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관종 여신 등판
미세먼지와 황사가 극성을 부리는 요즘 체육수업은 대부분 실내체육관에서 진행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 고삼의 체육시간은 자율학습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장기전인 수험공부엔 체력과 스트레스 해소가 중요하다는 전 교장의 판단에 따라, 서우는 일주일에 한 번 체육관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진행했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서우가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회색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영제가 눈에 띄었다.
잘생긴 녀석이 입으니 체육복도 스타일리쉬하구만... 서우는 애써 영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둘둘씩 짝지어서 윗몸일으키기 20회씩 실시!”
“선생님, 저 짝 없는데요.”
영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겸인?”
“점심 먹고 배 아프다고 양호실 갔어요.”
“다른 애 없어?”
“없어요. 저만 남은거 같은데요.”
영제가 매트 위에 누워서 씩 웃었다. 서우는 한숨을 쉬며 영제 앞에 앉아 무릎을 안았다.
곧 체력 약한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요란한 비명소리 속에서, 영제의 낮은 목소리가 서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대답은 언제 해주실 거예요?”
“무슨 대답..”
“남자가 여자한테 고백을 했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셔야죠.”
“예의 같은 소리 한다.”
“거기다 비싼 선물까지 받았으면서.”
“내가 돌려준다고 했는데 니가 안 받았잖아!!”
서우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서우는 몇 번이고 영제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려했지만, 그럴 때마다 영제는 서우의 말을 무시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생님, 저 보세요.”
서우는 피하지 않고 영제의 눈을 응시했다. 영제는 서우에게 좀더 가깝게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까이서 영제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얘.. 눈동자 색깔이 원래 이렇게 옅었나?
“좋아해요.”
서우의 얼굴 가까이 다가온 영제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남자애 입술 색깔이.. 이렇게 빨갛지?
“좋아해요.”
왜 남자애한테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거지..?
“좋아해요, 선생님.”
왜.. 나보다 여덟살이나 어린 주제에 이렇게 가슴떨리게 고백하는거냐고...!!!
“그러니까 대답해줘요, 빨리.”
스물!!!!! 주변에서 윗몸일으키기를 끝낸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영제 또한 마지막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영제의 얼굴이 다가오는 순간, 서우는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영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박아버렸다.
“악!!!!!”
생각지도 못했던 충돌에 영제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이게 내 대답이다!!! 됐니?”
영제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서우를 쳐다보았지만, 서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자, 이제 다들 앞을 보고 앉아. 가부좌 틀고!! 목부터 스트레칭 들어갈거니까 조용히 해!!”
학생들 앞으로 나온 서우가 스트레칭용 음악을 틀고 가부좌를 틀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그녀는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영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굴욕의 체육시간을 끝낸 영제는 곧장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선생은 없고 나란히 놓인 침대 중 한칸만 커튼이 쳐져있었다. 커튼을 열자 나겸이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고 있었다.
“성공했냐?”
영제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냐. 나한테 수업 빠지라고 부탁까지 하더니...”
“얻어맞았다.”
영제가 손가락으로 시뻘겋게 부은 이마를 가리켰다. 나겸은 영제의 이마를 보자마자 푸하하하 웃으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체육시간 전, 영제는 나겸에게 배탈을 핑계로 체육시간을 빠져달라고 부탁했다.
짝이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서우를 곁에 두고 어떻게든 고백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고백은 성공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 여리여리해보이는 여선생의 박치기가 이렇게 매울 줄이야...
“꼬셔오랬더니 맞고 들어왔냐?”
“조용히 해라.”
“만만치 않네. 역시 그 정도 나이 여자한텐 우리가 꼬맹이로밖에 안보이나봐. 아무리 윤영제 너라도.”
“야, 여덟살이 뭐 대수라고!!”
나겸의 도발에 영제가 발끈했다. 보자기로 감싼 얼음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영제가 풀죽은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잘생기고 어리고 돈 많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또 뭐가 필요한거지..”
“윤영제, 방금 그 멘트 진짜 주먹 날라간다.”
