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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못하는 로맨스
작가 : 피콕그린
작품등록일 : 201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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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든 남자
작성일 : 17-07-18     조회 : 316     추천 : 0     분량 : 4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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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든 남자

 

 처음 교사로 취직했을 때 서우에겐 여러 가지 꿈이 있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연애고민을 털어놓는 여고생들. 말썽을 부리고 깨진 후에 죄송하다고 훌쩍이는 남고생들. 동료 교사들과의 퇴근 후 시원한 한잔. 체육대회나 축제에서 학생들과 어우러진 즐거운 시간 등등..

 그러나 그 중에, 이십대 남고생과의 퇴근 후 맥주 한 잔은 없었다. 결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선생님 집이 여기시구나.”

 

 영제가 서우와 윤나가 사는 연립주택을 올려다보았다. 허름하기 짝이없는 연립주택의 3층집이 그녀들이 사는 집이라고 했다.

 

 “어디 사는지 알았으니까 이제 막 집앞으로 찾아오구 그럴거니?”

 “당연하죠.”

 “너무 귀엽다, 너!!”

 

 윤나가 까르르 웃어대며 영제의 등짝을 내리쳤다. 결혼을 앞둔 삼십대 초반 커플들만 만나오다가 이렇게 막 사랑에 빠진 스무살 총각을 만나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리프레쉬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교사와 제자라는 거대한 진입장벽이 남아있긴 했지만 뭐, 따지고보면 어차피 남일이 아닌가? 윤나 입장에서는 그저 아침드라마 감상하듯 둘의 관계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난 니네 찬성!!!!”

 “빨리 안 들어가?”

 “데이트 하다 들어와. 외박은 좀 곤란하다, 서우야. 교복 벗을 때까진 참아야지.”

 “미친거 아냐?!!!”

 

 서우가 소리를 꽥 지르자 윤나가 깔깔대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서우는 묵직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계단에 앉았다. 너무 빨리 마신 탓인지 머리가 아팠다.

 

 “괜찮아요? 약이라도 사올까요?”

 “아냐. 됐어.”

 “그럼 바람이나 좀 쐬다 들어가요. 옆에 있어줄게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다.. 서우는 영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영제와 눈을 마주치면 심란한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릴 것 같았다.

 

 “선생님 가족분들은 지방에 사세요?”

 “뭐?”

 

 서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윤나 누나가 스무살부터 선생님이랑 자취했다고 하시길래요.”

 “윤나 누나?”

 “그럼 뭐라고 불러요?”

 “...됐다.”

 “고향이 어디에요?”

 “서울이야.”

 “정말요? 그럼.. 왜 나와 사는거예요?”

 “난 가족이 없어.”

 

 서우가 담담하게 고백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황한 영제가 되물었다.

 

 “가족이 없다구요?”

 “고아원에서 자랐거든. 그러니까 가족이나 과거 얘기는 그만하자.”

 

 담임이 고아였다고..?

 

 “내가 진짜 취했나보다.. 너한테 이런 얘기도 다 하고...”

 

 서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영제가 따라 일어서려는 순간, 서우가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단단한 영제의 팔이 재빠르게 서우의 허리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우는 서둘러 영제를 밀쳐내고 똑바로 섰다. 더 이상 영제와 함께 있었다간 무슨 사고를 치게 될지 몰랐다.

 

 “선생님 허리가 한줌이네요.”

 

 영제는 그닥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로 방금 안았던 서우의 허리를 가늠해보았다.

 

 “영제야.. 진짜 내가 좋아?”

 

 갑작스러운 서우의 진지한 질문에, 영제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좋아하냐고? 영제 스스로에게도 진지하게 던진 적 없는 질문이었다.

 어쩌다가 나겸의 내기에 응해 장난으로 시작한 고백이었지만, 이제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공원에서 우연히 서우와 마주쳤던 그날, 영제도 몰랐던 진심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버린 듯했다.

 

 “네. 좋아해요.”

 “...그러지마.”

 “....”

 “난 인생에 연애같은거 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야..”

 “....”

 “얼마 후면 학교도 그만두게 되겠지. 그럼 다신 보지말자. 이런건.. 인생에 잠깐 스쳐지나가는 바람같은거야.”

 

 서우는 굳은 표정의 영제를 뒤에 두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잔뜩 외롭고 쓸쓸해보이는 뒷모습을 하고서.

 

 “싫은데요.”

