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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저물 때
작가 : 새하
작품등록일 :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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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녀와 그림자
작성일 : 17-07-01     조회 : 495     추천 : 2     분량 : 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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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봉인 해제

 

 ‘으하하! 드디어 봉인에서 풀려났다!’

 ‘어서 놈이 우리를 다시 잡기 전에 도망쳐!’

 

 찢어진 두루마리에 그림으로 있었던 동물들이 종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씩씩거리며 빠르게 뛰쳐나가는 멧돼지부터 하늘로 날아가는 이무기까지. 동물들은 사방에 사악한 기운을 뿌려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물들이 봉인 되어 있던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남자는 작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남자 옆에 있던 공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봉인을 마저 풀어버렸나?”

 “그래.”

 “우리를 풀면 인간세상이 혼란해 질 거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난 그런 것 따윈 관심 없어.”

 “그럼 그림자가 없는 인간에게 관심이 있겠군.”

 

 공작이 정곡을 찔렀는지 남자는 대답 대신 두루마리를 구겨지도록 세게 잡았다.

 

 “그림자가 없는 인간을 찾기 위해 이 사단을 벌이다니. 정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찾기 위해 봉인을 풀었지.”

 “도대체 왜 그림자가 없는 인간을 왜 찾는 거지? 네게 위협이 돼서?”

 “답할 이유는 없지. 제 반려가 환생했는지도 모르는 너한테.”

 

 남자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마치 죽어가는 악마를 비웃는 천사처럼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공작은 부리를 허공에 쪼며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어쨌든 자신은 저 놈보다 약했으니까. 분한 마음에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의 오른쪽 손에는 구슬이 들려있었다. 주먹만 한 구슬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이무기의 여의주야.”

 “허어…….”

 

 공작은 말을 흐리더니 거칠게 날개를 활짝 폈다. 화려한 무늬와 깃털이 펄럭거리며 거칠게 도약하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내기를 해보지 않겠나?”

 “내기?”

 “그래. 그림자가 없는 인간을 누가 먼저 만나는지.”

 “좋아. 대신.”

 

 푸슉!

 

 남자가 손을 뻗자 공작의 배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공작의 배를 꿰뚫은 것이었다. 공작은 신음을 뱉으며 힘없이 날았다.

 

 “커헉! 무슨 짓이지!”

 “하하, 대가는 받고 가야지.”

 “대가?”

 “감히 날 비웃은 죄.”

 

 공작은 또 공격을 당할 까봐 멀리 떨어지기 위해 날개 짓을 힘차게 시작했다. 보통 공작과 달라 멀리 날 수 있지만, 다친 지금은 힘이 부족했다. 이대로라면 남자에게 공격을 더 받고 죽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제 입술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너 내가 그림자가 없는 인간을 못 찾아서 결국 봉인까지 푼 걸 비웃고 있었잖아.”

 

 언제 제 마음을 읽은 건지 기억을 더듬던 공작은 대답 하지 못했다. 대신 남자가 이어 말했다.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널 제일 먼저 죽이러 갈 거야.”

 “……기억해두지.”

 

 공작은 분함을 억누르며 서둘러 빌딩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남자는 바람이 불자 제 얼굴을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마자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션 님!”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제 비서의 목소리에 남자, 션이 고개를 돌렸다.

 

 “뭐지?”

 “아, 크, 큰 소리가..”

 

 비서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춤하며 션을 살펴봤다. 그러자 백옥같이 하얀 피부 위에 박힌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단정하고 유려한 생김새였지만, 눈빛이 야해 빠져 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션이 서있는 빌딩 건너편엔 떡 하니 대외광고에 남자 연예인 사진이 붙어있었지만, 비교도 안 될 만큼 션의 얼굴은 수려했다. 새삼 그 미모를 감탄하던 비서가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 아까부터 여- 여기 회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들어와봤습니다…….”

 “총 있지?”

 “총이요? 예…….”

