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얀 눈발이 전장을 삼켰다. 끝없이 칼을 부딪치던 병사들이 퇴각 신호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설원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붉은 혈흔이 잔뜩 뒤엉켜 이곳이 전장이었음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뿐이었다. 거센 눈보라는 누군가의 핏물도, 발자국도 모두 지워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크라누와 알라베티가 전쟁을 시작한지 약 반 년이 흘렀다. 11월이 시작될 즈음, 갑작스럽게 진군해 온 알라베티 군대가 외곽 마을들을 습격하기 시작했고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 군대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학살 하였으며 그 악명에 오크라누의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만했다.
알라베티의 군대가 외곽을 점령하고 중앙 영지를 침범하여 왕성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외교적 수단으로도 통하지 않는 알라베티를 상대로 오크라누도 깃발을 들었고, 곧 모든 성벽에 전쟁을 알리는 초록빛이 나부꼈다. 그 색은 평화를 상징하였으며, 은색실로 장식한 장미 자수는 오크라누의 유일한 여왕을 뜻했다. 오크라누의 여왕은 전쟁을 싫어했고 국민을 사랑할 줄 아는 여왕이었다. 국민들도 여왕을 존경했으며 이 나라는 여왕의 통치아래 아주 평화로웠었다. 여왕은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자 사자들을 몇 차례 보내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사자의 머리를 담은 주머니 뿐이었다.
알라베티의 왕이 서거하고 제 3왕자가 계승을 한지 한 달 채 안되어 일어난 첫 번째 전쟁. 오크라누의 군대가 우세하다 싶었지만 증원세력이 끝도 없이 몰려와 오크라누를 압박하였다. 적군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풀 한포기도 모조리 태워버리는 악독함에 서쪽 산맥의 엘프들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모든 게 불타버린 마을에는 알라베티의 붉은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었으며, 그 아래는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하늘에선 까마귀들이 떼로 몰려와 울부짖고 있었고, 썩은 악취가 나는 마을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불었다.
“여왕님, 증원을 부르셔야 합니다.”
“어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외곽뿐만 아니라
중앙 영지까지 침투하고 있소.”
오크라누의 회의장, 하얗게 머리가 센 대신들이 너도 나도 근심을 짊어진 얼굴을 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 여왕은 그들의 모습을 둘러보고는 편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 붉은색 염료로 물들어진, 한눈에 봐도 고급 종이임을 한 눈에 알아본 대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왕님.. 이것은?”
“어제 사자의 주검과 함께 보내어진 밀서입니다.”
여왕은 차분한 어투로 말하며 편지를 열어 펼쳤다. 인장이 뜯겨져 있는 걸로 보아 여왕은 내용물을 이미 읽은 상태였다. 여왕은 우아한 손짓으로 메이드에게 지시를 내렸다. 메이드는 즉시 편지를 대신들이 볼 수 있는 테이블로 가져갔다. 그 종이가 적국에서 보내 온 것임을 확신한 대신들이 분노와 궁금증이 담긴 애매한 얼굴로 메이드의 손에 들린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 대신이 잠시를 참지못하고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아 돋보기를 들이대고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붉어진 얼굴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종이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이, 이런 몹쓸...! 고얀 것을 봤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여왕님!”
편지를 읽은 대신들이 하나같이 화를 내고 분노를 이기지못한 대신은 욕까지 내뱉었다. 교양 없는 모습이었지만 여왕은 이해 한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천장에 새겨진 두 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과 낮의 여신, 오크라누가 섬기는 신이었다.
“이것도, 두 여신이 내린 답이라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여왕의 말이 시끄러워진 회의장을 차갑게 적셨다. 얼이 빠진 모습의 대신들이 입을 벌리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무고한 생명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목숨을 잃고 있어요. 군사들도, 국민들도 모두 말입니다. 알라베티의 군사들은 생명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어요. 그저 원하는 게..”
여왕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붙잡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 왕이 원하는 게, 겨우 저 하나라면 상관없습니다.”
질끈 눈을 감고 할 말을 뱉어낸 여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없다면 이 나라는 속절없이 알라베티의 속국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여왕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사옵니까.”
“릭턴, 오랜만입니다. 말씀하세요.”
장로 중 한 명인 릭턴이 지팡이에 두 손을 올리고 여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여왕님이 4살 공주님일 때부터 돌보았지요. 기억하시나요?”
전쟁과 상관없는 이야기에 대신들이 웅성거렸지만 여왕은 릭턴의 말을 경청했다.
“네, 저의 대부님 같은 분이시죠.”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살짝 웃어 보이는 여왕을 보며
흐뭇하게 화답한 후, 릭턴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여왕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분이셨죠. 그 4살짜리 아이가 국민들의 행복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 왕국의 주인이 되실 분이라는 것을. 수많은 혼인요청도 거절하시고 외롭게 자리를 지키리란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릭턴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핏기가 옅어지고 있었다.
“계속하세요.”
“여왕님, 이것은 국민들도 원치 않는 일일 겁니다. 부디 그 말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간청입니다.”
릭턴의 말이 끝나자 다시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모두 릭턴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여왕은 머리가 아픈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장로들과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여왕님! 그 놈이 원하는 대로 하시면 안됩니다!”
“이런 수치까지 주다니, 몹쓸 놈들!”
그 편지의 내용은 오크라누의 여왕이 알라베티 왕의 첩으로 들어온다면 전쟁을 멈춰 주겠다는 협박이었다. 이 것은 비단 협박 뿐 만 아니라 오크라누를 크게 욕보이는 행동이었다. 오크라누를 얕잡아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여왕님과 이 나라를 조롱하려 보낸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여왕은 차가운 눈으로 회의장을 내려다보며
조금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들 제 정신이십니까! 이 나라는 지금 죽어간 사람들의 것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찌 모르십니까. 그 자가 원하는 게 저 하나라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어요. 또한 오크라누는 이미 패배하였어요.중앙 영지까지 빼앗긴다면 다음은 왕성이겠지요.”
“하, 하지만..”
“지금 자존심을 세우며 싸울 때가 아닙니다. 대신들도 모두 죽는다면 오크라누는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운단 말입니까. 저를 희생하여 다시 오크라누를 일으킬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부디 오크라누와 피흘리며 죽어간 모두를 생각해 주세요.”
아무도 여왕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이미 중앙영지의 성벽은 헐거워진 성문에 기대어 겨우 버티고 있었고 그 앞에 붉은 깃발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며칠만 있어도 왕성까지 침투하여 모두가 죽고, 그렇게 패배할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라베티로 갈 채비를 준비 하거라.”
여왕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드들은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조용히 따라 나갔다. 회의장은 설원 한 복판처럼 차갑고 조용했다. 분노로 눈물을 짓는 대신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대신도 있었다.
릭턴은 천장에 새겨진 두 여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아무도 들리지 않게 읊조렸다.
“여신이시여, 부디 오크라누의 여왕님이
무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