 

 서우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바람인지 아닌진 제가 결정해요.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제 마음까지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영제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장난도, 내기도 모두 다 집어치우고, 그녀를 진심으로 열렬히 좋아해보기로.

 

 집으로 돌아온 영제는 침대에 누워 한서우에 대한 정보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았다.

 서울의 고아원 출신. 어린 시절부터 리듬체조에 재능이 있어서 서온재단의 후원을 받았고 그녀를 특별히 후원하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가 있다.

 핸드폰으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자, 거의 십년전이긴 해도 그녀에 관련된 기사들이 꽤나 많았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갖가지 리듬체조 동작을 펼치는 어린 시절의 서우는 다른 사람 같았다.

 늘 평범해보였던 체육복 차림의 담임에게 이런 화려한 과거가 있었다니.. 갑자기 그녀가 먼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체조경기장에서 리본 경기를 펼치는 고등학생 서우의 사진을 보던 영제는, 문득 이상한 데자뷰에 사로잡혔다.

 

 ‘이상하다.. 이 광경이.. 왜 낯설지가 않을까..? 마치 어디선가 본 모습처럼..’

 

 서우가 열여덟 살 때 그는 고작 열살이었다. 그렇게 따져보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이차이가 확 실감났다. 영제는 서가에서 초등학생 때 찍은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찾았다.

 열 살쯤 되는 나이에 찍은 사진들을 찾아보던 영제는, 드디어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추억의 사진을 발견했다.

 언젠가 부모님과 사촌들과 함께 관람하러 갔던 체조 갈라쇼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경기장 무대를 배경으로 온 가족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영제 뒤로 체조연기를 펼치고 있는 서우가 보였다.

 십년전 함께 찍은 사진이라니. 담임이 이 사진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영제는 사진을 챙기려다 말았다. 서우에게 이 사진을 보여줘봤자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봐봐!! 나이차이가 이렇게 무서운거야!!

 빽빽대는 서우를 상상하던 영제는 픽 웃어버렸다.

 어쩌면 서우와 자신이 진짜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십년전에 함께 찍힌 사진이 남아있다니.

 그 때 영제는 사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을 발견했다. 얼굴이 반쯤 잘리듯 찍힌 남자는 분명 영제의 사촌 형, 윤유건이었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영제와 유건은 사촌지간이었고, 둘은 어려서부터 서온재단에서 후원하는 스포츠 경기들을 종종 보러갔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사진 속 유건이 거슬리는걸까?

 영제는 유건이 나온 쪽을 보이지 않도록 접어버렸다. 유치한 행동이었지만, 마치 둘 사이에 끼어드는 듯한 유건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벽 내내 술병에 시달리던 서우는 밤새 헬쓱해진 상태로 출근했다.

 학교고 뭐고 하루종일 침대에 나자빠져 자고 싶었지만, 이대로 학교를 등진다면 오교감에게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한선생님, 저 좀 봐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교무실 문이 열리더니 오교감이 서우를 호출했다. 아침부터 또 무슨 독설을 퍼부으려고...

 잔뜩 울상이 돼서 교장실로 간 서우는, 뜻밖의 소식에 입을 떡 벌렸다.

 

 “계약을 연장하신다구요?!”

 “들으신 대롭니다.”

 

 학교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은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계약 연장이라니?! 오교감은 어딘가 한풀 꺾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학교에 지원하는 행동은 삼가주세요. 물론 재명고등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으시다면 말이죠.”

 “당연히.. 당연히 다니고 싶죠!! 정말 감사합니다 교감선생님!!!!”

 

 서우가 연신 고개를 구십도로 숙였다. 밤새 오교감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당분간 그녀의 직장이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신나서 나가려는 서우를 오교감이 붙들어세웠다.

 

 “네!!!”

 “혹시.. 서온재단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나요?”

 “서온재단에요? 선수 시절에야 몇분 알았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분은 안계세요. 그건 왜 물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물어봤어요. 나가봐요.”

 

 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교장실을 나섰다.

 오교감은 어제 통화했던 남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 저희 통화는 개인적인 비밀로 묻어두시죠. 한서우 교사의 계약 연장에 외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시간.

 재명고등학교 주차장으로 짙은 푸른색 세단이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흠 잡을 데 없는 쓰리버튼 수트를 입고 있었다.

 유건은 재명고등학교를 올려다보았다. 당분간 그가 일하게 될 5층짜리 벽돌건물을.

 그는 학교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십대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그녀였다.

 

 한서우.

 

 네가 과연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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