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얼굴을 짓뭉갰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허망했다.
지금까지 죽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다짐과 노력을 해 왔는데.
아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은 맞으니 결국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속해 있었던 세계, 나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던 그곳으로부터 드디어 해방이 된 것이었다.
“그럼······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뭐가 말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저는 이 곳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갈 곳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의원이 입 꼬리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나를 살포시 껴안았다.
“너와 같이 왔던 그 두 인간, 이 나라에서 꽤 힘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다.”
의원의 은밀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깜짝 놀라 몸을 뒤척이자, 의원이 억세게 어깨를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 둘의 마음을 사로잡아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너에게 아주 많은 도움을 줄 인간들이다.”
의원에게서 벗어나려 꼼지락거리다가, 의원의 머리카락에서 새어나오는 낯익은 향기에 멈칫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였다. 시원하고도 부드러운 향기. 내가 움직임을 멈추니 의원이 나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을 순순히 풀어주었다. 내 시선이 의원의 흰 머리에 꽂혔다. 창가에 새어나오는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알 듯 말 듯 답답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네.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말게나.”
그 말과 함께 의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여인과 남자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의원이 그 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여인과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다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렇게나 빨리요? 이번에 새로 온 의원이시라 들었는데, 어째 의술 실력이 기존에 있던 다른 의원들보다 더 뛰어나시네요.”
“감사합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죠?”
“아무래도 환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합니다.”
“기억상실증이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와는 달리,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의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한 눈치였다.
“그럼 이제 이 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긴요, 치료도 해 주었으니 이제 그만 서로 갈 길 가면 되는 겁니다.”
“환자를 이대로 방치하면 위험합니다.”
“기억 하나 없어졌다고 위험하긴 왜 위험하다는 겁니까?”
“현재 이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다가, 기본 상식마저도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멋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사고가 날 위험이 커요.”
“그래, 도이야. 이 불쌍한 녀석을 도와주는 게 그리도 싫으니?”
“누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좀 대들고 착하게 누님의 말을 따라야지. 그렇지, 도이야?”
여인의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누님.”
“좋아. 의원님, 수고하셨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야, 가자.”
여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힐끔 의원을 엿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의원이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쉿.
의원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아무리 봐도 저 의원은 수상했다. 의원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기분 또한 찝찝해졌다.
"지금 내 말 무시하니? 가자니까."
의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여인이 손날을 세워 머리에 내리찍었다. 작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남자가 나를 데리고 유유히 방을 나갔다.
“내 말을 꼭 명심하게.”
귓가에서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이 소름 돋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의원의 방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
나는 벌게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에 들린 의원의 목소리에 우수수 돋았던 닭살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의원의 정체가 뭘까. 평행세계라느니 혼이 바뀌었다느니 보통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기괴한 말들을 내뱉은 것도 모자라, 저 둘의 마음을 사로잡아 곁에 붙어 있으라고까지 충고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수상쩍은 말들을 무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강경하게 말해온 탓에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붕대가 감겨진 왼쪽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해진 건지, 내 인생도 참 기구했다. 과연 이 곳에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와 괜히 팔을 쓸고는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들어 시장 길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온통 낯선 것들 천지였다. 그래도 높게 자리한 건물들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세계라고 해도 새파란 하늘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안도를 주었다.
내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여인과 남자를 쳐다보았다. 슬쩍 엿들어보니, 여인은 나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남자가 안 된다며 말리고 있는 듯했다. 남자로부터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애꿎은 사과더미들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여인과 남자에게 슬금슬금 멀어지며 길을 내주고 있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개똥 씹어 먹은 표정이었다. 몇몇은 여인과 남자를 대놓고 노려보기까지 했다.
“어이구야, 상임의 자제분들이 아니신가?”
“저 풍만한 엉덩이 봐라, 아주 밤일 잘 하게 생겼네.”
“우리 같은 천한 놈들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잠자리 기술이 좋다지?”
“당연한 걸 말해 뭐 하나. 내 입만 아프지.”
바로 뒤에서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사내 두 명이 내 앞에 있는 여인을 가리키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확 인상을 구겼다. 딱 봐도 질이 나빠 보이는 놈들이었다. 남자가 여인과의 실랑이를 멈추고 사내 둘을 노려보았다.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여인이 재빨리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저게 뭐 한 두 번이니? 무시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누님······.”
“입 다물고 어서 걷기나 해라, 동생아.”
여인의 말 한 마디에 남자가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사내 둘을 노려보고는 홱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너는 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저런 놈들 중 한 명이었던 주제에.”
여인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뭐, 예전에는 그랬다고. 그렇게 충격 받은 표정 짓지 마.”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여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저런 부류의 놈들인데, 예전의 내가 저런 짓을 했다는 것이 보통 충격적인 게 아니었다. 세상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인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믿지 않고 환자 취급할 게 뻔했다. 마음이 답답해 한숨만을 푹푹 내쉬며 묵묵히 여인과 남자를 따라갔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건지, 여인과 남자는 얼른 시장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벽돌집 저 너머로 돌담에 둘러싸여 있는 대저택이 보였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돌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가 대문을 벌컥 열었다. 마당에서 잡초를 깎고 있던 노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문 앞으로 모여, 들어오는 우리를 반겨주었다.
갑자기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놀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문 밖에 홀로 서 있자, 남자가 가볍게 혀를 차며 나를 끌고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죠?"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을 한 나를 가뿐히 무시한 남자는 묵묵히 현관문을 열어 나를 밀어 넣었다. 문턱에 걸려 조금 비틀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바로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는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눈을 껌뻑였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집안 전체는 축구 한 판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 중앙에 떡하니 매달려 있었으며, 곳곳에 휘황찬란한 도자기들이 기다란 원형 탁자 위에 전시되어져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넓은 집안에 처음 들어와 본 나로서는 이 광경이 그저 꿈만 같았고, 결코 현실이 아닌 허상이라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