 

 션은 대답대신 손가락을 까닥였다. 비서는 어리둥절해 하며 총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션은 총알이 들어있는지 확인 하곤 비서를 빤히 쳐다봤다. 아차싶었던 비서는 식은땀을 주륵 흘리며 벌벌 떨었다.

 

 “저, 저는 자,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살면서 잘못을 반복하지.”

 “예?”

 

 철컥

 

 션은 놀랍게도 스스로 제 머리에 총을 겨눴다.

 

 “하지만 난 믿어. 잘못으로 인해 기회를 얻는 다는 걸.”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총을 내려놓으시고-.”

 “내일 이 시간 이곳에 내 아들이 있을 거야.”

 “아들이요? 자식을 보셨습니까? 아드님 이름이…….”

 “시엔.”

 

 탕!

 

 션은 그 말을 끝으로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거친 소리와 함께 션은 천천히 뒤로, 창문 너머로 쓰러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션의 몸이 빌딩 위에서 천천히 떨어져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션의 시체는 어디서 발견 되지 않았다.

 

 대신 그 다음날 션이 죽은 창가 자리에 션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있었다. 션의 말대로 남자의 이름은 시엔이었다.

 

 

 1. 소녀와 그림자

 

 

 그림자가 짙어지는 맑은 오후였다.

 

 뜨거운 여름의 햇빛은 작은 집부터 대궐 같은 저택까지 공평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무들 덕분에 그늘이 많은 대저택의 정원은 더위를 버틸 만했다. 그를 증명하듯 테라스에 한숨을 뱉고 있는 남자와 그 앞 정원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혼자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녀가 땀을 흘리지 않았다.

 

 “야! 던져! 던져!”

 

 뛰어 놀고 있던 아이들 중 빨간 머리가 돌을 집어 들었다. 이내 혼자 서있는 소녀에게 돌을 던졌다.

 

 휙!

 

 돌멩이가 날라 와 소녀의 머리 근처를 스쳤다. 다행히 빗겨 맞았지만, 눈썹 근처에 피가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빨간 머리와 아이들 몇 명이 돌을 들고 있었다. 빨간 머리는 히죽히죽 웃으며 또 돌을 던지려했고 그 근처의 아이들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주저하고 있었다.

 

 “정말 던져도 돼? 쟤가 쟤네 엄마아빠한테 이르면 어떻게 해?”

 “괜찮다고! 쟤네 아빠 우리 아빠 밑에서 일한다니까? 완전 쫄보들이야!”

 “그럼 몇 개 던져?”

 “마음대로 던져! 어차피 쟤 못 일러! 내가 쟤 비밀 알거든!”

 

 빨간 머리가 얄밉게 웃으며 팔을 힘껏 휘둘렀다. 덕분에 돌은 세게 날라 갔지만, 마법을 부린 것처럼 다 빗나갔다. 빨간 머리가 짜증을 토해낼 때 그 옆에 있는 아이 한 명이 말했다.

 

 “비밀이 뭔데?”

 “비밀? 그건 쟤가……”

 

 빨간 머리는 더 말하려고 하다가 씨익 웃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소녀의 약점을 자신만 알고 있을 작정이었다. 말을 듣지 못한 빨간 머리의 친구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빨간 머리가 다시 돌을 들었을 때.

 

 “이놈들!”

 

 집 밖의 테라스에서 한숨을 뱉던 남자가 아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남자는 빨간 머리에게 딱밤을 먹이며 야단을 토해냈다.

 

 “누가 돌을 던지라고 했어? 사이좋게 놀아야지!”

 “삼촌 아파!”

 “아프라고 한 거야 임마! 집 안으로 들어가!”

 

 제 삼촌의 말에 빨간 머리는 심통이 난 체로 소녀의 뒤에 있는 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소녀를 지나치면서 귓가에 속삭이는 걸 잊지 않았다.

 

 “네 비밀 안 말해준 나한테 고맙지?”

 

 얄미운 말에도 소녀가 무표정이자 빨간 머리는 소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러자 소녀가 하얀 벽에 부딪혔는데, 놀랍게도 벽에는 빨간 머리의 그림자밖에 없었다.

 

 “야, 들어가서 놀자!”

