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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못하는 로맨스
작가 : 피콕그린
작품등록일 : 201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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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못하는 로맨스 01 - 양자택일의 시작
작성일 : 17-07-17     조회 : 509     추천 : 0     분량 : 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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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자택일의 시작

 

 1월 초.

 홍대 유명 타로집 <양자택일>.

 색색깔로 빛나는 기묘한 조명 아래서 한서우가 심각한 얼굴로 타로카드 세 장을 뽑았다. 새해를 맞아 재미로 타로카드를 보러온 그녀였지만, 막상 카드를 선택할 순간이 되니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양자택일>의 주인 타로박사가 카드 세 장을 뒤집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올해는 좀.. 남자가 보여요?”

 “있네.”

 

 타로박사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둘씩이나.”

 “둘이요?!”

 

 놀란 서우가 세 장의 카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삼각관계에 휘말린적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타로박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놈은 너무 어리고.. 한놈은 너무 들었어.”

 

 타로박사가 타로카드 한 장을 들었다.

 

 “어린 놈이랑 든 놈, 둘 중 하나는...”

 

 하트가 그려진 타로카드가 서우의 이마에 척 달라붙었다.

 

 “반드시 이어진다!!!!!”

 

 재미로 봤던 타로카드가 현실이 될 줄은, 그날의 서우는 정말 몰랐다.

 .

 .

 .

 3월.

 핑크색으로 튜닝한 다마스가 재명고등학교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측면에 <무엇이든 배달해드립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퀵배달 차량이 분명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뒷문을 열자, 거대한 꽃바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그런 꽃집에서 대충 안개꽃으로 버무린 싸구려 꽃바구니가 아닌, 수입산 꽃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최고급 작품이다.

 

 “꽃배달이다!!!!!”

 

 꽃바구니를 든 기사가 학교로 들어서자, 여고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화이트데이. 꽃바구니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 학교에 재학 중인 십대 소녀일 것이다...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꽃바구니가 교무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교무실 앞문이 열리고 택배기사가 등장하자 순간 주위가 술렁거렸다.

 애인이나 남편이 있는 여교사들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기대감을 갖고 기사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한서우 씨 계세요? 한서우 씨!!!!!”

 

 수업시간을 십분 앞두고 책상에 엎드려 단잠에 빠져있던 서우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올해 스물여덟의 서우는 제작년부터 재명고등학교에서 계약직 체육교사로 근무 중이었다.

 최근 과도한 야식으로 살이 좀 붙긴 했지만 천성적으로 얇은 뼈대와 긴 목 덕분에 무용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다.

 탐스러운 긴머리와 새카만 눈동자도 매력적이었지만, 직업 특성상 항상 트레이닝복만 입고 남학생들을 윽박지르고 다니느라, 그녀를 미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설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난건 아니겠지? 손바닥으로 대충 침을 닦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우는 눈앞에 놓인 거대한 꽃바구니를 보고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이건 뭐야? 누가 압수당한건가?

 

 “한서우 씨 맞아요?”

 

 서우는 눈앞에 서있는 택배기사를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 옷을 입은 남자의 가슴팍엔 <무엇이든 배달해드립니다>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네. 전데요..”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제가 왜...”

 “받으시는 분 사인을 받아가야되서요.”

 

 서우가 얼결에 사인을 마치자, 택배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서우는 자신을 향한 수십쌍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동료교사부터 시작해 교무실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학생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 대박!!! 남자친구 완전 로맨틱하다!!!! 언제 결혼하세요?!!!!

 학생들이 비명과 환호성을 질러대며 서우를 주목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서우는 황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겐 현재 약혼자도, 남자친구도, 썸타는 남자도, 인생에 그 어떤 남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서우 선생님?”

 

 이 목소리는...

 서우가 불길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아니나다를까, 올해 반백살의 오교감이 서슬퍼런 눈으로 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달 전 교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한 후, 그녀는 교장 권한대행직을 차지했다. 현재 서우가 가장 잘 보여야 할 상사이기도 했다.

 

 “제가 학교 온 첫날 말씀드렸죠? 공과 사는 구분해달라고! 본인의 연애사를 학교 안으로 끌고 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제 거 아니에요!!!”

 

 서우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뭔가 잘못된게 틀림없어요! 이런거 저한테 보낼 사람 없다구요!!”

 

 너무 없어보였나? 서우는 항변하자마자 약간 후회했다.

 

 “여기 운송장에 똑바로 적혀있네요! 재명고등학교 3학년 1반 담임 한서우 앞!!”

 

 서우는 교감이 내민 운송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서우. 그녀의 이름이 맞았다. 서둘러 보낸 사람을 확인했지만 거기엔 배달업체 이름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다음 주가 한선생 정기 상담이죠? 계약이 한달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할 말이 많을 것 같네요.”

 

 오교감이 싸늘하게 뒤돌아섰다. 계약직인 그녀에게 상사인 오교감의 경고는 사형예고나 다름없었다.

 서우는 울상이 되서 책상을 한가득 차지한 꽃바구니를 노려보았다. 누구야 대체?!! 원치도 않은 이런 유치한 이벤트를 벌인 인간이?!!!

 

 “쌤!! 누가 보낸 거예요?”

 “쌤!! 남자친구랑 결혼하실거예요?”

 “뭐하는 사람이에요? 잘생겼어요?”

