킁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작은 코를 씰룩이며 공기중에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
달빛 아래에서.
홍련의 눈동자는 다시금 그때 전장의 눈동자처럼 잔혹하리만큼 차갑게 식어있었다.
"당신.... 나한테 숨기는게 있었어?"
"아....아니. 갑자기 왜 그래."
공기가 얼어붙는다.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농담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익숙치 않은 살기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내가 숨기는게 있을리가."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참작해줄께. 선대여."
카가각
그녀의 왼팔부터 뱀이 타고 올라가듯 강마향혈이 은빛가루와 함께 휘감기며 형체를 이뤄간다.
그것은 명백한 전투태세.
"아니, 잠깐만. 지금 나는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진짜 모르는지 아닌지는 이걸로 알 수 있겠지."
스겅
예고도 없었다.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 수정이 뽑히고 내 목덜미를 향해 휘둘려졌다.
아앗, 이라며 비명을 지르거나 움찔할 반응따위 할 시간도 없었다.
".......으."
기이잉
끝을 알 수 없는 예리한 수정 끝 부분은 각막의 바로 앞에 멈추어 있었다.
종이 한장 차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정도로 가까운 거리.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8월의 습기찬 공기가 열린 창문을 따라 들어온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이게 무..무슨 짓이야."
나는 목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이럴리가."
내 머리를 쪼갤듯 수정을 휘둘렀던 아슈나는 의아해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자칫해서 움직이기라도 했으면...!"
나는 벌컥 화를 내며 눈앞에 드리워진 수정을 밀어내려했다.
"아, 잠깐....! 수정 맨손으로 밀어내지마. 밀어내는 그대로 수정이 밀리는게 아니라 손가락이 잘려나갈꺼야."
아슈나는 내 행동을 제지하며 수정을 치웠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분명 틀릴리가 없는데.....이토록...강하게..."
"아까부터 자꾸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거야?"
나의 물음에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니, 선대의 방에 들어왔는데 정말....강하게 우리 살성의 향이 강하게 났거든. 이렇게 강하게 날리가 없는데......그래서 아까전에는 혹시 내 앞에 선 존재가 일반인이 아닌 살성 한명이 변형해서 있나 의심했던거야."
"잠깐, 그래서..."
수정을 어깨에 짊어지며 아슈나는 태연히 말했다.
"내가 100퍼센트 머릴 쪼개버릴 각오로 수정을 휘둘렀으니, 만약에 현경의 경지에 다달은 살성이였더라면 반드시 반응하리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무반응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수정을 수납하는 아슈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왠지 모르게 분한 기분이였다.
문득 그녀의 말중에 의아함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100퍼센트 머릴 쪼갤 각오로 휘둘렀는데 그럼 어떻게 내 눈앞에 수정을 멈춘거지? 그게 가능해?"
"살성이니까."
어떻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말이기도 하였다.
아슈나는 왼쪽팔을 감쌌던 강마향혈까지 풀어버리고 침대에 풀썩 앉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언가 찜찜하다는듯이 계속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이상하단 말이지.....이정도 '흔적의 향'이 나려면 거의 하룻밤 내내 이곳에서 살성이 딩굴거려야 날까말까일거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면 선대가 멀쩡하게 여기 있는것도 말이 안되고......이해를 못하겠어."
향, 이라는 말에 나는 멈칫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검은 무인들이 내뱉었던 이해 못할 말들.
그들도 나에게서 향이 난다고 하였다.
그때였다.
-그녀를...믿지 마라.....당신 자신만을 믿어...
".....?!"
머릿속 저 깊숙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
나는 흠칫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슈나를 향해 말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렸."
-말하지 마...!
".....!"
아슈나에게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느냐, 라고 물으려는 것을 황급히 멈추었다.
".......무슨 일이야."
아슈나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어본다.
홍련의 눈동자가 불똥을 튀기듯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아....아니야. 아무것도."
라고 말했다.
전에도 분명 들은적 있었다.
저 멀리 동굴속에서 울려퍼지는듯한 목소리.
습기 찬 목소리.
마치 저 깊은 물이끼 낀 우물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목소리.
-추후, 눈앞의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지.....그때까지....그녀를 믿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
나는 멍히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믿지 말라고....?
그 말을 하는 당신은 누군데?
