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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저물 때
작가 : 새하
작품등록일 :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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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남의 그림자 (4)
작성일 : 17-07-05     조회 : 324     추천 : 0     분량 : 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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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악!”

 

 천숑이 놀라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나타난 인영은 천숑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시엔을 쳐다볼 뿐이었다.

 

 “책은 읽어봤어?”

 “그 좆같은 책.”

 

 천숑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인영이 누구인지 알았다. 저번에 봤던 예의 없는 여자였다. 시엔은 욕설에 반응조차 안하고 천숑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천숑은 주저하다가 시엔의 단호한 눈빛에 뒷걸음 쳤다. 이내 문이 닫히자 시엔은 와인잔을 흔들었다.

 

 “마실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시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나폴레옹 89년산이야. 색이 짙고 향이 강하지만 뒷맛은 부드럽고 달지.”

 “…….”

 “난 그런 걸 원해.”

 “그래서?”

 

 여자가 드디어 되묻자 시엔이 책상 위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들고 펄럭였다.

 

 “잘 봤어. 네 이력서.”

 “…….”

 “일부러 네 고향 양식으로 했거든. 어디 보자…….”

 

 뒷조사를 했다고 당당하게 돌려 말한 시엔은 입꼬리를 휘어 여자가 쓴 이력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름 없음. 생년월일 모름. 나이는 27. 학력사항 없음. 아, 그래도 글자는 쓸 줄 아네? 자격증 없음. 성장과정 없음. 경력사항 문신사. 지원 동기 원하는 게 있어서.”

 “…….”

 “정말 완벽한 이력서네.”

 

 한 번도 이력서를 써본 적이 없는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엉망으로 썼다는 것을. 그래서 시엔의 시선을 피해 책장에 기댔다. 시엔은 피식 웃으며 이력서를 톡톡 쳤다.

 

 “왜 하고 싶은데? 설마 책을 돌려주러 왔을 뿐이다 라고 하진 않겠지?”

 

 찔린 여자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전단지를 내밀었다. 전단지의 ‘어떠한 사례도 해드립니다.’ 라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사례? 아, 뭘 원하는데? 부? 명예?”

 “……아니.”

 “그럼 나?”

 “아니.”

 “혹시 내 몸을 원해?”

 “후우…….”

 “그럼 네가 그림자가 없는 이유?”

 

 전단지를 구겨 시엔에게 던지려던 여자는 움칫 하고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시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이유…… 알고 있나?”

 “알고 있지.”

 “…….”

 “하지만 말해 줄 수는 없어. 대신 알게 해줄 수는 있어.”

 

 그게 그거 같은 말이었지만 시엔은 단호했다. 여자는 기싸움에서 슬슬 져가고 있다는 걸 자각 했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지만 명백한 것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시엔이라는 놈이 갑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시엔은 다시 책상에 걸쳐 앉아 와인 병을 들었다.

 

 “어떻게 봉인할 생각이야?”

 “잘.”

 

 시엔처럼 여자도 단호했다. 하지만 시엔은 당황하지 않았다. 와인을 다시 따르며 여유롭게 대화를 이를 뿐이었다.

 

 “아주 훌륭한 계획이네. 그 놀라운 계획 자세히 말해주겠어?”

 “…….”

 “싫은가보네. 그럼 내가 그리라는 대로 그릴 거야?”

 “아니.”

 “그림은 어디에다 그릴 건데? 캠퍼스?”

 “아마……. 네 몸.”

 

 주륵!

 

 시엔이 따르던 와인 병 입구가 잔을 벗어났다.

 

 “가장 중요한 걸 맞췄네.”

 “…….”

 “혹시 꿈 꿨어?”

 

 여자는 대답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게 익숙한 의사표현이었기에. 하지만 시엔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답을 안 해주겠다? 그럼 내가 왜 널 뽑아야하지?”

 “뭐?”

 “지원자는 이렇게 많아.”

 

 촤르륵!

 

 시엔이 책상에 가득 쌓인 지원 서류를 손으로 세게 밀어냈다. 그러자 이력서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너무 많은 양이라 70평인 바닥의 반 정도를 매꿀 정도였다. 시엔은 그 종이 위를 무심하게 걸어 다니다가 구두 끝으로 종이를 툭툭 쳤다.

 

 “이 남자는 프랑스 유학파고.”

 “…….”

 “이 남자는 광동대학교 출신에 전시회를 세 번이나 열었어.”

 “…….”

 “근데 이런 사람들 놔두고 의무 교육도 못 받은 너를 뽑아야할까?”

 

 시엔이 와인잔을 굴리며 얄밉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여자도 손을 들어 두 번째 손가락을 까닥였다. 여자의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가 쑥 나오더니 순식간에 길게 뻗어졌다.

 

 휙!

 

 여자의 손가락 끝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시엔의 와인 잔을 낚아챘다. 시엔은 가벼워진 제 손을 쳐다보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주 놀랍네.”

 

 전혀 놀라운 표정이 아니었다.

 

 “환상의 그림이 어떤 건 줄 알아?”

 “대강.”

 “아니. 넌 아직 몰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거겠지.”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옛날이야기처럼 나쁜 동물들을 봉인해서 종이에 쏙 넣으면 돼.”

 

 남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치부할 것을 시엔은 차분하게,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사실 아주 잔인한 작업이야. 살아있는 동물의 힘을 빼앗아 그대로 새겨넣어야하거든. 그림 안의 것들이 움직이듯 생생해서 환상적이라고 불러.”

 “…….”

 “해본 적 있어?”

