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교장같지 않은 교장
“재명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 즉시 대강당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재명고등학교 재학생 여러분은 지금 즉시 대강당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온 것은 아침 조회가 끝날 무렵이었다. 무슨 일이지?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아는 바가 없었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일순간에 대강당으로 향하자 학교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영제는 소란스러운 틈을 타 서우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요?”
“몰라.”
“하긴, 선생님은 이제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된 것 같다? 그리고 나, 학교 다시 다니게 됐어.”
영제가 우뚝 멈춰섰다.
“어제 잘렸다면서요.”
“잘렸지.”
“근데 다시 다닌다구요?”
“아침에 교감선생님이 불러서 정정하셨어. 계약 철회는 실수였다고.”
“말도 안 돼. 교감이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말뽄새 봐라!”
서우가 영제의 등짝을 장구채로 가볍게 내리쳤다.
“어쨌든, 난 앞으로 이 학교에 쭉 눌러붙어있을거야. 그러니까 누나니 여자니, 헛소리 넣어두고 선생님이라고 불러. 알았어?!”
서우는 가벼운 걸음으로 대강당으로 앞서 걸었다. 가장 고민하던 일이 해결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반면 영제는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이제 이놈의 교복 좀 벗고 만나나 싶었는데..
계단식 대강당은 한꺼번에 모인 전교생들로 북적북적했다. 영제는 늘 그렇듯 맨 뒷자리에 착석했고 서우는 교사들 자리에 찾아가 앉았다.
연단 위엔 교감이 서 있었다. 마이크 높이를 조정하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래요?”
서우가 압둘라 태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저희도 공지 받은게 없어서. 뭐.. 정부에서 우수 학교로 선정됐다거나, 이런 뻔한 발표 아닐까요?”
궁금한 것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나겸이 옆자리에 앉은 영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아는거 없어?”
“내가 어떻게 알어?”
“우리 중에 서온재단이랑 가장 가까운 사람은 너잖아.”
“!!!”
‘재단’이라는 말이 나오자, 영제는 불현듯 얼마 전에 들었던 유건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재명고등학교 차기 교장선생님이거든.’
영제는 유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야 이 난리가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학생 여러분은 모두 자리에 빨리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오교감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퍼졌다.
“전 교장선생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교직을 그만두신 이후, 짧은 기간 동안 교장대행으로써 학교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해왔습니다.”
설마 오교감이 교장이 되는건 아니겠지..? 서우가 불안한 눈빛으로 연단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희 재명고등학교의 선봉장이 되어주실 새로운 교장선생님을 소개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학생들이 연단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새로운 교장이라니. 어떤 늙다리 영감탱이가 나타날지 아주 약간 궁금해하면서.
“윤유건 교장선생님을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오교감이 열렬히 박수를 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학생과 교사들도 동시에 가림막이 쳐진 연단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훤칠한 한 남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늙다리 영감탱이도, 깐깐해보이는 할매도 아니었다. 이제 막 마흔이나 됐을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셔츠와 자켓으로도 가려지지 않았고 쌍커풀 없는 매력적인 눈매는 어딘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저게 교장이야..?”
본분을 잃은 어느 여교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우의 생각도 정확히 일치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교장이라고?!
“반갑습니다. 교장 윤유건입니다. 유서 깊은 재명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자주 봅시다.”
방금.. 내 착각이었나? 정확하게 날 쳐다봤던 것 같은데.. 서우는 콧등을 긁적였다. 분명히 착각일 것이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그 가수와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저 남자, 아니, 저 교장..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내 착각이려나..?’
예상대로 교무실은 난리가 났다. 특히 미혼 여교사들은 벌써부터 유건을 공공재라도 된 듯 여기고 있었다.
“올해 마흔이래요!!!”
“마흔밖에 안 됐어요? 근데 어떻게 교장이 됐대?”
“서온가 사람이래요. 우리 학교 오기 전엔 서온 재단 전무였구요.”
“그런 사람 그릇에 고등학교 교장은 너무 작지 않아요?”
“왜요? 우리 고등학교가 어때서! 그래도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인데!!”
“아무리 명문이라봤자 결국 고등학교잖아요. 그런 남자는 교직보다 후계자에 더 어울리지 않아요?”
