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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저물 때
작가 : 새하
작품등록일 :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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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남의 그림자 (3)
작성일 : 17-07-04     조회 : 292     추천 : 0     분량 : 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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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언니! 왜 이제 와!”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의 집 근처에서 사는 소녀, 랑이었다. 랑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찡긋 거렸다.

 

 “아휴! 아까 자리 맡아놓으라고 해서 계속 나 혼자 서있었잖아!”

 

 여자는 대답대신 순순히 랑의 뒤로 줄을 슬쩍 섰다. 그러자 랑이 희희덕 웃으며 고맙지 않냐고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근데 언니도 관심 있었어요? 신기하네.”

 “…….”

 “하긴 이젠 거의 천지회 보스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림만 그리면 무슨 소원이든 다 이뤄준다고 하는데.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새삼 남의 입에서 나오니 낯선 법이다. 여자는 줄을 선 사람들을 훑어봤다. 다들 깔끔하게 차려입은 성인이나 대학생들로 보였다.

 

 “언니 그림 잘 그려요? 나는 꽤 그리는데~.”

 “…….”

 “아, 맞다! 이따가 면접 볼 때 말 못한다고 안 된다고 하면 고소해요! 그런 제한 없었잖아요! 이건 명백한 차별이라구요!”

 “…….”

 “뭐,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나 중학교까지 다녀서 좀 똑똑……. 날 왜 그런 눈으로 봐요?”

 “…….”

 “나는~ 난 돈 때문에 고등학교 못 간 거지만 중학생 때 상 많이 탔다니까요?”

 

 대답도 없는 대화를 잘도 이어가던 랑의 말을 흘려듣던 여자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고개를 내밀었다. 줄의 맨 앞에 있던 안내자가 확성기를 들었다.

 

 “자, 지금부터 이력서 돌릴테니까 각자 쓰고 제출하세요! 그 후에 면접 봅니다!”

 

 안내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랑이 앞에 사람에게 받은 이력서를 여자에게도 주었다. 여자가 뒷사람에게 이력서 뭉텅이를 건넬 때 랑은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팬 두 개를 꺼냈다. 여자는 팬을 받으며 이력서를 읽어보았다.

 

 [(인적사항) 이름/생년월일/학력사항]

 [(능력사항) 자격증/(경력사항)]

 [-자기소개서-]

 [성장과정/성격의 장단점/경력사항/지원동기]

 

 “어머! 이게 뭐야. 무슨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봐. 이거 사생활 침범이야!”

 

 침해겠지. 여자는 호들갑을 떠는 랑을 등지고 이력서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햇빛이 거대한 타워의 수많은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는 도중 창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턱을 괴고 입꼬리를 올리며 아래를 쳐다보고 있는 시엔이라는 놈. 여자가 멍하게 올려다보자 보답하듯 시엔이 손을 흔들었다.

 

 “어머!”

 

 반응은 옆에 있던 랑이 했다. 랑은 낄낄거리며 여자에게 속삭였다.

 

 “벌써 나한테 반한 건가?”

 

 뜬금없는 개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랑은 정말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난 그림에 관심 없어요. 몰랐죠?”

 “…….”

 “여기 회장을 꼬시러 왔어요. 이건 비밀인데…… 내 눈을 3초 이상 마주치면 어떤 사람이라도 넘어가죠.”

 “…….”

 “그렇게 날 빤히 보지 말아요! 반하면 곤란하다구요!”

 

 여자는 헛소리를 무시한 채 얼른 종이에다 갈겨썼다. 랑은 정말 못 믿는 거냐고 투덜거리더니 나누어준 이력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근데 이력서를 준비해오라고 할 것이지 이런 걸…… 어머, 언니 다 썼어요?”

 

 여자는 대답대신 랑에게 종이와 팬을 던지듯 건넸다. 랑은 얼떨결에 받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니! 어디가요!”

 “…….”

 “대신 내줄게요!”

 

 랑이 손을 흔들자 여자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건물 안 5층에서 내려다보던 시엔은 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시면 안된다니까요!”

 

 제 비서 천숑이 급히 말리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시엔은 태연하게 책상 위에 내려와 손을 까닥이며 인사했다.

 

 “마침 올 줄 알았는데.”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마샤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차라도 한잔?”

 “됐네! 자네 지금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요?”

 

 마샤오는 골이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다른 파 녀석들은 물밑작업을 하는 건 기본이고 유명한 화가 놈들을 몰래 섭외했는데. 이와중에 공개 모집?”

 “아드님은 그렇게 하나보죠?”

 “자네…….”

 

 마샤오는 천숑이 부들부들 떨며 내온 차가운 보이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평소 우아하게 찻잔과 차 재배지까지 가리던 천지회의 부보스인 마샤오였다. 먀샤오는 한숨을 뱉었다.

 

 “나 자네가 후계권에 관심 없는 줄 알았네!”

 “하하, 누구든지 당신의 아들보단 관심은 없죠.”

 “그건!”

 

 천지회를 세울 때 큰 공을 세웠을 뿐더러 천지회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샤오의 유일한 오점. 아들놈이었다.

 

 “내 아들 엔도가 이번에 자네 부하들을 공격했다는 것은 들었네. 사과하지!”

 “뭐, 새삼.”

