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허리를 숙여 깍듯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녀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무탈히 다녀오려무나."
"네. 조히, 주나! 저 다녀올게요! 올 때 기념품 많이 사올게요~"
조히와 주나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주성에서 일하고 있는 부부였다. 굶어 죽기 직전에 아버지께서 발견하셔서 영주성에 데려왔다고 들었다. 부부에게는 이 성이 안신처였고 자신들이 갚아나가야 할 빚이었다.
"기대할게요, 아가씨. 수도가서도 사고치지 마시고요."
"에이, 누가보면 맨날 사고만 치는 줄 알겠어?"
"맨날 사고만 치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뜨끔
아가씨한테 이렇게 막말해도 되는거야?! 내가 진짜 서러워서 사나.
괜스레 찔려서 나는 손을 모으고 탄청을 피웠다.
고개를 내리니 햇빛이 은근슬쩍 내 발 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고개를 올리니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정처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음...... 햇빛도 적당하고. 바람도 선선하고. 날씨 진짜 죽이는데?
왠지 모든 일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릴 것만 같다.
"그런데 나라찬, 가방에 뭘 그렇게 많이 챙겼어?"
가방에 무얼 바리바리 넣었는지 가방이 빵빵하다못해 떠지기 직전이었다. 크기는 내 키보다 살짝 작았다.
오. 외로울 때 친구 삼아도 되겠는데?
"무겁지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없으십니다."
아니. 너말고 내 친구가 될 예정인 가방이 걱정되는데......
"뭐, 너가 그렇다면야."
결국 가방은 나라찬의 등 뒤를 모두 차지했다. 나는 티나에게 관심을 돌렸다.
"티나도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챙겼어? 원래 수도가면 많이 챙겨야 하는거야?"
아무리 수도를 안가봤어도, 이건 너무 한거같은데. 무슨 가출하는 것도 아니고.
"네. 원래 수도에 가면 이렇게 챙기는거랍니다."
"진짜?"
"하하, 진짜랍니다. 그리고 저는 여자니까요."
너가 여자라는 것에 더 문화 충격을 받았어. 티나.
달그닥 달그닥
마부가 마차를 끌고 우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차는 무척 단조로웠다. 화려한 꾸밈 하나 없는, 그저 사면이 모두 은색을 띄었고 양 옆에 조그마한 창문이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영주성에서 보았던 마차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가문의 문장인 검은 독수리 문양이 없었다.
"가문의 문장이 없는데요? 혹시 잘못오신건가요?"
내가 당황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드셨다.
"아니. 이 마차가 맞단다. 혹시 모를 분상사를 대비해서 단졸한 마차로 준비했단다. 너는 이플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니까."
잠깐만.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네, 네? 후계자라니요."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지금 다들 나만 빼놓고 장난이라도 치는거야 뭐야.
만약 정말로 장난이라면 기분 나쁘다 못해 불쾌했다. 불쾌하지만 가슴 속에 자리잡은 이 불길함은 가시겠지. 차라리 장난이었으면하고 바랐다.
"이플가를 이을 그이의 자식은 너 하나뿐이니까. 만약이라는게 있잖니."
"하지만 여인은 가문을 이을 수 없는걸요."
"아니. 아주 이례적이지만 이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있단다."
아버지의 서재에서도 조차 여인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적혀진 책은 보지못했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한 호기심에 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인데요?"
"......"
어머니께서는 입을 굳게 다무셨다. 아무래도 이야기해주실 생각이 없으신 듯하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나에게로 옮겼다. 그러고서 아까부터 계속 손에 쥐고있던 정체모를 상자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무엇이죠?"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그안에는 검은 독수리 문양이 걸려있는 목걸이가 있었다. 목걸이는 관리를 잘했는지 광택이 흐르고 조금의 깨짐도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란다. 가문의 문양이지."
"아니,아니요. 이걸 왜 저에게 주시냔 말이에요!"
한번도 어머니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불길함이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가문의 후계자이니 주는거란다."
"정말로 그뿐인가요?"
"그래. 그뿐이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로 그뿐인가요?"
"......그래. 정말 그뿐이란다."
"어머니. 믿겠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믿겠다. 아니,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뿐이기를 바라고 바랐다.
목걸이를 목에 걸고 안보이게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느 남작가문의 문양도 아니고 공작가문의 문양이었다. 그것도 7대 귀족 중 한가문인 이플가 후계자의 문양.
같은 귀족가문이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랐다. 악용한다면 한순간 제국을 흔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내가 그대로 가주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귀족들은 나를 절대 인정하려 하지않을것이다. 귀족들의 수치이자 치부였으므로.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를 인정한다면 대륙이 통일된 이후로 최초의 여공작이 탄생하는거였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겠지.
도대체 어머니께서는 이것을 왜 나에게 주신걸까.
"그럼 모두들 다녀올게요! 다시 돌아왔을 때도 저 반겨주셔야 해요?"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특히 반겨달라는 부분에서.
"알겠습니다. 아가씨."
상큼하게 미소지으며 모두와 작별인사를 한 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들어가려고했다. 나를 막아서는 나라찬만 아니었다면.
그는 정중히 손을 뻗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서 자신이 먼저 들어갔다. 아마도 위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라찬이 마차에 들어간 후, 곧장 티나가 따라 들어갔다. 밖에 있기 지루해질 때쯤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마지막으로 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라찬은 오른쪽에 앉아있었고, 티나는 그 반대편에 앉아있었다. '어디 앉아야 하지?'하고 고민을 시작할 즈음에 나라찬이 메고 있던 가방을 자신의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이거 옆자리에 앉지 말라는 무언의 뜻인건가.