 “아니. 하지만 할 줄 알 것 같군.”

 “봉인하는 걸 꿈으로 꿨나보지?”

 “…….”

 “딩동댕이네?”

 

 정답을 들키자 여자는 손가락을 까닥여 제가 사용하던 그림자를 없앴다. 시엔은 갑자기 마른 세수를 하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놀라워. 다시는 못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

 “합격이야.”

 “……동물은 어디서 구해야하지?”

 “그 능력으로 이제 알아봐야지. 어떤 동물을 봉인해서 그림을 완성할 건지.”

 

 추상적인 명령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여자를 향해 걷기 시작한 시엔의 표정은 악마를 농락한 천사처럼 아름답고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

 “하하, 그래도 넌 그림을 그리겠다고 할 거야. 왜냐하면…….”

 

 시엔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하던 여자가 등 뒤에 책장이 느껴지자 걸음을 멈췄다. 시엔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코 끝이 닿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 시엔이 속삭였다.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거든.”

 “…….”

 “뭐든지.”

 

 여자의 눈이 커지면서 눈동자에 밝은 달빛을 등진 시엔이 비쳐졌다. 눈동자에 비친 시엔은 눈꼬리를 휘어 눈웃음을 지었다. 안개 낀 달밤처럼 나른하고 퇴폐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아주 위험해. 죽을 수도 있어.”

 “…….”

 “목숨을 걸 수 있어?”

 

 톡톡. 시엔이 들고 있던 와인 잔으로 여자의 뺨을 톡톡 쳤다. 명백한 도발에 여자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쉬워.”

 “죽일 수는?”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와인 잔을 세게 내팽개쳤다. 와인 잔이 떨어지기 직전, 여자의 손 근처에 촉수 같은 그림자가 나와 와인 잔을 감쌌다. 이내 액체인 와인을 빼내더니 여자의 손 위에 살포시 놓아졌다.

 

 쨍그랑!

 

 와인 잔은 깨졌지만, 와인은 여자의 손에 원형 상태로 뭉쳐서 존재하고 있었다. 여자가 손에 힘을 주자.

 

 촤륵!

 

 심장을 터트려 피가 흐르듯 와인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놀라운 광경을 멍하게 보던 시엔은 살짝 입을 벌려 찬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는 그러든 말든 무표정이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든 다 줄 수 있다고 했나?”

 

 시엔은 대답 대신 와인에 젖은 여자의 손을 살짝 잡곤 혀로 핥았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시엔의 손아귀 힘이 더 강했다. 심지어 여자가 부리는 그림자보다.

 

 춥-.

 

 야하고 질척한 소리가 날만큼 시엔은 꼼꼼하게 여자의 손을 핥다가 깨물었다. 여자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벙쪄있었다. 이내 그림자로 시엔을 때어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림자는 시엔의 근처에 다가가지 못했다. 시엔은 그러든 말든 와인을 다 핥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신사처럼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몸을 줄 수도 있지.”

 “…….”

 “지금은 그런 표정을 짓지만 나중엔 애원할 수도 있어.”

 

 시엔의 야스러운 눈웃음에 여자는 눈이 커지다가 손을 거칠게 빼냈다. 시엔은 아쉽다는 듯 붉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모든 걸 제공해줄게.”

 “…….”

 “머물 곳, 돈, 음식, 옷 그리고 이름까지.”

 “필요 없어.”

 “새오.”

 

 시엔이 뱉은 단어에 여자의 눈이 커졌다.

 

 “내가 아끼는 이름이야. 줄게.”

 

 시엔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하지만 다정한 손과 다르게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기대를 부흥해줬으면 좋겠어.”

 “그러지 못한다면?”

 “네 모든 걸 먹어 치울 거야.”

 “…….”

 “좀처럼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혀부터 한 번도 사용 안 한 좁은 곳까지.”

 “…….”

 “핥고 깨물고 씹어 먹을 거야.”

 

 시엔의 매섭고 날렵한 금색 눈이 번뜩이자 여자는 한번 숨을 삼켰다. 이내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지랄.”

 

 여자가 욕을 뱉으며 창문가로 걸어갔다. 여자의 뒤엔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시엔은 그 놀라운 광경을 태연하게 보더니 아, 하고 말을 뱉었다.

 

 “아, 맞다. 계약은 일주일 후 하게 될 거야.”

 “…….”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일주일 동안은 인턴이라는 거지. 인턴이라는 단어는 알지?”

 

 여자는 그림 그리는 법도 책에 관한 것도 그 무엇 하나 알려주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말만 하는 시엔을 노려봤다.

 

 “한 가지 물어보지. 왜 나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

 “난 확신이 필요했거든.”

 “…….”

 “내가 찾는 사람이 너라는 걸.”

 “…….”

 “너도 내가 필요하잖아. 그림자가 없는 이유를 알고 싶을 테니.”

 

 얄미운 말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고 시엔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저었다.

 

 “또 보게 될 거야. 나는 눈이 여러 개니까.”

 “…….”

 “잘 가. 새오.”

 

 새오가 된 여자는 대답 없이 발을 굴러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시엔은 천천히 걸어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79층의 높이에서 떨어진 새오는 검은 형체로 변하더니 건물 사이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시엔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네온사인과 빌딩 사이사이에 있는 그림자들뿐이었다.

 

 “과연 넌 내가 찾던 사냥감일까?”

 

 중얼거리던 시엔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창문 근처에 펄럭이던 커튼들이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멈춰있게 됐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있으면 만월이 되는 커다란 달이 보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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