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하늘은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왔다.
어머니의 품 속.
나는 어머니의 말랑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니, 안아주세요.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은 필요 없어요. 안아주세요. 간절하게 부탁했다.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나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온기도, 감촉도 없는 공허한 입맞춤이었다.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왜 안아주지 않는 거예요? 눈 좀 떠봐요. 어서 눈을 뜨고 봐주세요. 추위에 몸을 떨고 있는 저를 보라고요. 무참하게 짓밟혀 망가져버린 당신의 아들을요.
이제 희망이 없어요. 고칠 수 없는 폐기물처럼 제 인생도 큰 오점이 생겨버렸어요. 아니에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어머니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복수나 원망 따위는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어요. 하지만 제가 과연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얻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요.
만약 그것을 끝까지 얻지 못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었다. 똘똘 뭉친 이불 덩어리가 내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 메마른 눈물이 눈가를 따갑게 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슬픈 꿈을 꾼 듯 했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대충 눈곱을 뗀 다음,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커다란 방 안을 반쯤 풀린 눈으로 둘러보았다. 침대 옆 책장에 두꺼운 책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반들거리는 붉은 나무재질의 책상에도 여러 종류의 책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리다 침대 바로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기다란 칼을 발견했다. 검은 칼집에 붉은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왠지 낯익어 유심히 살펴보니, 도이가 차고 다니던 칼이었다.
아무리 눈을 굴려 봐도 도이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려 하자, 머리가 띵 하고 어지럽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폭신한 침대에 다시 드러누워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는데, 뒤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왜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가지고는.”
“도이?”
뻣뻣해진 고개를 간신히 돌려 도이를 바라보았다. 침대 뒤 선반에 다리를 꼬고 앉은 도이가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혹시 네 방이야?”
“어.”
“내가 왜 여기 있는······아야야.”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귀에서 칠판을 긁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당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눈을 찡그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나를 본 도이가 쯧쯧 혀를 차며 들고 있던 작은 병을 나에게 던졌다.
“마셔.”
“이게 뭔데?”
“약.”
“무슨 약?”
더 이상 나와 말을 섞는 게 싫은 건지 도이는 더 이상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뚜껑을 여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나 도통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낑낑거리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홱 하니 병을 낚아채 뚜껑을 열고는 다시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닥쳐.”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병에다가 입을 갖다 댔다. 나를 대하는 도이의 태도는 분명 쌀쌀맞았지만, 묘하게 친절했다. 싫은 티 팍팍 내면서도 도와줄 건 다 도와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엄청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윽, 써.”
입 안에 퍼지는 쓴 향기에 기침을 하며 혀를 내밀었다. 도이가 말없이 빈 잔에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냉큼 물을 마셨다.
두통이 말끔하게 없어졌다. 힘이 없어 축축 처지던 몸 또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이렇게 효과가 좋다니.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약병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풀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망설이는 건지, 나는 그저 의아한 눈빛으로 도이를 바라보았다. 힐끔거리던 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도이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졌냐?”
“뭐?”
“술 좀 깼냐고.”
나는 도이의 붉어진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흰 피부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하니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그 모습이 물론 귀엽긴 했지만, 험상궂게 인상만 쓰던 녀석이 저러니 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다.
갑작스런 태도변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혹시 아까 술을 마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기억이 안 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도이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도이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도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볼을 연신 긁적이면서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기에 저 녀석이 나를 보며 저리도 쑥스러워한단 말인가. 혹시 술김에 고백을 한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이내 나는 강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도이는 내 취향도 전혀 아니거니와 만약 취향이라 해도 나는 그리 쉽게 고백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떨리는지,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멈출 도리는 없었다. 도이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일단은 받아들일게.”
“뭐를?”
도이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커진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얼떨결에 억지 미소를 짓고는 슬쩍 도이의 눈을 피했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온 몸이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만이 지진이 난 듯 거세게 흔들릴 뿐이었다.
“있잖아. 내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혹시 아까…….”
“뭐? 기억 안 나?”
“내, 내가 원래 필름이 끊기면 기억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서.”
“필름?”
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소모가 나에게 술을 먹이면서 주량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술맛이 부드럽고 달콤해 그리 센 술이 아니겠거니 했는데,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소모에게 술 한 병쯤은 다 먹을 수 있다고 대답을 했던 그 이후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많이 마셔댄 건지. 엄청난 후회가 지진해일처럼 밀려왔다.
“네가 우리한테 사과를 했어.”
“사과?”
“예전의 일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에게 상처를 줬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과했어.”
“…….”
“기억 안 나냐?”
“아냐. 이제 기억이 나는 것 같아.”
나를 째려보는 도이의 눈에서 약간의 섭섭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도이의 말을 들으니 내가 무릎을 꿇었던 행동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내가 고백을 했을 리가. 안심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턱까지 흘러내려온 식은땀을 닦아냈다.
확실히 도이와 소모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직접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몸이 예전에 저지른 행동은 결국 현재의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과를 하는 게 서로와의 관계에도 좋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릎까지 꿇었다니. 술기운에 감정이 살짝 격해졌었나 보다. 시장에서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던 도이와 소모의 모습이, 예전의 세계에서 소외받던 내 모습과 겹쳐 보여 더욱 흥분했는지도 몰랐다. 내 편이 아무도 없으니 서럽고, 홀로 외롭게 남겨진 나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더러운 기분을 아이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다 생각하니 동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