 “다들 조용히 안 해?!!”

 

 서우는 들고 있던 장구채로 교단을 두드렸다. 장구채는 그녀가 가장 애용하는 사랑의 매로, 가볍고 얇지만 파괴력이 상당해 학생들을 제압하기 좋았다.

 

 “배달상 실수야. 오늘 수업 끝나고 돌려보낼거니까 다들 이상한 소문같은거 내지 말고 자습이나 해.”

 “선생님 짝사랑하는 남자 아니에요?”

 

 나겸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오오오’ 탄성을 질렀다.

 서우는 맨 뒷자리에 앉은 나겸을 노려보았다. 강나겸은 한 학년에 몇 명씩 있는 ‘교복입은 형’ 중 한 명이다.

 주재원 자녀들이나 유학생 중엔 어정쩡한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일년을 높이거나 낮춰서 한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하곤 했다.

 나겸은 전 외교관의 아들로 올해 스물이었지만 고삼으로 재학 중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공유가 보낸 걸수도 있겠지.”

 

 ‘우우우’ 학생들이 단체로 야유했지만 서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용히들 안 해?! 소리지르려는 순간, 나겸의 옆자리에 앉은 영제와 눈이 마주쳤다.

 윤영제 역시 올해 스물로, 작년에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했다.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성인남자 포스를 물씬 풍기는데다 재명고등학교를 소유한 서온그룹가의 사람이라 서우가 다루기 힘든 학생 중 한명이었다.

 그 윤영제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건가?

 

 ‘정신차려. 고딩한테 쫄면 안 돼!’

 

 서우는 눈을 부릅뜨고 영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가 센 남학생들은 서우 같은 기간제교사를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그런 모습을 오교감에게 들켰다간 그나마 남아있는 점수도 깎일 게 분명했다.

 

 “윤영제! 선생님한테 할 말 있으면 해! 기분나쁘게 쳐다보지 말고!”

 

 서우가 한껏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요?”

 

 영제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쟨 왜 목소리까지 저렇게 어른스러운거야? 자꾸 쫄게..

 

 “그래. 지금.”

 “수업 끝나고 따로 말씀드릴게요.”

 

 영제가 씩 웃었다.

 

 평소보다 수업을 일찍 끝낸 서우는 서둘러 교무실로 돌아왔다. 거대한 꽃바구니는 여전히 그녀의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서우는 꽃바구니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분명 어딘가에 힌트가 있을 것이다. 보낸 사람에 대한...

 그 때 그녀의 시야에 얇은 카드 한 장이 들어왔다. 주먹만한 수국 사이에 꽂혀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카드였다.

 서우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교무실은 한산했고 그녀를 주목하는 교사들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카드를 꺼내 펼쳤다. 결코 원하지 않던 꽃바구니였지만, 낯선 남자의 카드가 설레는 것은 사실이었다.

 

 <9시. 도서관에서 봐요>

 

 서우는 서둘러 카드를 접어 수국 사이에 도로 끼워넣었다. 그러다 꽃줄기 밑에 있는 얇은 상자를 발견했다.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얇은 은줄 목걸이가 반짝이며 드러났다. 팬던트는 달려있지 않았지만 줄 자체만으로도 고급스럽고 예쁜 목걸이였다.

 서우는 만지면 안될 것을 만진 사람처럼 목걸이를 도로 상자에 쑤셔넣고 뚜껑을 덮었다.

 스토컨가?

 서우가 불안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노려보았다.

 스물여덟 평생 처음 겪는 전략적인 고백이다보니, 단순한 설렘보단 불안이 앞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저녁 아홉시의 행선지를 결정해버린 후였다.

 무려 직장으로 이런 거대한 꽃바구니와 값비싼 선물을 보낸 작자가 누구인지, 얼굴은 확인하고 싶었다.

 

 수업은 다섯 시에 끝났지만 서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홉시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다.

 시계가 여덟시 오십분을 가리켰을 때,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재명고등학교 도서관은 별관에 위치했다. 별관은 70년대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재보수를 앞두고 있었고, 정문엔 한달 간 폐쇄한다는 알림판이 걸려있었다.

 나무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걱거렸고 공기 중엔 먼지가 절반이다.

 서우는 콜록콜록대며 도서관 문을 열었다. 창밖은 적당히 어두웠고 반쯤 열린 창문에선 스산한 바람이 풀어왔다.

 

 “누가 창문을 열어둔거야..”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근처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안에, 서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게 꽃바구니를 배달했을 남자가.

 

 진짜 스토커면 어떡하지?

 

 호기심에 이끌려 위험을 감수했지만, 막상 당사자를 맞닥뜨릴 순간이 돼서야 서우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일단 서가에서 책 한권을 꺼내 무기로 삼았다. 책등을 세우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저 앞에, 정말 누군가가 서있었다.

 

 “누구세요..?”

 

 서우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서가 뒤에 가려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키는 훤칠했고 청바지에 코트차림이었다.

 

 “저에요.”

 

 목소리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서우는 좀더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남자의 얼굴이 보일 것 같았다.

 창가에 서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서우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가 들린 후엔 얼어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매일매일 보는 얼굴이 그 앞에 있었다.

 몇 시간 전, 종례 시간에도 마주한 얼굴이었다.

 

 “수업 끝나고 따로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선생님.”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 윤영제였다.

 그가 서우를 응시하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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