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어른여자
서우는 끝내 도서관으로 나오지 않았다.
영제가 별관을 나섰을 때 시계는 이미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법인데? 영제는 픽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 기사에겐 오늘은 데리러오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두었다.
대신 학교 주차장에 맡겨둔 전동휠에 올라탔다.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싶은 날에 영제가 애용하는 초간편 이동수간이었다.
영제의 집인 한남동 저택까진 학교에서 삼십분이 걸린다. 영제는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매봉산공원으로 향했다.
한적한 산책로를 전동휠로 달리면서, 영제는 담임에 대해 생각했다. 다이아목걸이를 자신의 손에 쥐어주며 불우이웃이나 도우라고 차갑게 말하던 얼굴도 떠올랐다.
그 때 그녀는 정말 어른여자 같았다.
어른여자.
모든 것은 그 네 글자에서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주일 전. 영제와 나겸은 별관 옥상에서 짧은 담배 타임을 누리고 있었다. 나겸은 얼마전부터 만나기 시작한 대학생 여자친구 자랑으로 바빴다.
“스물셋?”
“응. 대학교 졸업반. 죽이지?”
영제는 나겸이 건넨 핸드폰 사진을 슬쩍 보고는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만 먹었지 애처럼 생겼네. 널 몇 살로 아는데?”
“나이는 안 속였어. 스물. 물론 고등학생이란 얘긴 안했지. 얘기하면 기절할걸?”
“어디서 만났는데?”
“동네 도서관. 꼬시는데 일주일도 안걸렸어.”
“대학생이 뭐라고.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자기가 특별한 여자라고 상상하게 만들어주면 돼.”
“잘났다.”
나겸이 운동화로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넌 여자 안 만나? 깨진지 꽤 됐잖아.”
영제는 작년에 신입생 얼짱 태린과 사귀다 한달도 못가 깨졌다. 태린의 병적인 관종력이 이유였다.
태린은 데이트를 분 단위로 인스타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관심종자였고 댓글과 좋아요에 목숨을 걸었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그런 피곤한 여자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영제는 얼마 못가 이별을 고했고, 태린은 인스타에 수없이 많은 눈물셀카를 업데이트 하며 기행을 이어나갔다.
그 때 영제는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아무리 예쁘더라도 정신세계가 맞지 않는 여자는 만나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징글징글하게 전화온다. 나도 연상이나 만나볼까. 같은 학교 학생은 지겨워.”
“그럼 같은 학교 선생은 어때?”
나겸이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영제는 나겸의 시선을 따라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왠 여자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담임인 한서우가.
“선생?”
“응. 제일 쉽게 만날 수 있는.... 어른 여자?”
“어른 여자..”
서우가 뒷문을 빠져나가려는 남학생에게 하이킥을 날렸다. 아마도 종례를 빼먹고 도망치는 학생을 잡으러 온 듯 했다. 담임을.. 어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너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미 경험이 풍부하시잖아?”
“쉬울거 같은데.”
영제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학생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도로 학교 건물로 걸어오는 서우는 어른여자보단 좀 노는 동네 누나처럼 보였다.
“내기할래?”
“무슨 내기?”
“한달 안에 담임 꼬시면, 내가 반년 전에 예약한 EPL 티켓 줄게. 8월에 첼시 홈구장. 지금 예매 다 끝난거 알지? 암표도 못구해.”
첼시의 오랜 팬인 영제로서는 귀가 솔깃했다.
“할 수 있겠냐?”
나겸의 말이 영제를 자극했다.
“재밌겠네.”
웬만해선 크게 화도 내지 않고 허당처럼 매일 헤헤 웃기만 하는 저 여자가.. 우리가 자길 두고 내기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산책로를 따라 전동휠을 타던 영제는 저 멀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서우가 헤드폰을 낀채 조깅 중이었다.
‘영제 너도 한남동 사는구나? 나돈데.’
몇주 전에 있었던 첫 번째 진로 상담에서 서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같은 동네라니. 영제에겐 또 하나의 기회였다.
영제는 서우에게 아는 척을 하는 대신 몰래 뒤로 따라붙었다. 시선 없는 곳에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했다.
서우는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사람처럼 열심히 뛰고 있었다. 헤드폰에선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아무래도 뽕짝 같았다.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오~ 아무래도 사랑의 빠떼리가 다 됐나봐요오~”
와, 노래 진짜 못부른다..
영제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계속 서우의 뒤로 따라붙었다. 뒤에서 본 서우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풍성한 긴머리를 하나로 높이 틀어올려 묵었는데 그 아래 쭉 뻗은 목선도 길고 예뻤다.
영제는 매일 학교에서 보는 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겸은 그녀가 촌스럽게 생겼다고 깎아내렸지만 영제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물론 어딘가 촌스러운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체육교사의 특성상 맨날 입고 다니는 트레이닝복 때문일 것이다.
담임을 꼬셔보라는 나겸의 도발에 영제가 쉽게 응했던 것도 사실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눈웃음이.. 눈에 띄게 얼굴도 작고.. 사실 저 정도면 미인 아닌가?
숨을 헐떡이며 뽕짝 가사를 읊던 서우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서서 헤드폰을 벗었다.
