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당연히 동의할 줄 알....왜?!"
[안돼.]
그녀의 부정은 차분하지만 강했다.
“왜? 공감은 한다며.”
철컥, 소리와 함께 그녀는 정제미가 흐르는 자세로 서서 고개를 숙였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선대에게는 내 행동이 답답해하고, 의미가 없어보일지 몰라도......이 강마향혈은 나에게 명예이자 지금까지 103년간의 삶을 지탱해온 내 정체성이야.]
그녀는 손가락을 펼쳐 눈앞에서 흔들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은 필요에 의해 당신의 집까지 들어가기로 하였지만 엄연히 따지면 ‘적이 될 수 있는’ 상대의 진영에 들어가는 거지. 그런데 거기에 갑옷까지 완전 벗어놓는다는건 지금까지 내 삶의 지침과는 많이 다른 선택인거지.]
“무슨 소리야. 진짜 미쳐버리겠군. 무인들의 사고는 원래 다 그런거야?"
[아, 진짜 쫑알쫑알 내 말에 토 달지 말라고, 선대여!!]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녹색 뇌전에 나는 저만치 도망쳤다.
그녀는 화를 식히며 나에게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화를 삭히긴 했지만 그녀의 눈두덩이의 어둠속에서 스며 나오는 안광은 안개처럼 밤하늘에 흩어져나갔다.
[후.....뭐 좋아. 그래. 일반인이니 당신의 사고를 존중하지.]
끼기긱, 하는 실금이 간 하얀색의 갑주를 움직이며 그녀가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편법을 쓰지 않았고, 언제나 적이 있으면 그 적의 정면으로 정정당당하게 돌격했어. 그리고 패퇴시켰지. 그 과정에서 설령 패배한다하더라도 어떠한 용서도 구하지 않았고, 자비를 바라지 않았으며 상대의 일방적인 사술과 사법, 진법과 불의 등을 원망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럼 하에 어떠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내 앞을 막아선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며 내 의지를 관철시켰으매 내 신의와 도리를 위해 싸웠다. 그것이 바로 말에 칼로 대답하는 검옥의 세계에서 103년간 살아온 나의 방식이자 신념. 현경現境의 경지에 든 6대 살성 중 다섯 번째, 북서쪽에 학살의 천마라는 오명으로 불리면서까지 살아온 나의 길.]
그 어조는 높낮이 없이 한없이 차분하고도 응의가 있었으며 거친 쇳소리였지만
그 속에 절내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나에게 짤막한 목례를 하며 말하였다.
[선대의 조언, 진심으로 이해하고, 알아들었어. 선대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안전을 대비하고자 한 것도 아니야. 그저 내 개인적 사정에 의해 거부하게 된 점, 미안하게 생각해.]
생각지도 못한, 급작스런 그녀의 정중한 사과였다.
그리고 그 사과 안에 담겨있는 결단력.
그녀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나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수 초안에 타당성을 검토하고, 적합성을 판정내리고, 발언하는 그 막힘없는 모습에 나는 맥이 빠지는 느낌을 들었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미안해. 그런 뜻이 있을 줄은 몰랐어.”
[일반인에겐 애초에 기대안했어. 걱정 마, 선대여.]
"단칼에 대답하는데에 왠지 분함이 느껴지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 갑주를 해제하고 가는 것은 뭐랄까, 안전도 안전이지만 일단은 그..명예가 걸린다 이거지?”
[그렇지.]
“그러면 말장난으로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혹시 좀 경량화를 시킨다던가, 부분적으로만 해제하는 것도 가능해? 그러니까 완전히 너의 상징이라는 것을 없애 버린다는게 아니라, 하다못해 좀 부피라도 덜나게 하는거지."
그녀는 고고한 자태로 팔짱을 낀체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강마향혈의 눈두덩이에서 나오는 안광은 아무리 바라봐도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 걸려?]
그녀가 조금 괴로워 하는듯한 어조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응. 많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일정 부분은 남기는, 부분 경량화라도 괜찮으시다면 해볼게.]
그녀는 한발자국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 괘.....괜찮은거야?”
[자신의 상징을 스스로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일정부분만 잠시 덜어내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녀는 그리 말했지만 그녀의 어투에서 나는 얼음 아래 새하얗게 치솟아 오르는 화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아?”
[괜찮아.]
분명 무리하는 거다, 라고 추측했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선대여, 괜찮-아. 그러니 그에 관련해서 그만 말 걸지?]
더 이상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집게 손가락을 세워 몸의 한 부위당 16군데씩의 지점을 타점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 화 안 났어.]
“어, 응......”
[안 났다고.]
“무,물론! 살성이 겨우 이런걸로 화 낼리가!!!”
[뭐? 겨우? 이런거?]
파지직.
나는 뿜어지는 스파크에 침을 꿀꺽 삼켰다.
"미안합니다."
"......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목덜미의 척추 부근을 따라 몇 군데를 눌렀다.
덜컥
갑주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갑주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은빛 모래처럼 되어버리며 허공에 날아갔다.
