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찰싹! 따갑고 거친 감촉에 급히 눈을 뜨자 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새오는 급히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모아 공손이 섰다.
‘언제까지 잘 셈이었나?’
‘…….’
‘말을 안 하는 건 점점 늘어만 가는 군?’
‘죄송합니다. 스승님.’
새오의 대답에 안경을 쓴 남자는 한숨을 뱉었다.
‘오늘은 그제처럼 내가 한 공격을 전부 피하는 것보다 쉬울 거야.’
남자의 말에 새오는 제 손과 팔을 훑어봤다. 어리지도 그렇다고 성인 크기도 아닌 손과 팔엔 날카로운 상처와 멍들이 덕지덕지 있었다. 딱 청소년기였다. 이쯤에 자신과 스승님은 항상 수련을 했다. 옛날 조선시대도 전쟁도 아니었지만, 스승님은.
‘너와 나같이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는 언제나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해. 제 힘을 모르고 그저 욕망에만 휘둘리면 그건 짐승이다.’
라고 말하며 제 수련부터 자신을 가르치기 까지 했다. 새오는 왜 그래야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승님은 항상.
‘놈이 오기 전에 준비를 해놓아야지…….’
누군가 쫓기듯 초조해보였다. 잘 때도 반쯤 깨있는 상태로 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좀 성장한 후엔 격일 간격으로 보초를 서며 밤을 지켰다. 하지만 이때까지 다가온 적은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면 왜 이런 수련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스승에게 수련을 받을수록 더 능숙해지고 강력한 자신을 보면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힘이 제 그림자를 찾을 수 있는 것에 무언가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배울 것은 남의 힘을 흡수하는 거다.’
‘네.’
‘이게 내 기준으로 하는 거라 너에겐 통할지 모르겠지만……. 각설하고. 내 힘이 강력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지?’
새오는 다시 한 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승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비상식적인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했다. 인간과 다르니까.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내 힘이 강력한 이유는 다른 강력한 존재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이야. 흠, 말로만 하니 감을 못 잡는 것 같은데. 예시를 보여줘야겠군.’
안경 쓴 남자, 스승이 바닥에 졸고 있던 큰 강아지에게 손을 뻗었다.
푸슉!
스승의 손에서 나온 긴 촉수 같은 얼음들이 강아지의 배를 한 번에 뚫었다. 강아지는 다행이 왈왈, 짖으며 멀쩡했으나 스승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끼잉!
온 몸을 부들거리며 괴로워하다가 털썩 하고 쓰러졌다. 그러자 강아지의 배에서 얼음들이 뽑아졌고 얼음들 끝에는 노란 빛이 서려있었다.
‘저 노란 것이 강아지의 ’힘‘ 이다. 다른 말로 생명력이지. 지금은 내가 빼앗은 거지.’
스르륵!
얼음들이 움직이더니 스승과 새오의 사이에 둥둥 떠다녔다.
‘이 노란 것을 내 몸에 흡수하면 난 더 강해지게 되는 거다. 하지만 이런 작은 힘은 소용없지.’
휙!
스승이 손을 젓자 얼음들이 파스스 떨어대다가 순식간에 부수어져 사라졌다. 새오는 익숙한 광경에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대신 스승의 표정이 변했다.
‘흠, 하지만 너무 힘이 커도 문제가 돼. 이 힘을 흡수해도 몸이 견디질 못하거든. 억지로 흡수했다간 미쳐버리게 된다. 샘플을 보여줄까?’
스승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다시 얼음들이 생겨났다. 이번에 얼음들 끝에는 하늘색 빛이 진하게 물들어있었다. 그대로 얼음들이 강아지의 배에 박혔다. 강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기운을 차렸다. 신이 났는지 해맑게 있다가 뭔가 이상했는지 켁켁 거렸다. 이내 주르륵, 하고 피를 토하더니 다시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강아지의 배가 터져있었다.