영제는 재빠르게 나무 뒤로 숨어들었다. 이런데서 전동휠은 들킬 가능성이 컸다.
서우는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한참이나 발신자번호를 들여다보았다. 누구길래 저렇게 안받는거지?
“왜.”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다. 처음 듣는 담임의 목소리 톤.
“생일이 뭐 별거라구. 모이긴 왜 모여? 불편하니까 그런 자리 만들지마.”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낸 서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담임에게 저런 면도 있었던가? 저렇게 차가운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학교에서 하루에 몇 번씩이나 보던 눈웃음도, 양쪽 뺨에 움푹 패이는 인디언 보조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서글픔과 체념이 뒤섞인 서우의 표정은.. 영제가 처음 보는 ‘어른여자’의 얼굴이었다.
서우는 코를 한 번 훌쩍이더니 헤드폰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요란한 뽕짝과 차마 못들어줄 노랫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영제는 더 이상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대신 나무 뒤에 서서 긴머리를 찰랑이며 뛰어가는 담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영제는 주차장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갔다. 서울 안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이 거대한 저택부지의 중심엔 역시 거대한 석조 분수대가 자리잡고 있다.
그 분수대 앞으로 처음 보는 차가 서있었다. 언젠가 영제가 타보고 싶은 고가의 스포츠카였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온 거지? 영제는 흑표범처럼 새카만 스포츠카를 보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거실로 들어서자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영제를 돌아보았다.
“윤영제, 오랜만이다.”
윤유건. 영제의 고종사촌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큰아버지의 둘째아들이다. 유건이 소파에서 일어나 영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많이 컸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정말 꼬마였는데.”
“오랜만이에요, 형.”
영제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유건과 어색하게 포옹했다.
영제는 어려서부터 유건을 싫어했다.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이 남자는 항상 영제를 남자가 아닌 꼬마로 느끼게 했다.
영제의 기억 속에서, 유건은 항상 어른남자였다. 위압적인 눈빛이나 목소리. 노친네같은 쓰리피스 수트도 그가 입으면 클래식한 귀족처럼 잘 어울렸다.
올해 마흔. 형보단 아저씨란 말이 훨씬 어울리는 나이였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갖춰입은 이 남자에겐 아저씨라는 퀴퀴묵은 단어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중국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한국 들어온지 얼마 안 됐어.”
“그런데 저희 집엔 어쩐 일로..”
“얘기 안 하셨어요?”
유건이 영제의 부친인 윤회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허허, 그러게. 내가 요즘 바빠서 깜빡했네. 이 중요한 얘기를.”
“무슨 얘기?”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왜?”
“다음 주부터 내가 재명고등학교 교장이거든.”
뭐어어어어??!!!!!!
비명에 가까운 영제의 목소리가 대저택에 가득 울렸다. 이 남자가 우리학교 교장이라고?!!!
“자세한 얘기는 니 방에 가서 하자. 작은아버지, 저희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러게. 난 화상 미팅이 있어서 그만 들어가봐야겠다.”
윤회장 또한 나이차이 얼마 나지 않는 이 거구의 조카가 그다지 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영제의 방으로 올라온 유건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에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운동을 얼마나 하는거야?
“고삼이면 바쁘겠네?”
“별로요. 1학기 수시로 끝낼거예요.”
“공부 잘한다는 얘긴 들었어. 의외다. 미국에서 사고치고 다녔다길래 공부엔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관심은 없는데 머리가 좋아서요.”
유건이 소리내서 웃으며 영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귀엽네, 중얼거리며. 에이씨. 영제가 유건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애 취급은 딱 질색이다.
“근데.. 어떻게 된거예요? 갑자기 교장이라니..”
“내후년에 서온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할 생각이야.”
유건은 대학을 졸업한 후 쭉 서온재단에서 일했다.
서온재단은 재명 초중고등학교와 지방의 여러 사립학교를 거느린 대형 사학재단으로, 학교 외에도 여러 스포츠 후원재단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교장 취임 소식이 황당하긴 했지만, 따지고보면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건은 나름 사학재단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으니까.
“그전에 경력도 더 쌓을 겸 필드에서 제대로 뛰어보고 싶어서. 재명고등학교는 우리 재단의 꽃이잖아.”
“그게 다예요?”
“왜. 다른 꿍꿍이가 더 있을거 같아?”
유건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영제는 오래전부터 그 미소도 싫었다. 네 속 쯤이야 빤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오만한 미소.
“다른 꿍꿍이도 더 있긴 해.”
유건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영제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턱 얹었다.
“아무튼, 다음주부턴 깍듯하게 대해야해. 사람들 앞에선 형 말고 교장선생님으로 부르고.”
“그쯤이야 얘기 안 해도 알아요.”
“짜식.. 까칠하긴. 담임은? 마음에 들어?”
“네.. 뭐.. 그럭저럭.”
“내가 신경 좀 써줄게. 너네 반 담임한테.”
“안 그래도 돼요. 불편해.”
영제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유건이 형이 담임에게 신경을 쓴다..? 생각만 해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단순한 내기였을뿐인데.. 어째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