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키다리 아저씨
서우가 잘렸다는 소식을 들은 윤나는 자신의 일처럼 화를 냈다.
“썩을 것들!!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이제와서 나가라고? 이런 날엔 술이나 왕창 먹고 세상 구석구석에 토나 실컷 쏟아줘야돼!!!!”
그것이 윤나가 세상에 복수하는 다소 주접스러운 방식이었다.
윤나는 서우를 데리고 이태원의 맥주집으로 향했다. 메뉴에 오천원만 추가하면 맥주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그녀들의 아지트였다.
두 사람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서우에겐 즐길 여력이 없었다.
“걱정하지마. 다른 학교 지원하면 금방 붙을거야. 너 학생들한테 평판 좋았잖아.”
“그럴까..?”
“솔직히 재명고등학교 간판만 삐까번쩍하지 완전 별로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와서 어른 무서운줄 모르는 싸가지들만 득실득실 거리고...”
어른.. 서우는 윤나의 말을 곱씹었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이는 벌써 스물여덟이었지만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었다. 불안정한 직장은 그나마 잘려버렸고, 언제 월세가 오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집도 자기 것이 아니었으며 제대로 된 애인도 없었다.
갑자기 영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그냥 여자’로 부르던 그 패기넘치던 눈빛.
그 녀석은 도대체 나한테서 뭘 봤을까?
“윤나, 너.. 연하 만나본 적 있니?”
“가볍겐 몇 번 만나봤지. 왜?”
“몇 살 연하였어?”
“한 살이었나?”
“그건 연하도 아니야. 한 살이라봤자 따지고보면 몇 개월 차이잖아. 한두 살 말고, 막.. 여섯 살.. 여덟살.. 이렇게 차이나는 연하..”
“어우, 그런 머리에 피도 안마른 꼬마를 어떻게 만나? 몇 개월 전엔 교복 입고 댕겼을거 아냐?”
“그건 그렇지..”
“결혼도 안했는데 육아부터 할 일 있니? 연하도 연하 나름이지.”
윤나의 말을 듣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걸까? 설마 나에게도 영화에서나 볼법한 연하 꽃미남과의 사랑이 찾아올거라고?
정신차려, 한서우!!! 걘 학생이고, 넌 선생이야!!!!
서우는 500cc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윤나의 말이 옳았다. 이런 날엔 잔뜩 취해 세상 곳곳에 빈대떡이나 부치는게 상책이다.
맞은편에 앉은 윤나의 얼굴에 두 개로 보일 때쯤 서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선생님?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전 더 이상 당신의 선생이 아닙니다...”
잔뜩 취한 서우의 혀가 꼬였다.
-술 마셨어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누구였더라?
-어디에요? 데리러갈게요.
“누군데 절 데리러 오겠다고 하시는데요...”
“누군데? 남자야?”
서우 못지않게 취한 윤나가 서우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전 한서우 친구 되는데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지?”
-계신 곳 주소만 주세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여기가.. 이태원인데요.. 이태원 아주 중심가는 아니고 약간 보광동 쪽..”
윤나는 횡설수설하면서도 상호명을 또박또박 얘기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끊겼다.
“이 발칙한 기집애. 너 남자 있었니?”
“무슨 소리야? 나한테 남자가 어딨다고... 너, 대학 다닐 때부터 내가 남자 사귀는거 봤어?”
“못봤지.. 근데 그건 남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니가 철벽을 쳐서잖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 인기 많았어.”
“인기는 무슨..”
“모른 척 하기는!! 아시아올림픽 리듬체조 은메달리스트 한서우!! 남자들이 널 얼마나 여신으로 생각했는데?”
“여신은 개뿔.. 다 지나간 일이야.”
서우가 씁쓸한 얼굴로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아시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그것이 서우의 마지막 커리어다. 주니어 시절부터 리듬체조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유망주 한서우는 열여덟에 받은 은메달을 마지막으로 리듬체조계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명문대 체대까진 학창시절의 눈부신 커리어로 손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전액 장학생으로. 그러나 정작 대학에 와선 어떤 국내외 경기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연습에서 다친 발목 부상이 이유였다. 결국 대학시절 내내 서우는 그 무엇도 아닌 희미한 나날을 보냈고, 졸업을 앞두고 체육교사로 진로방향을 틀어야했다.
대학시절 내내 슬럼프에 빠져 방황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할 수 없었고 다가오는 남자들에겐 모두 철벽을 쳤다. 그것이 서우가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모쏠로 남은 이유였다.
“서우야, 너한테 전화했던 연하남.. 혹시 어깨깡패니?”
“좀 그런 편이긴 해.”
“얼굴도 무섭도록 잘생겼고?”
“뭐..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근데 왜?”
“혹시.. 쟤니?”
서우는 윤나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펍 입구로 영제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찾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영제는 그 모습을 정확하게 캐치했고, 서우가 있는 테이블로 빠르게 직진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찾았다.”
영제가 씩 웃으며 테이블 밑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서우와 눈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윤영제라고 합니다.”
그리곤 윤나를 향해 시원스럽게 인사를 했다.