 

 빨간 머리의 말에 전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남아있던 빨간 머리의 삼촌은 어색하게 웃으며 소녀에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애들이 철이 없어서. 자, 이거 받아라.”

 

 빨간 머리의 삼촌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소녀에게 돈을 건넸다. 만 원짜리 열 장이었다. 소녀는 받고 고개를 꾸벅여 감사를 표했다.

 

 “그, 이 돈 내가 줬다고 너희 아버지께 꼭 말해야한다?”

 

 소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소녀의 집은 대궐 같은 저택과 정원 사이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였다. 소녀가 구질구질한 집 문을 열자 한숨을 푹 내쉬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그동안 해다 바쳤는데, 나보고 대신 감방을 가라니!”

 

 라고 중얼거리며 분노를 땅바닥에 퍼부었다. 소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뭐라 말을 걸면 한 대 맞으니까. 소녀는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방구석으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소녀의 손에 들린 만 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너 그 돈 뭐냐? 어디서 났어!”

 

 소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저번에 정원을 그리며 그려진 빨간 머리의 삼촌을 가리켰다. 아버지는 씩씩거리더니 땅을 세게 내려쳤다.

 

 “젠장! 돈을 왜 받았어! 니 애비 감방에 가는 거 보고 싶어?”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돈이 없으면 응,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감옥살이도 대신 해야하는구만. 계단에 굴러 떨어 뒤져도 입 닥치고 있어야하고!”

 

 소녀는 저택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운도 없이 죽은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 역시 저택의 가사도우미로 일했었다. 아버지의 손에 하얀 장갑을 낀 걸 보니 오늘도 기사 노릇을 하다가 온 듯 했다.

 

 “야, 너 이 애비 감옥 가면 어떻게 살 거냐? 응?”

 

 소녀는 며칠 전 가사도우미들이 빨간 머리의 삼촌이 사고를 냈다고 떠들었던 걸 떠올렸다. 술에 취해 운전하다가 치인사람이 죽어버려 감옥살이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곰곰이 생각할 때 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컨테이너 박스를 나갔다.

 

 쾅!

 

 컨테이너 박스의 문이 닫히자 마자 소녀는 짐을 서둘러 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없어진다면 이제 더 이상 이집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소녀는 제 손에 있는 난생 처음 쥐어보는 큰 액수의 돈을 바라봤다. 이 돈이라면 어른이 될 때 까지 살 수 있으리라는 귀여운 생각을 하며 가방에 넣었다.

 

 가방은 엄마가 살아있을 때 빨간 머리가 안 쓰는 가방을 얻어서 준 것이었다. 스케치북, 크래파스, 돈, 몇 벌 안 되는 옷을 챙긴 소녀는 그대로 컨테이너 박스를 나왔다. 그대로 정원을 걸어 큰 대문 옆에 있는 개구멍으로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왔다. 난생 처음 나온 집 밖엔 차들이 다니고 한적하게 행인들이 있을 뿐이었다.

 

 빨간 머리는 항상 집 밖에 병신인 자신을 죽일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내리막길을 급히 걸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있던 거대한 저택이 쭉 늘어져있었다. 다 비슷한 사람이 사나보다 여기며 한참을 걸었을까 북적북적 음식점과 옷가게들이 나왔다. 소녀는 어서 문방구로 가서 물감을 사려고 했다.

 

 꼬르륵.

 

 배에서 자꾸 꼬르륵 소리만 나지 않았어도. 소녀는 고린 배를 잡다가 고개를 들자 어디서 구수하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지 발견했다. 음식점의 사장이 가마솥을 열자 포슬포슬하고 먹음직스러운 만두 여러 개가 나왔다. 소녀는 가방에 손을 넣으며 음식점으로 갔다. 만두를 가리키며 주인 여자에게 돈을 건넸다.

 

 “심부름 왔구나? 몇 개 주랴?”

 

 소녀가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이따 저녁으로 먹기 위함이었다. 마음씨 좋은 사장은 넉넉하게 웃어주며 잔돈과 플라스틱 포장지에 담긴 만두를 비닐봉투에 넣어주었다.

