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
“뭐?”
새오는 대답 대신 시엔의 마이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시엔은 순순히 새오에게 잡아당겨졌지만 새침하게 말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왜? 뒤늦게라도 책임져주게?”
“내 물건들 모두 버렸나?”
“여기 있잖아.”
시엔이 제 몸을 가리키자 새오는 빡침을 억누르고 주변을 훑어봤다. 창가쪽 간이 테이블 위에 아까 봤던 책과 자신이 쓰던 소지품 몇 개가 보였다. 새오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소지품 중 작고 납작한 검은 상자가 침대 위로 날라 왔다.
“멧돼지 아직도 움직이나?”
시엔은 대답대신 제 단추를 슬슬 풀기 시작했고 새오는 급한 마음에 넥타이를 쭉 끌어 내렸다. 그러자 시엔의 넓직한 가슴과 촘촘히 박힌 복근이 드러났다. 새오는 눈을 찌푸려 자세히 살펴봤고 허리 언저리에서 움직이는 멧돼지가 보였다.
“음,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워~.”
“엎드려.”
시엔은 한 번에 와이셔츠를 벗어 새오의 드러난 어깨에 걸쳤다. 새오는 걸리적거렸지만, 니들을 움직일 때 제 맨 몸에 잉크가 묻는 것보다 나았기에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갔다. 감쌌던 식탁보를 벗고 맨 몸으로 시엔의 와이셔츠를 입어 단추를 잠갔다. 그 광경을 뜨거운 눈으로 살펴보던 시엔은 입맛을 다셨다.
“속옷은 안 사왔나?”
“응. 없어.”
단호한 대답에 새오는 발 근처에 있는 쇼핑백 아무거나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빨간색 쇼핑백이 엎어지면서 속옷을 뱉었다.
“이런. 사오는 게 아니었는데……. 잘못 생각했네.”
“……”
“뭐, 무난한 취향으로 사왔는데. 어때?”
무난한 취향에 맞게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속옷들이나 누드브라들이었다. 아니면 가터벨트나 티팬티. 새오는 팬티에 레이스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찢어질 것 같이 찌직, 하고 불길한 소리를 냈다.
“취향 참 독특하네?”
“…….”
“그럼 어제 입고 있었던 하얀색 면 팬티가 좋아?”
“…….”
“그런 건 요즘 초등학생들도 안 입는데……. 캐릭터 그려진 거 사줄까?”
탁!
닥치라는 뜻으로 새오가 거칠게 쇼핑백을 발로 찼다. 이내 한숨을 푹 말아 쉬더니 그나마 적게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팬티를 입었다. 어찌나 딱 맞던지 천의 감촉이 기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얼른 끝낼 수밖에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검은 상자를 열었다.
문신에 필요한 니들과 잉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버리지 않아 다행이군. 버렸으면 손에 익은 것들을 죄다 다시 사야했었다. 새오는 자신도 모르게 매서운 눈으로 어떻게 그려야할지 대강 도안을 생각하며 잉크와 니퍼들을 간이 테이블에 나열했다.
“잉크가 튀겨.”
“그런데? 아, 옷? 버려도 돼.”
니퍼에 잉크를 충천하던 새오는 시엔이 입었던 자캣에 박힌 브랜드를 떠올렸다. 수제로 만들어 한정판만 뽑아낸다는, 명품에 무지한 자신도 알고 있는 브랜드였다. 당사자가 저러니 상관이 없겠다고 판단한 새오는 손짓으로 엎드리라 했다.
시엔이 천천히 침대 위에 엎드리자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잔근육이 박힌 등이 나왔다. 살면서 선부터 아름다운 등은 처음보기에 새오는 손을 뻗어 등을 쓸었다. 사람이라면 몸에 약한 부분이나 허점이 있어야하는데,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 다른 의미로 순결한 몸이었다.
“그렇게 만지면 간지러워…….”