녹색의 불빛이 원한에 서린 귀신처럼 허공에 맴돌았다.
갑주가 떨어지며 바람에 흩날리는 청색의 비단옷이 드러났다.
그 사이로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눈 같이 하얀 피부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갑주들이 분해되어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내리꽂혔다가 사라져갔다.
그 아래 드러나는 몸은 정말, 가늘고 여성미 있는, 나보다도 살짝 키가 작은 한 소녀였다.
철컥 철컥
마지막으로 투구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녀의 전신과 목덜미 부근으로는 부분부분, 분할된 갑주의 조각들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강가의 버드나무 잎이 움직이는듯하였다.
한올 한올 은으로 세밀하게 만든 거문고의 현처럼 흔들렸다.
깊고 깊은 보석같은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였다.
이질적이고, 이질적이어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한 모습. 애초에 그녀는 내 앞에,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선대여.”
어떠한 차단도 없이 그녀의 긴 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불렀다.
“아, 응.”
“무슨 문제라도?”
그녀의 가늘고 긴 눈썹이 살짝 八자 형태로 움직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멍해 있다가 뒤늦게 나는 화들짝 놀라 어버버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그러니까 음, 전에도 그리 생각했지만 갑옷 안에 옷이 있는 게 뜻밖이여서.”
말하고 나서 아차했다.
“아무리 내 강마향혈이 분신과 같은 신수라지만, 맨 살 위에 갑옷을 입을 리가.”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사파이어 눈동자에 바보 같은 내 표정이 비쳐보였다.
“그게 그러니까. 아냐 잠시 딴 생각하느라.”
“딴 생각...? 이거 그냥 일반 멸치인줄 알았는데 변태 멸치였다니.”
“벼, 변태 멸치라니!!!”
“앞 날이 캄캄하다. 변태 멸치가 잠깐의 동행이라지만 어쨌건 파트너라.”
변태라는 말까지 듣고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였다.
하지만 흰 피부라는 도화지에 붓으로 한 획에 그린 듯한 그녀의 이목구비에서 나는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친 옷은 아무래도 갑주 안에 겹쳐 입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무인들이 입는 옷의 재질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알게 모르게 육감적인 몸의 라인에 휘감듯이 달라붙어 오히려 노출된 미니스커트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아, 그리고."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그녀는 아차, 하며 나를 향해 말한다.
"내가 이 모습을 드러내 있는 동안, 나와 살성을 연관시키는 뉘앙스조차 조금이라도 풍긴다면 바로..."
"그럴리는 없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었다.
“지체 되었어. 빨리 가자.”
아득히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그녀가 뭐냐는 듯이 뒤돌아보며 붉은빛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되는거야?”
“나...? 뭐를 말하는 거지?”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 같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뭐라 불러야 하는지 호칭을 고민할 수는 없잖아. 살성님, 천마님(그녀의 도끼눈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시나타데님, 뭐 그렇게 불러도 되긴 하겠다만. 어느걸로 불러야 할지도 잘 감이 안잡히고. 그리고 말 나온김에 너의 그....나를 부르는 호칭, 선대? 에 대해서도 묻고싶고. 특별한 이유...같은게 있는거야?"
아, 호칭에 천마님은 빼고. 라고 녹색의 뇌전이 일으켜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선대.....라는 호칭은, 내가 예전에 정한 규칙 같은거야. 그러니까..... 영겁에 가까운 삶을 사는 나에게 너희들은 한때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아.”
그녀는 몇 번 무슨 말을 이어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수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짧은 행동이었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호칭할 때, 내 나름 그들을 존중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하나의 대명사야. 별다른 의미는 없으니까 신경쓸 필욘 없어.”
“존중?”
“그래, 존중. 뭐 잘못 된거라도 있어?”
멍청이, 멸치......나는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나열하며 존중을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선대라는 호칭 말이야. 그것보다 나에게는 현, 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는데 대신 그걸로 불러도 괜찮...."
“나는 검옥의 세계에 영원히 갇혀 사는 존재야. 선대와는 다른 세계의 존재지. 그런 부름은 내게 무의미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제안에 대한 그녀의 우회적 거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뭐라 불러야하지?”
8월의 보름달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시나타데라 부르면 되잖아."
"그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왜?"
눈앞의 그녀는 은색 머리를 흩날리며 붉은 눈동자를 깜박였다.
"너의 갑주...? 그 강마향혈? 을 걸칠때의 이름이잖아. 지금 부를 이름은?"
"뭐....?"
그녀는 기가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거나 이거나."
"상관 있지. 더군다나 너는 지금의 모습과 그 살성, 의 모습과 연관되는것도 싫다며."
"........"
그녀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여름밤 열대야를 스쳐지가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상큼한 밤공기와 풀냄새가 코끝을 스쳐지나간다.
“정 선대가 나를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면.”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슈나Asunah. 아슈나라 불러.”
그리고 나는 그때 5번째 살성, 학살의 천마 시나타데의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거기 밖에 누구 있습니까?"
현관문이 끼익 열렸다. 교수가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