“나름의 후계자 수업일수도 있겠네요. 와, 그럼 진짜 왕자님이네! 학교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서우는 듣지 않는척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새로 온 교장의 포스에 눌려, 서우가 다시 학교와 재계약 하게 됐다는 소식은 찌라시 정도로 스쳐지나가버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그냥 잘생겨서 그런건가?’
머리를 쥐어싸매고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문제가 울렸다. 서우뿐만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동시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 저녁 일곱시. 학교 앞 고깃집 <황소가든>에서 전체 회식 있습니다. 교사분들은 빠짐없이 참석해주세요.
오교감이 보낸 문자였다. 새로 온 교장을 환영하는 자리가 분명했다. 여교사들이 오늘 옷이 별로네, 화장을 안했네, 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서우는 오늘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원래는 깔끔한 오피스룩을 입고 출근해 체육시간 전에 갈아입곤 했지만, 몰카 사건 이후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게 영 찜찜해서였다.
에이, 체육복을 입던 화장을 안했던 무슨 상관이람. 그런 남자는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을텐데...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코앞에 영제가 서있었다.
“엄마, 깜짝이야!!!”
“잠깐 저랑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나 지금 수업 들어가야돼.”
“그럼 같이 걸어가면서 얘기해요.”
영제는 아무렇지 않게 서우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선생님 계약 연장 된거요. 뭐 때문인지 모르신다고 했죠?”
“뭐.. 교감선생님이 내가 놓치기 아까운 교사라는걸 깨달으셨나보지.”
“선생님이 어릴 때 체조선수로 활동했던거 알아요.”
“...아는 사람들 꽤 많아. 어쨌든 메달까지 땄으니까. 근데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니?”
“오랫동안 서온재단에서 후원받았잖아요. 그쪽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없어요?”
서우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영제를 바라보았다. 교감도 그렇고 영제도 그렇고. 왜 자꾸 나한테 서온재단에 아는 사람이 없냐고 묻는거지?
“어릴 적에야 몇 명 알았지만 지금은 없어. 근데 그건 왜 물어?”
“...아니에요. 그냥 물어봤어요.”
영제는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 교실로 향했다. 뭐야, 왜 저래? 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담임이 복귀되자마자 형이 교장으로 왔다...’
영제는 오늘 일어난 우연을 곱씹었다. 집에서 찾았던 어린시절의 사진도 떠올렸다. 교장과 담임이 함께 찍힌.
‘형이.. 담임을 도와준걸까..?’
여러 가지 조각들은 많았지만 선명한 그림으로 맞춰지진 않는다. 둘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영제를 괴롭혔다. 유건의 등장이 왜 이렇게 자신을 초조하게 만드는지, 영제는 알지 못했다.
저녁 일곱시.
<황소가든>은 재명고등학교의 교사들로 꽉 찼다. 유건은 투뿔 갈비와 술을 넉넉하게 주문했다. 교장이 부자여서 좋네! 누군가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맨 끝자리에 앉은 서우는 고기 익히기에 정신이 없었다. 교사들 중에서도 막내인 그녀는 먹기보다 굽기에 집중해야했다. 육즙이 살아있으면서도 끝이 타지 않도록!! 서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선배 교사들이 먹을 고기를 끊임없이 구웠다.
“교장 선생님 결혼은 하셨어요?”
누군가 여교사들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보시다시피 싱글입니다.”
유건이 왼쪽 손을 보여주며 씩 웃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은 비어있었다. 여교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음에 드시는 분을 못 만나셨나봐요. 보기엔 다 갖추신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은 만났는데.. 아직 어떻게 다가가야될지 몰라서요.”
“에이, 다가갈 필요도 없이 눈빛만 보내면 여자분이 넘어올 것 같은데요!!”
“그것보단 좀.. 복잡합니다.”
서우가 고기를 구우며 유건을 힐끗 보았다. 방금 또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이려나?
“이런 자리에서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자, 다들 건배합시다.”
유건이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다시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시작됐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굽던 서우는, 누군가 집게로 자기 앞에 고기를 덜어주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 유건이 앉아있었다.
“아, 교장선생님! 먼저 드세요.”
“아까부터 봤는데 거의 못드신거 같더라구요.”
아까부터 봤다고? 날? 언제부터 본거지?
“생각보다 교사도.. 잘 어울리네요.”
교사‘도’? 유건의 이상한 표현에 서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핸드폰진동이 울렸다.
-나 바로 앞에 있어요.
바로 앞?!
서우는 집게를 든 채 고깃집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제가 핸드폰을 든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