말투는 여자 같았지만, 쉰 듯 한 퇴폐적인 목소리였다. 새오는 목소리와 묘하게 어울리는 등을 보곤 입을 달싹거렸다. 그걸 본 시엔이 턱을 괴고 새오를 쳐다봤다.
“여자는……. 글쎄. 막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등에 상처는 안 나게 밀어붙였지.”
“…….”
“나는 친절한 편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궁금한 걸 찰떡같이 알고 대답한 시엔이 요부같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새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친절하긴 했겠지. 말만. 보나마나 여자들을 밀어붙여 빠른 속도로 섹스를 했을 게 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들은 흥분에 겨워 울면서 안기고 싶어 했을 거다.
“궁금해?”
새오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시엔의 잘빠진 허리를 톡 쳤다. 그러자 배에 있던 멧돼지가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나왔다. 이쯤에 하면 되겠군. 한 손으로 초록색 잉크가 담긴 니들을 들고 반대쪽 손으론 허리에 짚었다. 밑그림 없이 진행되는 큰 문신이라 집중을 요했다.
“근데 이거 왜 하는 거야?”
“이 놈 먹이.”
“그럼 내 먹이는?”
“…….”
“언제 줄 건데?”
고요한 수면에 자꾸 돌맹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시엔 때문에 새오의 손이 멈칫했다. 시엔은 반항하듯 제 길고 잘빠진 다리를 휙휙 흔들었다.
“이거 아프고 따갑고 배도 고파.”
주사를 맞는 어린 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문신이 새겨지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한 번도 달래본 적 없는 새오는 한숨을 삼켰다. 저 지랄은 문신이 마쳐질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어느새 놈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고작 며칠 밖에 안 지났는데. 할 수 없이 흔히들 하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멧돼지가 봉인 된 후……. 이상한 게 없었나?”
“어떤?”
“……어제의 나처럼.”
“음, 손가락은 안 빨았는데. 아니 못 빨았지.”
니들을 잡은 새오의 손가락을 보고 시엔이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새오는 이 방법이 안 통하니 다른 주제로 특히 아픔이 잊혀질 만한 걸 말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흥미로운 주제, 이 놈이 바로 달려들 수 있을 만한……. 멍하게 있던 새오는 침대 근처에 있는 창문에 비친 자신이 보였다. 너무 커 몇 번을 접어야하는 와이셔츠와 야한 팬티만 입은 자신. 놈이 혹할 만 할 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새오가 다시 니들을 움직였다.
“나 아프다니까?”
“멧돼지 먹이야.”
“내 먹이는?”
“저 것들 왜 산거지.”
도돌이표 같은 대화에 새오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뭐? 아 옷이랑 속옷?”
“…….”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님 말 돌리려고 묻는 거야?”
둘 다였다. 새오의 심기 불편한 표정을 살펴본 시엔은 손가락으로 베개를 톡톡 두들겼다.
“널 위해 준비한 거지.”
익숙하지만 낯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새오가 고개를 들었다. 시엔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색스럽거나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다. 니들을 멈춘 새오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등을 돌려 잉크를 갈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창문에 무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당황한 게 티가 나는 새오의 표정이 비쳤다. 시엔은 눈에 힘을 줘 새오의 몇 없는 표정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일?”
“뭘.”
“내 먹이.”
“…….”
“별건 아니고 침사추이에 맛있는 게 있어서.”
“…….”
“다른 거 생각했어?”
진짜 먹는 걸 말하는 거였나. 새오가 잉크를 채운 니들을 들고 다시 뒤돌았다. 고개를 까닥이는 건 잊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시엔은 말장난을 그만하고 다시 엎드렸다. 이번엔 얼굴을 살짝 베개에 박았다. 덕분에 새오가 문신을 새기기 딱 좋았다.
“근데 문신 금방 없어질텐데…….”
