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악!"
여인이 힘겹게 소리질렀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기가 위험해질것이라는 산파의 말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공작부인,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머리가 보입니다!"
산파는 눈 앞의 이 여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그러니 산파는 어떻게든 이 여인과 아기를 살렸어야 했다.
"으아아아악!"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고 배에 힘을 주었다. 다리 밑으로 아기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 여인은 짧게 안도하며 곧장 기절하였다.
"응애! 응애!"
벌컥
건강한 아기 울음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지자 금발의 20대 후반 남성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인!"
"공작님, 부인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그리고 건강한 아가씨옵니다."
산파가 아기를 비단이불에 감싸며 대답했다. 공작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창백했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다행이구려."
공작은 산파에게 아기를 달라는 듯 손짓했다. 산파는 비단 이불에 쌓인 아기를 조심스레 공작에게 건네주었다.
"부인을 닮아서 그런지 정말 예쁘구나. 아이가 없던 우리에게 너를 보내주신 주신께 감사하며 너를 하람(하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부르마. 알겠느냐, 나의 딸 하람 이플.
***
"보단! 하람 아가씨를 찾았나?!"
저 멀리서 뛰어온 금발의 기사단장이 보단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찬 단장님."
"서둘러 찾아라! 도대체 어디를 가신거지?"
기사단이 하는 온종일 업무가 7살된 여자아이를 찾는 짓은 절대 아닐 것이었다. 은빛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며 전쟁터를 누비던 때는 이미 오래전일이 되어버렸다.
7년 전부터 그들의 주군은 전쟁과 싸움은 일체 상종을 하지않았다. 아마 아가씨가 태어났기 때문이라.
이제는 하루하루 집 떠난 서방님을 그리워하는 아내처럼, 전쟁터를 그리워하는 베이비시터들로 다들 전락해버렸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사고를 치는 아가씨 덕분에 이 성의 하수인들만 죽어나갔다. 익숙해질법도 하건만 매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기사단장 때문에 그의 직속상관인 자신만 힘들었다.
보단은 사고뭉치 아가씨를 찾으러 다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 모습을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골칫덩어리 아가씨는 입밖으로 삐져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꾸역꾸역 참았다.
허리까지 오는 은색 머리칼을 오른쪽으로 넘겨 땋은 머리모양은 중간 중간에 분홍 꽃을 꽂아 귀여움을 한층 더했다. 얼굴은 못생긴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국지색은 아닌, 평범한 축에 속하는 아이 특유의 하얗고 뽀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보고 또 봐도 보고싶은 싱그러운 숲을 닮은 눈동자였다.
"...쿠쿡"
결국 그녀는 입 밖으로 웃음을 내보냈다. 아주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그녀를 찾고 있는 기사들은 대륙에 널린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급이 달랐다. 이곳의 기사단은 라온하제 제국의 7대 귀족가 중 한 가문인 '이플'가의 기사들이었다. 그 중 한명인 나라찬은 그런 대단한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이플가의 기사단장이었다.
"아가씨! 그런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치시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분명 그가 있는 곳과 나무와의 거리가 꽤 있었는데 나라찬은 이 사실을 아가씨가 깨닫기도 전에 나무 밑에 와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 나무가 가지에 올라와보라고 했단 말이야~"
물론 나라찬은 이 말을 혼나기 싫어서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의 변명 쯤으로 치부하고 그녀를 타박했다.
"네. 저에게도 들리는군요. 나무가 어서 내려가라고 소리치는 것이요."
"진짜라니까?"
단호한 나라찬의 눈빛을 본 그녀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나라찬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무에서 떨어지는 말썽꾸러기 아가씨를 받았다.
"제발, 위험한 짓 좀하지마십시오."
그 말 뒤, 나라찬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
"아오, 나라찬의 잔소리는 진짜 듣기 힘들다니까."
한시간 넘게 그 귀 아픈 나라찬의 잔소리를 계속 들었더니 머리가 아프다. 이쯤되니 고개는 끄덕이면서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나는 내 방에 있는 전신거울로 허리는 굽히고 팔을 늘어뜨린, 일명 원숭이 자세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7년을 넘게 봤는데 적응 안된다니까. 진짜 인간의 몸이라니."
나는 분명 황제의 발에 짓밟혀 죽었었다. 그런데 왠걸. 인간으로 환생했다. 그것도 공작가의 금지옥엽 외동딸로 말이다.
"아기였을 때는 붉은 머리카락일 줄 알았는데 이 은발은 또 어떠하고."
환생하고 아기였을 때는 한동안 내가 꿈을 꾸는지 알았다. 하지만 따뜻한 어머니의 온기와 아버지의 웃음 때문에 정말로 사랑 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닌 걸 깨닫자 마자 상황파악부터 했었다. 하지만 아기때는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제한적이였다.
그래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린 시간의 보답은 바로 '지식'이었다.
내가 환생한 이곳은 전생에 튤립으로 살았던 세계와 같은 세계였다. 단지 '시간'이 달랐을 뿐. 나는 내가 죽기 전의 20년 전으로 환생했다.