 

 시엔이 새침하게 눈썹을 까닥이며 차를 마셨다. 민망해진 마샤오는 크흠, 하며 목을 축였다. 사실 민망할 만도 했다. 벌써 몇 번 째 인가. 후계자가 될 줄 알고 의기양양 나대는 아들, 엔도놈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회장의 아들과 손자들은 세력이 약했고 돈이 많아도 쌓은 업적은 없었다. 반면 자신은 지금의 회장과 자신 그리고 션과 함께 천지회를 세웠다. 자신이 나이가 꽤 있으니 사실상 아들 엔도가 후계자나 다름없었다. 행방불명된 션의 아들인 시엔이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마샤오는 유전자 검자를 할 필요도 없이 션과 똑같이 생긴 시엔을 훑어봤다.

 

 “자네 정말 후계권에 생각 있나?”

 “그렇다면 아들을 말릴 생각인가요?”

 “그건……. 사고 치지 않게 단속은 할 생각이야.”

 “그거면 됐죠.”

 

 마샤오는 아들 생각에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시엔의 알 수 없는 눈동자엔 미간을 찌푸린 자신이 비쳐있었다.

 

 “자네……. 후계권에 관심이 없군.”

 “나이는 헛으로 먹은 게 아닌가 봐요?”

 “거 참. 그럼 뭘 하고 싶은 거 길래 이리 난리를 쳤나? 목숨이 위험한지도 모르나?

 “목숨이 위험해질수록 가질 수 있는 건 아주 매력적이죠.”

 

 시엔은 태연하게 찻잔을 기품 있는 손동작으로 내려놓았다. 답답했는지 마샤오는 쾅, 하고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정말 자네……. 도대체 왜…….”

 “…….”

 “무엇을 가지고 싶은 건가?”

 “지루한 염불에도 맛없는 잿밥에도 관심 없어요.”

 “그러면?”

 “염불을 외우고 있는 여승한테 관심이 있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마샤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이나마 파악이 되는 건 시엔이 후계권을 노리는 척 하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실이었다. 마샤오는 한참 손자뻘 되는 시엔의 속을 알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얻을 방법은 있고? 쉽게 넘어오진 않을 텐데?”

 “사냥감을 유인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게 뭔 줄 알아?”

 

 마샤오는 시엔이 갑자기 뱉은 반말에 반문 하지 못했다. 시엔의 잔혹한 웃음이 꼭 옛적 션의 표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공포스럽고 퇴폐적인 미소였다.

 

 “다른 짐승들이 미끼를 먹으려고 하는 걸 보여줘야 해. 미끼가 아주 맛있는 거라 지금이 아니면 평생 맛볼 수 없는 것처럼 보여야하지.”

 “…….”

 “사냥감이 올가미에 묶여졌다고 자각해도 미끼가 맛있어서 도망치는 걸 포기하게끔 만들고…….”

 

 뒷말을 흐리던 시엔이 독을 품은 꽃 같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후엔 길들이고 길들여서 내가 없으면 먹지도 씻지도 숨 쉬지도 못하게 만들 거야.”

 “…….”

 “나는 그렇게 사냥감을 가질 거예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릴 거면 화객들이나 빨리 모집하게.”

 

 마샤오가 시엔의 야해 빠진 눈빛을 피한 채 턱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엔 지원자들의 이력서가 가득 쌓여있었다. 시엔은 피식 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이 방 안에 어둠이 가득차면 사냥감은 스스로 발걸음을 하게 될 거예요.”

 

 시엔의 말처럼 빛이 가득했던 룸엔 시간이 지나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JC 금융주식회사의 모든 룸엔 어둠만이 가득 찼을 때. 맨 윗층 79층의 회장실에만 달빛이 담기고 있었다. 명패가 있는 거대한 책상부터 와인이 잔뜩 있는 선반과 안쪽에 따로 있는 침실까지. 홍콩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70평이 넘었다. 책상에 걸쳐 앉은 시엔은 여유롭게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다만 와인 잔이 두 개라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벌컥!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부하 천숑은 와인 잔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큰 일 났어요!”

 

 천숑은 태연하게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자신의 상사가 야속할 뿐이었다.

 

 “보스가 환상의 그림의 밑 작업을 한다고 소문이 쫙 났다구요! 하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지. 물론 제가 소문 수습하는 중 입-.”

 “필요 없어. 그러라고 한 거니까.”

 “네?”

 

 시엔이 와인잔을 흔들며 뒤를 돌아봤다. 남자다운 이목구비에 색스러운 눈매. 와인이 물든 입술. 섬섬옥수와 검은 정장. 원하던 것을 얻은 듯 한 미소와 창문 밖 찬란한 야경까지. 모든 것이 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천숑이 새삼 제 상사의 외모와 분위기에 감탄할 때 시엔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이왕이면 소문나는 게 좋지.”

 “그, 그러다가 그림을 훔쳐 가면 어떻게 해요!”

 “아니. 절대 못 훔쳐.”

 “언제부터 작업 아니, 화객 언제 뽑으실 건데요? 지원자 하나도 안 뽑으셨잖아요.”

 “오늘부터.”

 “네?”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야?”

 

 시엔이 책장 그림자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책장 그림자에서 어두운 인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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