알고 있었다. 아까 나체를 볼 때 자신이 지난번에 새긴 문신이 감쪽같이 사라져있었으니까. 다만 이번엔 자신의 에너지를 새겨 넣고 있었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없어지면 어쩔 수 없지만, 시험 해 볼만한 가치는 있었다.
“잉크 냄새 너무 진하다…….”
그건 문신을 하는 사람이 더 심하게 맡아졌다. 새오는 얼얼한 코를 몇 번 킁킁 거렸다. 그러자 잉크 냄새에 가려진 달콤한 향기가 맡아졌다.
남자의 스킨향과 옅은 아네모네 향……. 너무 희미해서 그런지 감칠맛이 났다.
4. 분노의 그림자
“저…… 일어나 주세요…….”
콕!
“지금 일어나시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콕콕!
새오는 자신을 찌르는 촉감에 눈을 떴다. 홍콩임에도 높은 천장에 화이트 톤의 천장. 깔끔한 색 조합으로 이루어진 방 곳곳이 박힌 황금으로 된 장식들. 그리고 정장을 입은 하녀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새오가 몸을 일으키자 먼지 털이 손잡이로 자신을 찌르던 하녀가 보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당신께 손가락 하나라도 닿는다면 잘라버린다고 했어요.”
미친놈. 새오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을 시엔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었다. 벌써 놈의 집, 빌딩에 산지 며칠이나 지났다. 어제까진 피곤함에 절어 밥을 먹고 다시 쓰러져 자고 일어나서 씻고 다시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놈과도 제대로 못 만났다. 놈도 놈 나름대로 바쁜 모양이었다.
“저, 주인님이 옷을 갈아입고 식사하시러 내려오라고 하셨어요…….”
하녀들은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며 겨우 말을 전했다. 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녀들을 지나쳐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 낯설고 지나치게 화려한 방에 정점을 찍는 것이 욕실이었다. 벽면 중간 중간 황금빛의 벽선반과 조명 그리고 거대한 거울과 하얀 욕조에 황금색 수도꼭지까지. 전부 휘황찬란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곳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하녀들도 없었고 컨테이너 박스에 살았을 때 화장실은 물론 욕실도 없었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을 가야했다. 제대로 편안하게 씻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퍽 좋았다.
새오가 씻고 나오자 하녀들은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를 수건으로 털던 새오는 하녀들을 훑어보며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옷장 앞에 있던 하녀는 얼른 옷장을 열어 손가락으로 입을 옷을 가리켰다.
“날씨가 더우니 편한 린넨 셔츠에 슬랙스를 입는 것이 좋으실 것 같네요.”
자신이야 옷에 대해 모르니 주는 대로 입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옷도 없었다. 저 안에 있는 옷은 전부 요즘 멋내는 여자들이 입는 옷들이었다. 그나마 부담가지 않아 며칠 동안 입었던 반팔 반바지로 된 슬립 웨어 같은 옷이 많았으면 좋으련만. 새오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하녀가 지정해준 옷을 입으려고 했다. 하녀들이 신속하게 가운을 벗기지만 않았어도.
“무슨 짓-.”
놀라서 멈칫했지만 하녀들은 가운을 벗기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옷을 입혔다. 손을 최대한 자신의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하며. 게다가 최대한 맨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 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이렇게 입혔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지하 1층으로 내려가셔서 식사하시면 됩니다.”
새오는 미심쩍은 부분을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방을 나섰다. 놈이 부른 것이니 어서 갈 필요가 있었다. 마침 배도 고팠으니 잘 된 일이다. 새오가 방 밖을 나가면서 문이 닫힐 쯤 하녀들의 쫑알거림이 들렸다.
“아휴, 어떻게 옷을 입히면서 맨 몸을 안 봐.”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보면 눈알을 후벼 판다고 했잖아.”
역시……. 새오는 한숨을 뱉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띵!
지하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거대한 하얀 문이 보였다. 웨이터들이 황금으로 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10인용의 대리석 식탁 맨 끝에 앉아있는 시엔이 보였다.
“어서와. 내 꿈 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