 

 “자, 한 개 더 넣었다. 맛있게 먹어라!”

 

 소녀는 고개를 꾸벅이곤 쫄래쫄래 걸어 강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막 만두를 입에 넣으려고 할 때.

 

 “으으…….”

 

 사람 곪아 죽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빼어 내다보니 강가 근처에 신문지를 덮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몸을 동그랗게 말곤 신음을 뱉고 있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 노인을 살펴봤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소녀가 든 만두를 확 뺏더니 입에 쑤셔넣었다.

 

 “음, 냠 읍, 쩝!”

 

 와구와구 먹는 노인에게 소녀는 만두 하나를 더 건넸고 노인은 주책인지 아무런 인사 없이 마시듯 먹었다. 소녀는 노인에게 살짝 떨어져 다시 만두를 꺼내 한 입 먹었다. 사례가 들렸는지 컥컥 거리는 노인에게 물도 건넸다.

 

 “푸하!”

 

 노인은 물을 마신 후 그제야 소녀의 눈치를 살펴봤다.

 

 “고맙구나.”

 

 소녀는 노인의 인사를 무시하고 한적한 강을 쳐다보며 만두를 계속 먹었다. 노인은 쩝, 거리며 민망해하다가 소녀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이거 봐도 되겠누?”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노인이 스케치북을 펼쳤다. 평범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펼쳐보던 노인의 눈은 점점 커지더니 소녀가 모르는 언어로 감탄사를 뱉었다.

 

 “와싸이!”

 “........”

 “이거 진짜 네가 그린 것이야?”

 

 소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끄덕였다.

 

 “대단하구나, 응.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구만.”

 

 노인은 홀린 듯이 그림을 보다가 손을 더듬거려 소녀의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만두를 먹던 소녀가 하지 말라고 손을 뻗을 때. 노인이 크레파스로 슥, 획을 긋자 스케치북에 있는 물고기들이 펄떡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 맛있던 만두도 휙 떨어트린 채 스케치북을 빤히 바라봤다. 노인은 껄껄 웃으며 소녀가 떨어트린 만두를 입에 쏘옥 넣었다.

 

 “쩝, 거 신기하누? 쩝.”

 

 소녀가 고개를 세게 끄덕이자 노인은 쩝쩝거리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난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까. 응.”

 “…….”

 “그래도 알고 싶은 게야?”

 “…….”

 “좋다. 내 이야기를 해주지.”

 

 소녀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말문이 터진 노인이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말해주기 시작 했다.

 

 “내가 너만 할 때 참 가난하게 살았지비. 아, 내 어마이가 북 사람이었어. 어찌어찌 탈북을 했는데…….”

 

 노인이 말하든 말든 소녀는 지루한 얘기일 것 같아 움직이는 그림을 마냥 쳐다보며 대충 듣는 척을 했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혼자 어찌어찌 성인까지 살아남았는데, 먹고 살수가 없는 게야. 몸 쓰는 것도 못해 머리도 잘 굴러가질 않아. 그저 그림 끄적이는 것이나 했지. 그렇게 굶어죽기 직전에 씨꺼먼 형체가 나한테 말을 걸더라고. 자신과 계약을 하지 않겠냐고.”

 

 노인이 ‘씨꺼먼’ 에 강조하자 소녀가 고개를 살짝 빼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의 뒤에 있는 그림자가 술렁거리더니 얼굴부근의 그림자에 표정이 지어졌다. 그림자가 입을 벌리더니 얄미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부귀영화를 줄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했지!”

 

 그 말에 노인은 부릅 엄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음을 뱉었다.

 

 “다른 이 앞에선 말하지 말랬잖아!”

 “뭐 어때! 저런 꼬맹이 앞에선. 안녕? 너도 나랑 계약 할래?”

 “안 돼!”

 

 노인이 씨익씨익 거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그림자는 진짜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 이후는 말 안 해줘? 너가 나랑 계약하고 갑부가 됐다는 거.”