‘내 힘을 주입시켰더니 과해서 저렇게 터져버렸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도 몇 번은 위험했어. 욕심은 과하지 않는 게 좋아.’
‘…….’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군.’
오래 지낸 만큼 스승은 과묵한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새오는 어차피 들킬 것이니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럼 반대로 힘을 빼앗은 뒤 봉인하는 방법도 있나요?’
‘그건…….’
여태껏 청산유수로 말하던 스승이 말끝을 흐렸다. 스승이 저런 반응을 할 땐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아플 때. 하나는.
‘글쎄. 그건 그 놈이 잘 알 것 같은데…….’
‘그 놈’ 과 관련된 것이었다. 스승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손으로 매만졌다.
‘내가 알기론 대부분 물건에다 봉인을 하더군.’
‘아까처럼 사람이나 생물체는요?’
‘글쎄. 힘을 써버리거나 제어하지 못할 거다. 생각을 해봐라. 강력한 힘을 쓰지 않으며 버틸 수 있는 존재. 과연 있을까?’
‘…….’
‘아, 딱 한 명 있겠다. 하긴. 사람이 아니니…….’
스승은 또 ‘그 놈’ 과 관련 된 걸 말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새오는 몰래 눈을 감았다. 스승은 ‘그 놈’을 말할 땐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지고 길어지니까. 언제서 부턴가 들어도 쓸모없다는 걸 깨달은 새오는 서있음에도 서서히 잠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 노란 눈도 섬뜩해. 말투도 이상해. 평소엔 남자 같다가 또 어느 날은 여자같이…….’
스승의 말이 흐려지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새오는 한참 수마에 빠지다가 몸이 흔들려지는 걸 느꼈다. 또 불호령이 떨어 질까봐 얼른 눈을 떴다.
“일어나요!”
눈앞에 보이는 건 스승이 아닌, 울어서 눈이 팅팅 부은 갈색머리 남자였다. 갈색머리 남자는 부들부들 떨며 훌쩍였다.
“어떻게 해요! 우리 진짜 죽어요!”
골이 울리는 징징거림에 새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10평 남짓한 방에 정말 작은 창문과 큰 문.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 몇 명과 자신. 그리고 옆에서 징징거리는 갈색머리 남자가 있었다. 새오는 실내를 충분이 훑어보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빛이 있으니 일단 빠져나가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물론 몸이 묶인 것도. 문제는 여기에 멧돼지가 있다는 것이다. 새오가 한숨을 뱉자 옆에 있던 갈색머리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린 이제 죽었어요. 어쩜 좋아. 우리 죽기 전에 통성명이라도 해요. 나는 타로에요. 그쪽은요?”
“…….”
“왜 대답이 없어요!”
갈색머리 남자, 타로가 됐다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입을 빼죽 내밀었다.
“쟤네는 약에 심하게 취했나 봐요. 저기 문 앞에 있는 여자애 빼곤 다들 푹 잠들었어요.”
타로의 말에 새오가 문 쪽을 보자 무릎을 감싸 안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랑!”
새오의 목소리에 여자아이, 랑이 고개를 들었다. 이내 새오를 보더니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말 할 줄 알았어요?”
지 애미랑 똑같은 말을 하는 군. 새오는 콧방귀를 뀌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제 옆에 도움도 안 되는 타로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근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뭔가 속삭이는 듯한…….”
끼이익!
문이 열리자 어둠만이 가득했던 방안에 빛이 스며들었다. 깨어있는 새오들은 눈을 찌푸렸고 문을 연 남자들은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몇 명만 보스한테 데리고 가고 나머진 팔자고.”
몇은 먹고 나머지는 장기매매로 팔려나보군. 새오가 빠르게 머리를 굴릴 때 문을 연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있던 랑의 팔을 잡았다.
“이, 이거 놔!”
“닥쳐!”
철썩! 남자가 거칠게 랑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치던지 랑의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남자는 반항하지 못하게 랑의 머리채를 세게 감아 잡았다.