하지만 알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웠다. 내가 튤립이었을 때 알고 있는 지식은 소량이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글을 배우고, 책을 읽고, 내가 배울 수 있는 지식을 최대한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190년 전 하나의 제국으로 대륙이 통일되었다. 대륙의 이름 또한 제국의 이름과 같았다.
대륙의 이름은 '라온하제'였고, 하나로 통일된 국가 이름도 라온하제 제국이었다. 대륙을 하나로 통일 시킨 국가는 북방에 존재했던 혹설의 나라.'라온하제 왕국'이었다.
이 북방의 야만족들이 대륙을 통일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라온하제 왕국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하지않았다.
하지만 그 얼음의 땅에서 최남단인 뜨겁고 짠내나는 바다의 땅까지 정복했을 때는 대륙의 모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라온하제를 찬양했다. 음유시인들은 자신들의 황제를 신이 보내준 이라 믿으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지금 현 황제는 11대 황제인 이든 라온하제였다. 전생에 나를 죽인 황제놈의 아버지였다.
내 기억으로는 현 황제는 앞으로 10년도 채 안되는 시간 후, 젊은 나이에 죽게 될 것이였다. 그것도 황태자의 손에 수도 성벽에 거꾸로 매달려 굶어 죽게 될 테지.
그 뿐만이 아니라 그놈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황자들도 다 사지를 찢어 죽여 버렸다고 종달새들에게 들었었다.
그때 황태자의 나이가 아마 17살이었더라지.
확실히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지금 황태자인 그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 황제도 성군은 아니었다. 오히려 멍청한 허수아비 왕이다. 나랏일은 손놓은지 오래였고, 매일 향락과 사치에 빠져 백생들의 피 땀 흘려 번 금화를 펑펑 물 쓰듯 쓰고있었다.
하지만 대륙은 통일 되었고 유일한 제국의 황제가 멍청하다고 제국이 망하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손바닥 안에서 굴릴 수 있는 황제가 필요했고 그 황제가 지금의 현 황제였다. 이런 귀족들의 머리 위에 있는 귀족들이 바로 진정한 실세인 왕국에서 제국이 될때까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한 7대 귀족가였다.
첫번째 가문인 '예그리나' 가문은 라온하제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가였다. '예그리나 가'는 라온하제 제국이 왕국이었을 적부터 왕을 보필하던 책사 가문이었다.
이 가문에서는 대대로 뛰어난 연구가나 현자를 배출했고, 초대황제에게 대공의 직위를 직접 수여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현 대공인 세움 예그리나는 전생에 황태자를 황제로 미뤄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두번째 가문인 '아사'가문은 무가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아사 가문의 현 가주인 바오 아사 후작은 황실 근위대장으로 그 옛날 북방의 라온하제 왕국의 검술을 계승하고 있었다.
아사 가문의 후계자는 독특하게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이었는데 그 이유는 후계자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혹독한 훈련을 하기 때문이였다.
예를 들면 괴물이 나온다는 설산에서 한달동안 살아남기라던가, 독생물이 가득한 늪지대에서 100년에 한번 피는 희귀한 약초 구하기라던가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죽는 이가 발생했다.
세번째 가문은 '바론' 공작 가문이었다. 바론 가문은 문가의 으뜸이었다. 황제가 여자들을 끼고 술에 빠져 살때, 황제의 업무를 대신 해주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바론가의 인재들이었다. 물론 황제의 직인은 황제가 직접 찍었다. 대충 찍고 넘긴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리고 풍문으로 그 인재들 중 한사람이 바론가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은근히 돌고있었다. 초대 황후 (후세에도 보지 못할 뛰어난 절세가인이라는 기록이있다.)도 울고 갈 엄청난 미남이라는 소문은 덤으로 말이다.
네번째 가문인 '아리솔' 후작가문은 그 옛날 제국이 왕국이었을 시대에 가장 비옥진 땅이었던 전 오비다 제국의 땅을 받은 가문이었다. 현 가주인 나오 아리솔은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부유한 자일것이라 세간에서는 추측했다.
그의 재산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축적된 자산이 라온하제 대륙의 절반을 사고도 남을 돈이라 하였다
다섯번째 가문은 '마루나' 백작가문이었다. 7대 귀족가문 중 유일하게 백작가문이었다. 마루나 백작가는 아사 가문과 견줄만큼 뛰어난 무가였다.
하지만 마루나 가문 사람들은 기사가 아닌 전사에 가까웠다. 그들의 검술은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동작만 검술에 담았고, 이기기 위해서는 비겁하더라도 눈에 흙을 뿌리거나 깨무는 일도 검술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라온하제 왕국의 검술을 계승한 아사가문이 아닌 그들을 북방의 야만인이라 불렀다.
여섯번째 가문은 '안다미로' 공작가문이었다. 어떻게 된일인지 이들은 알려진 정보가 극히 적었다. 현 가주인 얀 안다미로는 황제와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내온 황제의 소꿉친구였다.
아이였을 때는 서로 절친한 벗 사이였다지만 성인(16살)이 된 이후부터는 사적인 만남이 아예 없어졌다고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가문은 나의 가문인 '이플' 공작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