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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을 죽이다
작가 : 다채
작품등록일 : 20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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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작성일 : 17-07-06     조회 : 247     추천 : 3     분량 : 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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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의 뾰족 구두가 새하얀 대리석에 맞부딪히며 또각또각 소리를 내었다. 여인은 거실 정 가운데에 위치한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여인의 맞은 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남자는 여인의 옆으로 가 풀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부엌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노인이 냉큼 다과를 내왔다.

 

  “그래서, 너 이름이 뭐니?”

 

  여인이 커피 잔을 들어 코에 갖다 대며 입을 열었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끔뻑거리고 있으니 남자가 나를 힐끔 흘겨보고는 대신 대답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하니 자기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아, 그런가.”

 

  여인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어주면 되지. 머리가 검으니 껌둥이 어때?”

  “그런 건 보통 애완견한테 붙이는 이름이잖아요, 누님.”

  “뭐, 어때. 아니면 흰둥이?”

  “누님······ 그것도 이상해요.”

  “이공연.”

  “응?”

  “제 이름, 이공연입니다.”

  “이공연?”

  “네.”

  “이공······푸흡, 이공연······ 푸하하!”

 

  여인이 갑자기 남자의 어깨를 퍽퍽 때리며 박장대소 했다. 여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커피가 새하얀 식탁보를 더럽혔다. 그러자 노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냉큼 다가와 곧바로 식탁보를 닦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수건으로 얼룩진 식탁보를 열심히 닦고 있는 노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여인이 눈물을 닦으며 커피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 이름, 되게 촌스러워."

 

  약간의 억눌린 목소리였다.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여인을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인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생각했다.

  내 이름이 촌스럽다고?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독특한 이름도 아니다. 내 이름이 저렇게 박장대소를 할 정도로 웃긴 이름이었던가. 여인이 눈물까지 흘리며 웃은 것을 떠올리니 왠지 무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소모야. 내 동생 이름은 도이……풉, 이공연이라니, 푸흐흐…….”

  “그만 웃으시죠.”

 

  내가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소모가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었다.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촌스럽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내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하면 폭소를 해대니 도무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기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급히 입을 열었다.

 

  “그냥 ‘쇼’ 라고 불러주세요.”

  “쇼?”

  “네.”

 

  쇼. 지겹도록 많이 들어본 단어였다. 술집에 발을 들인 지 일주일도 안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귀게 된 애인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별명을 ‘쇼’라고 짓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이 ‘공연’이어서 영어인 ‘show’라는 별명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예전의 삶에 관계된 것이라면 몸서리 칠 정도로 싫어했지만, 오직 그 별명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간결하고 단순하다는 점도 좋았지만, 묘하게 공감이 가는 단어였다. 당시 나의 심리가 불안정해서였을까, 내 삶 자체가 일종의 쇼 같다고 느껴졌다. 진지하지 않고 유흥적인, 다른 이들이 비웃기 딱 좋을 구경거리 말이다.

 

  “오, 좋다!”

  “‘이공연’보다 훨씬 낫네.”

  “그럼 쇼야, 너 몇 살이니?”

  “스물 셋이요.”

  “어머, 의외로 나이가 꽤 있구나. 우리는 이제 열일곱인데.”

  “에?”

  “열일곱 살이라고. 15월의 여든 한 번째 토룡의 해에 태어났지.”

  “열일곱 살……? 둘 다?”

  “응, 우린 이란성 쌍둥이야.”

 

  나는 소모와 도이를 번갈아보았다. 확실히 둘의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이란성 쌍둥이에다가 무려 열일곱 살이라니. 적어도 나와 동갑, 아니면 한두 살 많을 줄 알았는데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아이들이어서 꽤 놀랐다.

 

  “왜 계속 꼴아봐.”

 

  내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기분 나빴는지 도이가 으르렁댔다.

 

  “도이야, 그러지 말고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 해보렴. 이제 서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자야 할 사이인데 그렇게 쌀쌀맞게 굴면 어떡하니?”

 

  나와 도이가 동시에 소모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우리와는 달리, 소모는 왜 그리 놀라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하잖니.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님! 이 녀석을 왜…….”

  “딱 봐도 갈 곳이 없는 것 같은데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게 해야지.”

 

  소모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도이가 황당함에 입을 뻥끗거렸다.

 

  “제정신입니까, 누님?”

  “하늘같은 누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도이야.”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뭣도 모르는 사내자식과 같이 지낸다니요. 이 일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누가 네 아버지냐? 그 작자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마.”

 

  갑자기 정색을 하는 소모에 도이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소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도이가 힐끔거리며 소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소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도이가 풀 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누님, 죄송해요.”

  “정말로 나한테 죄송하니?”

  “네.”

  “그럼 군말 않고 방 같이 쓰는 거다?”

  “누, 누님. 그건…….”

  “그건 뭐?”

 

  도이가 싫은 내색을 보이자 소모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소모의 눈빛에 순식간에 기가 눌린 도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누님.”

 

  그제야 소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됐다. 그렇지, 쇼?”

  “어? 아, 으응.”

  “우리 집에 살게 된 걸 환영해.”

 

  소모가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휘어진 눈매가 장난기 많은 악동 같아 보였다. 그러나 때 타지 않은 순수함이 엿보였다.

 

  “나야말로 고마워.”

 

  진심이었다. 예전에 이 몸의 주인이랑 무슨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좋지 않았던 사이였던 것은 분명한데 나에게 이리도 잘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게 수상쩍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의원의 말을 성실히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일단은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지 않나. 따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소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잘 해주는 건지. 지금까지 살면서 호의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내가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서야 이런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주머니, 그것 좀 가져와 주세요.”

  "예."

 

  소모가 옆에 서 있던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기다란 호리병들을 두 손 가득 가져왔다. 식탁에 내려놓자, 병 안에 있는 금빛 액체가 출렁거렸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모를 쳐다보았다. 도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도이와는 달리 소모는 신이 난 얼굴이었다. 소모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째 점점 불안해졌다.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술이지.”

  "술?"

 

  소모가 당당하게 말하며 병뚜껑들을 따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이라면서 당당하게 술을 마시려는 소모를 말려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노인을 보고 혹시 이 세계는 미성년자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하는 동안, 소모는 각각 다른 병의 술들을 한 컵에다가 막 섞으며 괴상한 액체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손놀림이 재빠른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소모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완성된 술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냥 순수해 보였던 소모의 미소가 이제는 무섭게만 느껴졌다.

 

  “자아, 쇼. 앞으로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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