 “……네 너 때문에 내 그림으로 돈을 많이 벌었지. 유명한 화가도 됐고. 하지만!”

 “하지만?”

 “곧 나는 죽을 몸인데, 말해 뭐해! 쿨럭!”

 

 노인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바닥에 피 한 모금을 뱉어냈다. 소녀는 놀란 눈을 하더니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쿨럭 거리며 제 입을 닦아댔다.

 

 “유명하면 뭐해! 쿨럭! 이상한 그림을 그리도록 쿨럭! 강요받다가 도망쳤잖아. 쿨럭!”

 “하긴. 그 삼합회 놈 이상하더라. 그림을 그리도록 가둬놓다니. 네 자식들도 그놈한테 잡혀있지?”

 “그래……. 네가 잠든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지……. 나는 도무지 그 놈이 그리라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도망친 게야……. 너와 계약을 해도 못 그리다니, 이건 네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 쿨록!”

 “무슨 소리야! 그놈이 그리라는 건 인간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란 말이야! 아, 꼬마야 너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구나?”

 

 소녀는 별로 알고 싶진 않았지만 고개를 그냥 끄덕였다.

 

 “이 노인이 나와 계약을 해서 유~명한 화가가 돼서 돈을 많이~ 벌었어. 그래서 처자식도 생겼지. 근데 어느 나쁜 놈이 이 노인의 자식들을 잡아두곤 자기가 그리라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해서 이리 도망 친 거야!”

 “나는 곧 죽을 몸이라 그리지 못 쿨럭!”

 

 노인이 기침을 또 하다가 바닥에 주저 않았다. 그림자는 노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히죽 웃었다.

 

 “하긴, 네 수명이 얼마 남진 않았지.”

 “얼마 남았 쿨럭!”

 “5초.”

 

 그림자는 입을 게걸스럽게 쫙 벌렸다. 노인의 어깨를 잡아 올리더니 그대로 노인의 몸을 삼켰다. 소녀는 그 광경을 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림자는 쩝쩝 입을 다시더니 빙긋 웃으며 소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도 나랑 계약할래?”

 

 소녀는 무서운 마음에 제 얼굴을 스케치북으로 가렸다. 이젠 그림 안 물고기들은 다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림자는 피식 웃으며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원하는 건 모든지 다 이루어줄 수 있어! 대가가 있을 뿐이야.”

 “…….”

 “내가 저 늙은이처럼 너를 잡아먹을까봐 겁내는 거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내 몸을 찾는 거야.”

 “…….”

 “내 몸을 잃어버렸거든.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젠 기억이 안나. 수십 년간, 수백 년간 어쩌면 천 년간 나는 그림자로 홀로 살아왔거든. 힘이 없어진다 싶으면 이렇게 인간을 삼켜서 힘을 채웠지.”

 “…….”

 “넌 뭘 하고 싶니? 뭐든 걸 다 이루어 줄게.”

 

 소녀는 스케치북을 내리고 가만히, 가만히 그림자를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림자가 그림자로 보이지 않았다. 작고 장난을 잘 치는 도깨비로 보였다. 소녀는 멍하게 있다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찾고 있어.”

 “왜?”

 “나는 그림자가 없거든. 하지만 넌 내 그림자가 아니야. 왜냐면 너는 꼭 모양이 도깨비처럼 생겼거든.”

 “내가?”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림자는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살펴보았다. 이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나도 너처럼 내 그림자를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흠……. 나 언젠가 너처럼 그림자가 없는 존재를 본 것 같은데…….”

 

 그림자의 말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근데 기억이 안나. 에잇, 그럼 내가 있던 곳으로 가볼래? 난 거의 상하이랑 센트럴에 있었거든. 한국에 혹시 싶어서 왔는데, 내 몸의 기운과 멀어졌어. 나는 희미하게나마 내 몸의 기운을 느낄 수 있거든.”

 “…….”

 “그럼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너도 찾고 있는 게 있잖아.”

 

 소녀는 멍하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소녀의 말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녀의 대답이 둘의 머릿속에서만 기록 된 어느 날의 노을이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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