“전화하셨던 분..?”
“네.”
“초면에 실례지만 혹시 나이가..”
“스물입니다.”
“꺄아아아악!!!!!”
윤나가 까마귀 지저귐 같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아까 연하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냥 물어본게 아니었구나!!! 진짜 연하남을 만나고 있던 거였어!!! 그것도 여덟살이나 연하를!!!”
“진짜에요? 선생님이 그렇게 물어봤어요? 연하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요?”
사색이 된 윤나에 비해, 영제의 표정은 너무도 해맑았다.
“방금.. 서우를 뭐라고 부른 거예요..? 선생님..?”
“네, 선생님이요.”
“그러니까.. 너희 둘..?”
윤나가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서우를 쳐다보았다.
“착각하지마!!!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니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 시간에 술집까지 데리러 와? 너 화이트데이에 받은 꽃다발도 얘가 준거지?!!!”
“선물 얘긴 안 했어요? 제가 무지 비싼 선물도 줬는데.”
“요 요망한 기집애를 보게?!!! 세상에 속일 사람이 없어서 팔년지기 동거인을 속여?!!!”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 거짓말 한 거 아니에요.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닌거 맞아요. 아직은요.”
영제가 ‘아직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전 복학생이라 미성년자도 아니고, 선생님도 오늘 잘린 덕에 사제지간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충고나 훈계는.. 미리 사절할게요.”
영제가 싹싹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영제의 말이 끝나자 윤나가 맥주 한 잔을 원샷했다. 그리고 새 맥주 세 잔을 주문했다.
“너, 쫌 맘에 든다?”
영제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윤나의 엄지를 본 영제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는 기쁨에서였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서우가 돌연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을 급하게 마신 탓인지 구토가 올라왔다.
“같이 가줄게요.”
“됐어. 넌 한모금도 입에 대지마. 고등학생이 무슨 술이야?!”
“미성년자 아니니까 괜찮아요.”
“미성년자 아니어도 고등학생이잖아!!!”
“융통성 좀 발휘해봐요. 아무도 저 고등학생으로 안 봐요.”
과연 그랬다. 어떤 종업원도 영제에게 민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검은색 얇은 니트 가디건에 편안한 배기바지를 입은 영제는, 누가봐도 근사한 성인남자로만 보였다.
“...갔다와서 보자.”
더 이상 구토를 참을 수 없었던 서우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사세요?”
“응. 넌 진짜 고등학생 맞니?”
“일년도 안 남았어요.”
“와.. 살다살다 교복 입은 애가 내 친구한테 들이대는 꼴도 다 보고... 역시 인생은 재미져.”
윤나가 감탄을 하며 맥주잔을 비웠다.
“한서우 인생에도 드디어 남자가 입주하는구나..”
“선생님, 정말 남자 없었어요?”
“남자는 있었지. 본인이 간택을 안하셔서 그렇지. 아, 그 사람도 남자로 칠 수 있으려나..?”
“누구요?”
“말해도 되려나...”
윤나가 여자화장실 입구를 살폈다. 서우는 웬만해선 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술도 올랐겠다, 친구를 쫓아다니는 귀여운 남고생도 눈앞에 있겠다, 윤나의 입이 근질근질해졌다.
“서우한테.. 키다리 아저씨가 있거든.”
“무슨 아저씨요?”
“키다리 아저씨. 책 몰라?”
“알긴 아는데...”
“서우가.. 가정환경이 좀 복잡해. 재능은 있는데 환경이 뒷받침해주질 못해서, 어려서부터 서온 재단의 후원을 받았어.”
교장실 앞에서 엿들었던 이야기다.
“그 재단에서.. 서우를 꾸준히 챙겨주던 남자가 있었어.”
“남자요?”
“응. 이름도, 얼굴도 몰라. 나이도 모르고. 남자인 것만 알아. 그 사람이.. 서우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대회에 나가면 꽃다발이나 인형을 보내줬었어. 서우한테 큰 힘이 되줬지.”
“엄청.. 오래됐네요?”
“응. 대학 들어가고 나서부턴 생일마다 케이크도 보내줬고. 여러모로 서우 인생을 많이 신경 써준 사람이야. 한서우의.. 키다리 아저씨.”
그 때 서우가 잔뜩 진이 빠진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내가 이 얘기 한 건 비밀이다? 난 솔직히 너무 어린 남자는 남자친구로 별로라고 생각해. 니가 그 고정관념을 한 번 깨봐.”
윤나가 씩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영제는 그녀의 잔에 짠을 하고, 서우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키다리 아저씨라고..? 어감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디 나이 든 노땅이 징그럽게시리... 영제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남은 맥주를 마저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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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오 교감은 의문의 남자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서온재단의 비서라고 소개했다.
오교감의 가슴이 뛰었다. 설마 이건.. 나를 교장대행이 아닌 교장으로 인정한다는 소식?!!
그리고 의문의 남자가 전한 소식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유불문하고, 한서우 교사와 계약 연장을 부탁드립니다. 저희 재단 차원에서 잃기 아까운 인재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