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오는 자신이 기댄 어깨를 으쓱하는 시엔을 쳐다봤다.
“왜 날 그렇게 쳐다봐?”
팜플렛을 들고 있는 시엔이 앙큼하게 말하자 새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보냐는 식으로 눈빛을 쏘아대자 시엔이 빙긋 웃었다.
“너 지금 ‘고작 피아노연주회 때문에 나를 이 침사추이까지 끌고 온 건가?’ 라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데?”
시엔의 얄미운 말에 새오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사펴봤다. 침사추이에 있는 홍콩문화센터 안 연주홀이었다. 새오는 짠 바다냄새와 강을 좋아했지만, 복잡하고 관광객이 득실거리는 침사추이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시엔이 사는 센트럴만으로도 족했다. 시엔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돼. 난 자기 전에 자기의 표정을 음미하고 자거든.”
“…….”
“거짓말 아닌데. 저번처럼 손가락 빨아줄 수 있어?”
“지랄하지-.”
새오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지만, 시엔은 손가락으로 입을 닫아주었다. 덤으로 새오의 단추를 여며주었다.
“쉿. 이제 시작한다. 우리 교양 있게 듣자.”
교양이라는 단어에 새오는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피아니스트는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곧이어 박수소리가 나왔다.
짝짝짝…….
유명 피아니스트, 페이가 연주를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그의 손에 의해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졌다. 차분하면서도 구슬픈 애정이 잔잔히 연주되며 사람들은 슬슬 눈을 감고 감상하려는 때에.
따랑!
부드럽게 넘겨야할 전주에서 거센 파도 같은 음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페이의 얼굴에 괴이한 분노가 그려지며 손이 빨라졌다. 이상한 광기와 분노. 사람들은 그 감정에 하나 둘씩 압도되기 시작했다. 다들 홀린 듯이 연주를 들을 때 시엔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감상했고 새오는 매서운 눈으로 피아니스트, 페이를 관찰했다.
쾅!
거친 연주가 끝나자 피아니스트 페이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손을 쳐다봤다.
“허억허억……. 왜 이렇게…….”
‘와아! 브라보!’
피아니스트, 페이의 중얼거림은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로 묻혀 졌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페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부들부들 떨리는 손 사이로 보이는 건 매서운 여자의 시선이었다. 이상하게도 페이는 자신을 꿰뚫어보는 여자의 시선에 침을 삼키다가 벌떡 일어나 무대 뒤로 도망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여자, 새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음 그림을 소개 한 건가?”
“아니.”
단호한 시엔의 대답에 새오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 쇼핑하려고 온 거야.”
“뭐?”
“교양 있는 시민답게 옷을 제대로 입어야지.”
“…….”
“난 구찌가 좋던데. 생각해둔 브랜드 있어?”
시엔이 눈꼬리를 휘어 새침하게 웃자 새오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
“계약 이행 해야지.”
계약이라는 말에 새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 시엔에게 속다 싶이 계약을 했지만, 나름 괜찮긴 했었다. 편한 곳에서 생활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니 편했다. 물론 시엔, 저 놈만 없었으면 모든게 완벽했지만. 시엔은 밤낮 없이 하루 종일 재잘거리며 말을 걸어댔다. 가령
‘문신한 곳이 아파 죽겠어. 밤에 잠을 못 자는데, as 라도?’
라던가
‘아까 천숑 그놈 눈빛 봤어? 나 괴롭힘 당하고 있다고.’
이런 개소리를 찡얼거리며 말했다. 참다못한 새오는 시엔이 찾아오는 밤에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시엔은 그림에 관심도 없다는 양 자꾸 신혼부부 놀음을 하려고 했으니까.
“아휴, 요즘 내가 너무 힘들어. 천숑 그 놈 눈빛 봤어? 요즘 자기한테 버림받은 날 비웃고 있다구.”
알 바 아니었다. 게다가 놈의 옆에 있던 비서 놈이 그럴 대담한 성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일 게 틀림없었다. 새오는 언제 나갈까 타이밍을 볼 때 공연 1부가 끝났다. 시엔이 일어선 새오를 얼른 잡았다.
“어디가? 화장실?”
새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엔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줄까? 외롭잖아.”
개소리 마라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대답은 잘 차려 입은 여자들이 했다.
“어머, 회장님 아니세요? 오랜만이네요. 공연은 자주 안 오시지 않았어요?”
“저번에 저흴 후원해주심에 보답하고 싶은데…….”
새오는 이때다 싶어 먼저 홀에서 나와 버렸다. 이젠 자유였다. 놈이 밀린 서류 작업을 하면 새벽 4시까지 일하다가 혼자 잠에 들 것이다. 새오는 간만에 유쾌한 마음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 날 밤 새오의 방바닥엔 명품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가득 차게 됐다. 침대 위엔 택을 떼지 않은 하얀 의사 가운 같은 트렌치코트와 편지가 놓여 져 있었다.
[새벽에 자꾸 없어지는 그이를 어떻게 잡아둘까요? 역시 몸으로 꼬아내는 게 좋겠죠? 저 꽤 잘하거든요. 손가락도 맛있어서 빨아댈 만큼요. 며칠 전엔 그이가 더 먹고 싶다고 난리 쳤다니까요! 하지만 의사선생님이 몇 번 더 제 몸을 진단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옆방에서 기다릴게요.]