“이년이랑 또 누구?”
“반반한 년으로 한 명?”
남자는 문 주변에 누워있는 타로의 친구, 메이의 머리채를 세게 감아 잡았다. 메이는 살짝 잠에서 깼는지 비몽사몽한 상태로 신음을 뱉었다. 랑을 잡고 있는 남자는 꽤 반반하다며 흡족해했다.
“나도 데려가.”
남자들은 낄낄거리다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맨 끝에서 새오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겁을 상실 한 것 같은 태도에 남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대신 그 옆에 있던 타로가 꺅꺅거리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제, 제 친구인데 정신이 좀……. 별 재미없을 거예요!”
당신 왜 그래요! 타로가 머리로 새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렸다. 하지만 새오는 이 자식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타로를 흘겨봤다. 남자들 중 두목으로 보이는 대머리가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 옆에 있던 세류파 두목이 남자도 좋아했었지?”
“흠, 저 두 놈 데려가자고. 어차피 거기 여자는 많잖아.”
“그럴까? 어차피 두 놈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지.”
새오를 남자로 착각한 남자들이 쓰러진 여자들을 건너 성큼성큼 걸어왔다. 새오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그 옆에 있단 타로가 발작을 일으키듯 몸짓을 했다.
“아니 저는 남자인데 저, 저기. 저 며칠 굶어서 냄새나고 저기요!”
남자들은 타로의 말을 무시한 채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댈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새오도 순순히 끌려갔다.
쾅!
감옥 같은 방 밖으로 나오자 새오는 얼른 주변을 탐색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덕지덕지 시멘트로 된 허술한 건물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화이트 톤에 깨끗한 복도였다. 다만 복도에 창문 하나 없다는 것이 기이했지만. 묘하게 맡아지는 소독약 냄새에 새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와 인테리어로 보자면 아마 이 곳은 병원일 거다. 이런 걸 합법적인 건물에서 몰래 할 만큼 보스가 힘이 세단 뜻인데……. 좀 더 살펴보려고 눈을 굴릴 때 새오를 끌고 가는 남자가 큰 안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봐, 다른 년들한테도 씌어.”
“흠, 안대로 입을 막았는데. 어쩔 수 없지. 얌마. 소리 지르면 바로 죽여 버릴 거다?”
타로를 끌고 가던 남자는 타로의 입에 박힌 안대를 빼고 얼른 눈에다 씌었다. 그러자 켁켁 거리며 마른기침을 토해낸 타로는 부들부들 떨어댔다.
“먹어? 내, 내가 먹힐 건데……. 마, 말하지 마…….”
“이 새끼 왜 이래?”
“그만 속삭여…….”
타로가 자꾸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내 제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더니 타로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걸 보던 다른 남자들은 걸음을 잠깐 멈췄다.
“뭐해?”
“좀 먹여야 얌전해질 것 같아서. 어차피 뒤가 따일텐데. 기분이라도 좋아야지. 엉?”
“하하, 그렇지. 아, 장씨. 이것들 씻겨야 할 텐데?”
“얼른 씻겨서 데려가자고.”
남자들은 낄낄거리며 새오와 나머지 세 명을 샤워실로 질질 끌고 갔다.
“히히……. 기분이 좋아질 거야……. 흐흐!”
타로의 불길한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
“이야, 씌렌. 안색이 좋아졌수? 역시 코카인이 답인가? 응?”
“왕형! 마약보다 젊은 여자 맛이 더 좋수! 나참, 건배나 합시다!”
살이 듬뿍 붙어 돼지 같아 보이는 씌렌과 반대로 빼빼 마른 왕씨는 서로 낄낄 웃으며 잔을 들었다. 마약과 장기매매 그리고 매춘으로 짭짤하게 돈을 번 둘은 서로 왕래가 깊었다. 삼합회, 범죄 조직에도 급이 있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둘은 절대 A급이 될 수 없었고 서로 잘 알고 있기에 친해졌다.