당신은 누구길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리는거지.
도대체 뭐지.
언젠가부터 비정상이 정상처럼 일상에 난립하고 있다.......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나를 바라보는 아슈나에게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사래를 친다.
아슈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나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아, 아까전엔 진짜 간떨어질뻔했다고, 라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 만약에 진짜 그 또 다른 살성이 있었으면 어떻게 할꺼였는데?"
그 질문에 아슈나는 바보같은 질문을 한다는듯 홍련의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야 당연히."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듯이.
"죽이지."
마침표를 찍듯이 말을 한다.
싸늘하다.
척추를 따라 얼음끌이 뼈를 깎아나가는 것 같았다.
아직 누굴 믿어야 할지,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확실한 건 없었다.
그 목소리가 누군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내 목숨을 책임져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눈 앞의 존재도 실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장담 할 수는 없다.
아직은-.
조금의 여지라도 남겨두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나도 고개를 갸웃하며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로써 솔직하게 말할 타이밍은 지나갔다.
좀 더,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그날까지 이 이야기는 묻어두기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슈나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빠진듯하더니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듯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뭐, 어찌되든 좋아.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설령 살성이라 하더라도 일단 '기어오는 악몽' 만 아니면 되니까..... 그래서, 이제 좀 정신은 들어?"
침대에 나란히 걸터 앉아 바라보는 그녀는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하얀 피부에 붓으로 그린듯 진하고 길게 뻗은 가는 눈썹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붉은 눈동자가 깜빡인다.
지독히도 매혹적이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약간 둥근, 한밤 중 새끼고양이 같은 눈동자이다.
하지만 그 홍련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가늘어지며 얼어붙는 순간.
주변의 것들은 모조리 도륙이 나갈 것이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사이 대화하며 '살인' 이란 금기를 다음 대답할 선택지 중에 하나로 염두해두고 사는 이들이다.
일상인처럼 생각하고, 방심하면 안되겠지.
"선대여."
"아."
문득 정신이 들었다.
너무 아슈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차린 내 눈에 보인 것은 팔짱을 낀체로 못마땅하다는듯 입맛살을 찌푸린체로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너무 티나는거 아냐?"
"...으응?"
무슨 말을 하냐는듯 바보처럼 대답했다.
"너무 티나. 선대는 생각하는게."
"뭐라고?"
"그러니까, 아무리 나라해도 이유없이 칼을 휘두르진 않는다고. 너무 그렇게...나를 이유없이 의심할 필욘 없어."
0.1초, 그녀는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전 일도 있고, 여러가지로 결국은 어쩔 수 없는건 알지만."
그러다가 에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이라 중얼거리며 아슈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듯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사태까지 오게되었으니 상황정리가 필요하겠지?"
"상황정리.....?"
찰나에 보였던 이질적 그녀의 표정에 빼앗긴 정신이 돌아온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정보.
달라진 내 눈빛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였다.
"아무래도 그 중립 중재자에게는 내일 밤에 가야할꺼 같아."
"왜 하필 내일 밤인데?"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그야 밤에만 행동하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녀는 창문 너머로 머나먼 지평선을 응시했다.
"굉장히 예민할거야."
"왜?"
"103년만에 아무리 잔재 세력이라지만 6대 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솔직히 머리가 있고 생각을 하는 존재라면 오늘 마음편히 잠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껄. 줄타기가 시작된거야. 누구 한명이 떨어져야 앞으로 전진하는."
"......."
나는 눈을 꿈뻑였다.
줄타기.
참 지금 상황에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지 여전히 감도 안잡히는 상황의 처지에서 말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살아야 한다, 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일단 눈앞의 살성에 협조하고, 그리고 살성을 통해 중재자를 만나 조언을 구하는 것.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해가 뜨려면 시간도 있으니 우선 나의 시각으로라도 이 사태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줄께."
"알았어."
"그 다음 선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해.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그에 대해 추가로 할 말은 없어."
"그래."
비장한 마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킨다.
아랫배부터 묵직하게 당겨오는게 마치 큰 시험을 치루기 직전, OMR카드를 돌릴때의 기분이다.
"그래서 말인데, 선대여..."
"응. 뭐든 말해."
그런 나의 태도를 보며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야식으론 뭐가있지?"
눈을 세번 깜빡이고 나는 황망히 되물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