“이 새끼…….”
새오는 빡침을 억누르며 형편없이 저속한 편지를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이내 침대 위에 있는 하얀 트렌치코트를 들고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
“2034 번 롼 페이 환자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페이는 상담실로 들어가면서 착용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내렸다. 문이 닫히자 의사와 단 둘이서 있게 된 페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24시간으로 운영하는 이 곳, 퀸 엘리자베스 병원이 퍽 마음에 든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스윽
의자를 빼내는 페이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으며 상담실이나 의사를 제대로 살펴볼 수 없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페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 왔냐고 물어볼 의사보다 먼저 말했다.
“제가 요즘 좀 이상해요. 좀 이상해요…….”
“…….”
“그러니까 제가……. 막 화가나요.”
의사는 페이의 떨리는 목소리에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페이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단지 이성적인 조언과 결과보다는 쭉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싶었다.
“제가 사실은……. 비밀이 있어요……. 근데 그게……. 아니, 제 친구가……. 친구가 한 명있었어요. 혼혈아인데, 이름은 엘리제인데 아무래도 가명이겠죠. 남자인데. 여튼 엘리제랑 술을 마시다가 친해졌는데……. 아닌데. 난 금주가인데. 학교에서 친해졌나? 엘리제는……. 여튼 제 친구에요. 근데 언제서 부턴가 엘리제가…….”
말하다가 목이 맸는지 페이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의사는 천천히 말하러며 물이 담긴 종이컵을 건냈다. 페이는 아까 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받았다. 꿀꺽-. 물을 한 번에 다 들이킨 페이는 축축이 젖은 입으로 이어 말했다.
“엘리제가 제가 속삭였어요. 막 화가 나지 않냐고……. 이상하게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나요.”
페이는 떨리는 손으로 계속 귀걸이를 만졌다. 은으로 된 뱀 모형이 달려있는 귀걸이였다. 의사가 그걸 눈여겨 본 걸 안 페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엘리제가 준거예요. 이상하게 엘리제가 잘해주는데 이렇게 잘해주는데, 엘리제가 막 꼴도 보기 싫었어요. 근데 더 미치겠는 건 언제서 부턴가 꿈을 꿨어요. 꿈에서 저는 호랑이인데요……. 자식이 있는데, 이상하게 어린 아이인거예요.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저는 제 새끼가 이쁘니까 마을에 몰래 찾아가서 구경했는데 그걸 본 막 인간들이 때렸어요.”
“…….”
“아무튼 근데 그 때 그 인간 중에 이상하게……. 엘리제랑 닮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꿈에서 깨면 엘리제가 제 곁에 있고……. 그날도 엘리제와 술을 진탕 마시고 잤는데……. 꿈을 꾸고 나니까 너무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죽였군.”
의사가 사실을 뱉자 페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 눈치 챘나봐. 아냐, 상담을 한 다음에 이 의사도 죽여 버리자! 그러면 돼! 페이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면서 부들부들 떨렸다. 이내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토막 내서 장롱에 넣어놨지요! 그런데…….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저 어떻게 하죠?”
분노를 표출할 때는 언제고, 페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두터운 안경 너머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엔 울렁이는 자신이 비춰있었다. 그 옆엔 자신이 토막 내 죽여 버린 엘리제가 몽롱이 있었다.
“헉!”
페이는 고개를 뒤로 돌리자 병원 상담실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울렁거리는 시야에서 선명히 보이는 건 자신의 방에 있는 낡은 장롱이었다. 뱀을 향해 울부짖는 호랑이 자개가 박힌 장롱. 페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제발 있어라……. 제발!”
덜컹!
장롱을 열자 데구르르 굴러지듯 나온 것은 하얀 가운을 입고 포박당해 정신을 잃은 의사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번에 자신을 상담했던 정신과 의사였다. 그리고 장롱은 장롱이 아니라 상담실에 있는 캐비닛 같은 것이었다. 페이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
의사가 아니, 의사가 아닌 자가 안경을 벗었다. 이제 보니 의사 가운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하얀 트렌치 코트였다.
“어제 공연에 왔었던…….”
“탄위는 어떻게 생겼지?”
“탄위?”
“엘리제의 진짜 이름.”
“너! 엘리제의 친구구나!”
“내가?”
여자는 어이없었는지 콧웃음을 쳤다. 페이는 자신이 말해도 아닌 것 같아 눈을 굴리며 소리 질렀다.
“너 누구야! 넌 누구야!”
여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방 안의 형광등이 꺼지고 스탠드 조명이 꺼졌다. 완벽히 방안에 어둠만이 자리 잡았을 때 여자의 등 뒤에 있는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왔다. 여자가 가볍게 지휘하듯 손짓하자 방 안에는 모든 물건이 없어졌다. 하지만 물건들의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여자와 페이 그리고 달빛과 그림자들. 기묘한 느낌에 페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누구냐고!”
“새오.”
“뭐?”
“너를 죽이러온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