오늘은 그 친목을 위해 세 번째 파티를 열었다. 흔한 졸부들이 그렇듯 대리석으로 이뤄진 룸 안에 작은 수영장과 얼음 통에 담긴 비싼 양주와 와인들. 그리고 씌렌과 왕씨 주변에 있는 화폐들과 마약 주사가 사치스러움에 일조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있으면 파티는 완벽했다.
“자, 여자들을 불러와라!”
씌렌의 말에 문 앞을 지키던 부하들이 문을 열었다. 속옷만 입은 여자 셋과 남자 한 명이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부하는 빨리 들어가라며 넷을 밀어댔다. 그 넷을 보던 씌렌과 왕씨 그리고 주변에 있던 간부들은 입맛을 다셨다.
“어떤 년이 좋을까~.”
“나는 저 사내새끼로!”
“왕씨 너무 사내새끼만 맛보는 거 아니오?”
“빨아줄 때 여자보다 힘이 세서 맛이 더 좋아!”
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넓은 룸을 매웠다. 새오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부들부들 떨다가 앉아있는 상전의 손짓에 따라 자리가 배정됐다. 간부까지 합해서 대접해야 할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이곳의 보스인 씌렌과 동맹파 보스인 왕씨. 그리고 밀매업자로 유명한 매현.
다들 쭈뼛거리며 호명에 따라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예쁜 여자 랑과 메이는 돼지 같은 씌렌에게. 타로는 남색가인 왕씨에게. 새오만 남은 상태였다. 어중간한 새오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양옆으로 랑과 메이의 가슴을 주무르던 씌렌이 입을 열었다.
“저 놈은 뭐지?”
“아, 남자인줄 알고 왕형께 바치려고 했는데, 계집이었습니다.”
“저게? 가슴이 없잖아!”
남색인 왕씨가 제 취향이 아니었는지 부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새오를 쳐다봤다. 특히 양쪽 눈 색깔이 다른 밀매업자, 매현은 한참 쳐다보더니 손을 까닥였다.
“흥미롭군요.”
“자, 넌 매현 님께 가라.”
부하의 떠밀림에 새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설렁설렁 걸었다. 원래 계획엔 씌렌 옆에 있다가 멧돼지의 본성이 나오면 무력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다. 이런 놈 말고. 새오는 제 옆에 있는 매현을 째려봤다. 특이하게도 한쪽 눈은 검은색, 다른 한 쪽 눈은 노란색이었다.
어디선가 본적있는 노란색 눈……. 멍하게 있는 새오의 팔을 매현이 잡아챘다. 그대로 새오의 팔이 접히는 부분이나 무릎 같은 관절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씌렌같이 여자들의 은밀한 부분을 만지지 않고.
“하하하, 엉덩이를 그대로 들어봐라!”
“입을 더 벌려봐!”
저속한 말이 오갈 때 매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새오의 마른 몸을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혔다. 그 뒤로 계속 뼈가 도드라지는 부분을 만졌다. 그 행위에 집중하듯 눈빛이 뜨거웠다. 먹이를 먹기 전 핥아보는 늑대처럼.
“죽고 싶어?”
매현의 이상한 행위는 새오의 말에 멈췄다. 매현은 고개를 들어 새오를 올려다봤다. 목숨이 저당 잡힌 여자의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니었지만, 새오는 진심으로 가볍게 죽일 수 있다는 듯 위협적인 표정이었다. 느껴지는 살기에 매현은 멈칫하다가 입을 간신히 열 때.
“하하! 매현! 인신매매를 하는 이유가 자네가 먹기 위해서 그런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씌렌이 거칠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매현은 대답대신 입을 살짝 벌려 새오의 목덜미에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입과 목이 닿기 직전.
와득!
“꺄아아악!”
인간의 살을 뜯어먹는 낯선 소리가 룸 안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