나는 티나의 옆자리에 사뿐히 앉았다. 어차피 미혼의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는 건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다. 만약 앉을 자리가 없으면 남자가 예의상 자리를 비켜줬었다. 하지만 이건 레이디와 신사간의 예의였다.
그렇다고 내가 레이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나와 나라찬은 여동생과 오빠 같은 사이였다. 나라찬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는데 나와 거의 10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뭐, 귀족들끼리 10살차이가 아니라 20살차이도 혼인하기는 하지만 어쨋든 나라찬에게 나는 보호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고, 나한테 나라찬은 오빠 같은 존재였다.
결론은 우리가 같이 앉아도 오해 할 사람은 없다는 소리였다.
열심히 설명을 하면 뭐하나. 다 부질없는 짓이도다.
"드디어 출발하는구나."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밖에서 보았을 땐 승차감이 나쁠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마차는 안락하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엉덩이 밑에 깔려있는 백여우 가죽쿠션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한몫하였다.
티나도 자신이 들고 짐을 나라찬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짐을 받아들고선 자신의 가방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티나, 언제쯤 도착하는거야?"
"이 속도라면 아마 5일안에 도착할거 같은데요......"
티나는 말하면서 창문 밖을 할끔 쳐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영주성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배웅해 주던 사람들도 안보였다.
"그래? 그럼 우리 어디서 자는거야?"
"계속 가다보면 '라미'라는 소규모 도시가 있어요. 저녁쯤에 도착할거 같은데, 작은 도시지만 수도와 멀지 않아서 꽤 발달되어 있답니다."
"오. 재밌겠다. 기대되네."
"후후. 벌써부터 기대하시면 안되죠. 아직 영지밖도 안빠져나갔는데요."
전생에서도 황궁 야외정원에만 있었으니 정말 기대된다. 아, 하루도 안됬지만 황제의 집무실에도 가봤었지.
뭔가 내 신세가 처량해보이는건 기분탓인가.
***
"......가씨!"
"아가씨!! 일어나세요! 라미에 도착했어요!"
우드득
아, 잠들었었나. 방금 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들린 건 내가 잘 못 들은 걸까.
"으아~ 목아파."
"마차에서 앉아서 주무시니까 당연하죠."
"원래 무릎 베고 자라고 눕혀주지 않나."
"제 무릎이 아프니까요."
나는 얄밉게 말하는 티나를 한번 째려보고 아픈 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나라찬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나가시기 전에 이거 쓰시고 나가세요."
"이게 뭔데?"
"가발이에요. 혹시라도 아가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나니까요."
"무슨 큰일이 나는데."
티나는 정말 모르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서 말하라고 부추기자 입을 열었다.
"납치요. 공작님께 몸값을 요구하거나 심하면 살해 당하실수도 있으세요"
"......"
너무 직설적인거 아닌가. 이래 봬도 아직 7살밖에 안된 아이인데 납치에다 살해라니.
세상 말세구나. 말세다.
"티나. 가발 빨리줘. 살려면 쓰고 나가야지."
티나의 손에 들린 가발은 길이가 짧은 검은색이었다. 나는 티나에게서 가발을 받고 쓰려고 했다.
"잠깐만. 이거 남자 가발이야?!"
"네."
"굳이 남자 가발을 써야겠어?"
"네."
아...... 그렇구나. 너무 단호한데 단호박이세요?
나는 군말없이 머리를 올리고 남자 가발을 썼다. 거울이 없어서 내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아마 검은 머리에 녹안을 가진 어린소년이 마차안에 있을 것이다.
티나는 조금씩 삐져나온 은발을 가발 안으로 꼼꼼하게 넣어준 후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밍 좋게 나라찬이 마차문을 열었다.
" 2인실 하나와 1인실 하나를 샀습니다. 어서 여관으로 가시지요."
"알겠어. 나라찬."
나라찬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도도하게 왼손을 올리고선 나라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와."
영주성외에 처음 본 풍경의 감상평은 '활기차다'였다. 해가 진 밤인데도 상인들이 하나라도 물건을 더 팔기 위해 호객행위를 했다.
"거기 잘생긴 도련님! 양꼬치 맛 좀 보고가세요!"
"검은머리 도련님! 이 브롯치가 참 잘어울릴거 같은데 하나 사시는게 어떠겠수?"
"일행분들~ 많이 지쳐보이는데 저희 여관에서 쉬다가세요~"
나는 여기저기를 바쁘게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아가씨를 나라찬과 티나는 뒤에서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앗!"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갈색 로브를 쓴 자와 부딪혔다. 얼핏 로브 안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붉은 눈?
로브를 쓴 자는 사과도 하지않고 달려갔다. 얼마나 빠르게 뛰어 갔으면 벌써 거리가 꽤나 벌어졌다.
먼저 부딪혔으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보아하니 어린 남자아이 같던데. 미래에 너한테 시집갈 여인이 불쌍해지는구나.
나는 속으로 방금 지나간 소년에게 욕을 퍼부어주었다. 아마 그 소년은 장수할 것이다.
조금 떨어져있던 나라찬은 나에게로 곧장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아~ 나는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없어."
"도련님! 괜찮으세요?"
나를 부르는 호칭이 아가씨에서 도련님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티나가 내 앞에 손을 뻗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예의 없는 소년이 지나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왠지 다시 만날 수 있을거란 느낌이 새록새록 들었다.
다시 만나면 한대 때려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