소리를 지르냐? 쪽팔리게."

 

 "그래. 그 많은 이유 들어나 보자. 왜 헤어지자는 건데? 그것도 하필 오늘? 이 타이밍에?"

 

 "하필 오늘이라기보다는... 오늘도 하나의 이유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잘렸잖아."

 

 "그래. 아침에 니가 니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 근데 오늘 회사 잘린 사람에게 이별 통보하는 그 못된 심보는 대체 뭐냐고."

 

 

 어느새 지훈씨가 ‘니’가 되었다. 1년 남짓 사귀면서 한번도, 그런 호칭으로 지훈을 부른 적이 없었지만, 진언도 지훈도 ‘니’라는 단어가 전혀 생경하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는 딱 올바른 3인칭 대명사였다.

 

 

 "그러니까, 너 잘렸으니까 그 김에 이야기 하는 거라고. 너 대출 얼마 남았댔지?“

 

 “오백.”

 

 “난 천오백. 너 모아둔 돈 있어?”

 

 “한.. 오륙백?”

 

 

 사실, 그 돈은 쌍둥이 등록금이고, 적금을 다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를 불확실한 돈이었지만, 뭐라도 있어야 자존심이 살 거 같아서 일단 진언은 질렀다.

 

 

 “난 빵원. 정리를 하자면 너 스물여덟에 빛 오백에 모아둔 돈 오백으로 빵원이야. 난 서른에 빚만 천오백이고. 우리 합치면 그냥 마이너스 천오백이야.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하 땅굴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근데, 이제 넌 심지어 백수야. 너는 우리 회사 들어오고 싶어서 난리지만, 이 회사 그냥 중소기업이고, 잘 봐줘야 중견기업이야. 난 그냥 3년차 대리. 대기업 신입 연봉만도 못해. 우리 둘 조합, 답도 안 나와.”

 

 “누가 결혼하제?”

 

 “결혼 생각하면 더 하지. 너 홀어머니에 미성년자 동생 둘. 나 홀아버지에 망나니 형 하나. 답 더 안 나와. 연애니까 그나마도 한 거야.”

 

 

 기어코, 진언의 눈에서 눈물이 뚝 흐르고야 말았다. 앙다문 입술에 흐느낌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분한 마음에 눈물을 떨어지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지훈도 제가 잘못한 건 알기 아는 지, 젓가락을 놓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김밥 말던 아주머니가 이쪽을 쳐다보는 걸 느낀 진언은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러니까, 나 흙수저에 너 흙수저니까, 둘 다 흙만 퍼먹고 살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나 백수라서 이제 아예 수저도 없을 거니까 헤어지자고? 그 말이야?”

 

 “말하자면, 그렇지.”

 

 

 8개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사귀었었다. 처음에 먼저 호감을 표시한건 지훈이었다. 그런 지훈에게 자기 집 처지와 남은 대출금까지 말하며, 지금은 연애를 할 처지가 아니라고 거절까지 했던 진언이었다. 그래도 좋다고 한건,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한건 지훈이었다. 둘이 아직 젊은데 돈이 무슨 상관이나며.

 

 

 그래서 데이트도 항상 번듯한 레스토랑이나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간 적이 없었다. 이런 식당에서 한 끼를 때우고, 둘이 거리를 걸었다. 혹은 진언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공원에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가끔은 아침 일찍 만나 조조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래도 늘 즐거웠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끝이 이렇게 비참할지 모르고서 과거는 그렇게 행복했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 뭔데?”

 

 “8개월 전에 당신이 두 번째로 사귀자고 했을 때, 수락한 내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

 

 “야, 뭘 그렇게 까지...”

 

 “8개월 동안 당신 손을 수십 번 잡은 내 손목가지를 잘라버리고 싶어.”

 

 “김진언.”

 

 “그리고, 그 8개월 동안 당신 보면 두근거리고 좋았던, 내 심장을 잘게 쪼개버리고 싶어.”

 

 “...”

 

 “절대로 잘 먹고, 잘 살지 마. 나쁜 놈아.”

 

 

 아무 말도 못하는 지훈을 두고 진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거리는 어두워져 있었다.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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