“내가 너무 준비도 안하고 덤빈거 같다. 자료조사가 더 필요해. 담임이 정확히 어디 사는지, 어느 대학 나왔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야겠어.”
“오.. 본격적인데? 너 진짜 마음 생긴거 아냐?”
나겸이 휘파람을 불었다. 영제는 매봉산공원에서 보았던 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만가지 사연이란 사연은 다 짊어진 것 같았던 서글펐던 얼굴.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더 알고 싶어졌다.
“누구한테 마음이 생겨?”
영제와 나겸이 동시에 ‘헉’ 하며 돌아보았다. 영제의 전 여자친구 태린이 양호실 문 앞에 서있었다.
“누구 얘기하는거야? 여자?”
“니가 왜 여깄어?”
“오빠 여자 생겼어? 설마 우리 학교야?”
태린이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2학년 얼짱, 이른바 관종여신 박태린.
천성적으로 관심에 목마른 그녀는 틈만 나면 트러블을 일으켜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인형같은 외모와 철철 넘치는 애교로 지역구 팬클럽까지 소유한 그녀지만 잦은 관종짓으로 몇 달 전 영제에게 실연당했다.
그녀는 실연당한 후에도 잊을만하면 영제를 찾아와 습관처럼 매달리곤 했다. 영제가 봤을 땐 진심으로 자신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연당한 비운의 여자라는 컨셉을 즐기는 듯 했다.
“너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남자 쫓아다녀도 되는거야?”
태린은 다음 달부터 케이블TV에서 하는 오디션프로그램을 준비 중이었다.
<승리의 아이돌>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아이돌로 데뷔하고 싶은 여고생들이 주인공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스타가 됐다고 전남자친구 버릴 여자로 보여?”
“정확히 말하면 버림받은건 니 쪽인데..”
“누군데? 오빠가 마음 생긴 여자가 누군데?!!!”
“한서우.”
영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순간 나겸이 마시던 바나나우유를 뱉었다. 이 새끼가 정말 미쳤나..?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한서우? 한서우가 누구야? 2학년이야? 아니면 선배야? 혹시 신입생? 잠깐만.. 한서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가뜩이나 큰 태린의 눈동자가 왕방울처럼 커졌다.
“설마 체육 한서우 얘기하는거야??!!”
“응.”
영제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호실에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이제 난 몰라, 나겸이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푸.. 푸하하하하하!!!!!!”
태린이 허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영제와 나겸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오빠 진짜 재밌다.. 한서우.. 그럴싸한데?”
“진짠데.”
“네, 네. 그러시겠죠. 감히 용산구 얼짱 박태린을 차고 만나는 여자가 늙다리 한서우시겠죠. 네, 네.”
“늙다리는 좀 심했다.”
“안그래도 지금 학교가 한서우 때문에 시끄럽던데.”
“왜? 왜 시끄러운데?”
“방금 3학년 김대학 선배가 여직원화장실에서 한서우 옷갈아입는거 몰카 찍다가 딱 걸렸대.”
영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뭐..?”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는걸 오교감이 보고 둘 다 교장실로 오라고 했나봐. 지금 교감이 교장 대행이잖아.”
영제는 얼음주머니를 쓰레기통으로 내던지고 양호실을 박차고 나갔다.
같이 가!! 나겸이 영제의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흥분한 영제가 사고를 치지 않게 곁에서 말려야했다.
“오빠!!! 오빠 어디가??!!!”
양호실에 홀로 남겨진 태린이 영제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가 있지..?”
태린은 억지로 눈물을 쥐어짰지만 한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교복치마에서 안약을 꺼내 눈동자에 두어방울 떨어뜨렸다. 그리고 익숙하게 그 모습을 셀카로 몇 장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했다.
“받아주는 이가 없는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구슬픈 멘트와 함께. 역시 관종 여신다운 행동력이다.
엉제와 나겸은 단숨에 교장실까지 뛰어올라갔다. 육중한 나무문 뒤에서 교장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거예요, 없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교장실로 뛰어들어가려는 영제를, 나겸이 막았다. 영제는 불길한 눈으로 교장실 문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예감이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