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 눈치는 보지 않는다
오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점심은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퍼석퍼석한 비빔밥을 오분만에 목구멍에 쑤셔넣은 서우는, 급식판을 내동댕이치듯 반납대에 올려놓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한선생님 뱃골에 식신 들였어?”
한껏 비꼬는 오교감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무실은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된지 십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식당으로 내려갔고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떻게 포문을 열어야하지? 자리에 앉은 서우가 고민을 시작한 순간 교무실 뒷문이 열렸다.
마치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서우의 자리로 직진하는 윤영제를 보면서, 서우의 머릿속이 백짓장으로 새하얘졌다.
“무슨 밥을 그렇게 빨리 먹어요? 보는 내가 다 체하겠던데.”
영제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숨어서 먹는다고 먹었는데, 그걸 또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거 사오느라 좀 늦었어요.”
영제가 내민 것은 소화제 음료수였다.
“고마워. 아니.. 이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음료수에 손을 뻗던 서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서둘러 손을 뺐다. 영제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어제 그건 무슨 장난이야?”
간신히 차가운 표정관리에 성공한 서우는, 드디어 어젯밤부터 준비해두었던 멘트를 뱉었다. “장난”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서. 장난이어야만 했으니까.
“돈이 그렇게 남아도니? 아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어디 장난을 칠 상대가 없어서 담임선생님한테..”
“장난친적 없는데요.”
영제는 서우가 이렇게 나올거라 예상했다는 듯 여전히 태연했다.
“아무리 제가 돈이 많아도 의미없는 장난에 수백만원이나 쓰진 않아요.”
“수백만원?!!”
자신도 모르게 서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정수기에서 물을 뜨고 있던 교사가 힐끗 이쪽을 돌아보았다.
“목소리 낮춰!”
“전 목소리 낮아요. 선생님이 낮추세요.”
어쩐지 끊임없이 지는 기분이다.
“어떻게 그게 수백만원이나 해..?”
“다이아몬드니까 당연하죠.”
“그게 진짜 다이아몬드란 말야?!!”
“그래서 제가 비싼 달에 태어나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비싼걸 왜 나한테..”
순간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순식간에 교무실이 번잡스러워졌다. 압둘라 태준이 남학생 몇 명을 끌고 교무실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들이!!! 신성한 학교에서 담배를 펴?!!!”
태준이 교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제 화이트데이였잖아요.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하는 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제는 제 할 말을 했다. 우렁차게 울리는 태준의 목소리에 눌릴까, 약간 볼륨을 높여서.
“목소리 낮추라니까?!”
“선생님 안 들리실까봐요. 중요한 대목인데.”
“미치겠네, 정말!!”
“전 대놓고 하는 고백은 너무 촌스러울까봐 일부러 말을 아낀건데. 아무래도 선생님이 헷갈려 하시는 것 같아서요.”
태준에게 얻어맞은 남학생들이 몇 번 비명을 지르고나자, 교무실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영제는 적절한 침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대놓고 말하려구요. 장소가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장소가 중요한건 아니니까.”
“제발 조용히 좀 얘기하라니까...!!”
“한선생님! 윤영제가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태준이 몽둥이를 든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제발 좀 꺼져!!!! 서우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에요!!! 영제랑 상담 중이니까 안 오셔도 돼요!!”
태준이 혼을 내고 있던 남학생들이 이때다 싶어 앞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것들 거기 안 서?!!! 태준이 고함을 내지르며 교무실을 뛰쳐나간 후에야,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넌 눈치보는 법을 모르니?”
“알아요. 근데 이런 상황에서는 눈치보기 싫어요.”
“이런.. 상황?”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하는 상황이요.”
백짓장이었던 머릿속이 아예 진공상태가 됐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영제 앞에서, 서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얘가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
영제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또 다시 교무실 뒷문이 열렸다.
“한서우 선생님!!!”
오교감의 목소리에 서우가 벌떡 일어섰다. 영제가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돌겠네..”
오교감이 빠른 걸음으로 둘에게 다가왔다.
“영제 학생, 무슨 문제 있어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에 서우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뇨. 없는데요. 담임선생님한테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한 선생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오교감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서우를 교무실 밖으로 불러냈다.
“윤영제 학생이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나요?”
“네. 좀..”
“무슨 문제죠?”
“아.. 그게..”
담임한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줘가지구요... 서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웬만큼 큰 문제 아니면, 그냥 모른척 넘어가줘요.”
“네?”
“한선생님. 저희 학교 재단 이름이 어떻게 되죠?”
“서온 재단이죠..”
“거기서 유추되는 어떤 사실이 없나요?”
“아무리 윤영제 학생이 서온그룹 사람이라고 해도 교사에겐 문제가 있는 학생을 선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가 무슨 EBS인줄 알아요? 뉴스에 나올만한 사건 아니면 그냥 넘어가요.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오교감이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계약기간이 끝나가서 다행이네, 중얼거리며.
서우의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정작 가장 중요한건 계약 연장인데 바보같이 어린애 장난질에나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니..
서우가 교무실로 들어왔을 때, 영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표정으로.
그러나 둘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교사들과 볼일이 있는 학생들이 하나 둘 씩 교무실로 들어오면서 한적하던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영제 역시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이어나가는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서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랑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서 봐요.”
“난 안나가.”
서우가 영제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윤영제고 다이아고 서온그룹이고 뭐고, 이젠 다 피곤했다. 어떻게든 몇 주 안에 다시 교감의 눈에 들어 계약 연장을 성사시켜야했다.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정말 기분 별로야. 내가 아무리 덜 떨어진 선생님이라도, 이런 장난질에 낚이긴 싫어.”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목걸이를 재빠르게 영제에게 건넸다.
“도로 가져가. 환불해서 불우이웃이나 돕던지.”
“싫어요.”
“윤영제, 너 진짜...!!”
“또 한 번 그러면 장소건 상황이건 신경쓰지 않고 선생님 목에 그거 걸어줄건데.”
“!!!!”
“그래도 상관없어요?”
“....”
“전 눈치 안봐요.”
“....”
“저녁 아홉시에요. 도서관에서 기다릴게요.”
영제는 교무실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뒷문으로 직진했다. 서우의 손바닥엔 다이아목걸이만 덩그러니 놓였다.
목걸이를 도로 서랍속에 넣으며, 서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직시했다.
나 방금.. 저 머리에 피도 안마른 꼬마한테.. 설렌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