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노랬다. 황사.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이 땅의 봄은 찬란하지 않았다. 햇살이 따뜻해질즘이면 금세 누런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코를 막았다. 봄꽃의 흐드러짐도 얄궂은 날씨 탓에 하루 이틀이면 바닥에 깔렸다. 따뜻한 봄인데도 마음 놓고 깊은 숨 한 번 들이마실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봄을 그리 간절히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더는 맞기가 싫었다. 지겹다. 추운 계절을 3개월씩이나 지낸다는 건…….
작년부터인가 집으로 걸어가는 오르막의 가로수가 낯설었다. 봄 다음 여름, 여름 다음 가을이 오는 것이 갑자기 생소해졌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보았던 주변 풍경들이 달라지는 것 없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곳을 벌써 떠났어야 했다. 그런데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어떤 계획도 마음 먹은 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유학도, 결혼도…….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지겹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조차도…….
학생들을 향해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나는 학원 강사다. 그래 흔한 학원 강사. 가장 잘하는 것을 하자고 생각하고 선택했던 대학의 흔한 과. 그것은 나에게 특별한 별을 달아주지 못했다. 대학은 학생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런데도 세상은 왜 그런 곳을 죽어라 공부해서 가라고 하는 것일까? 난 또 어쩌자고 멍한 눈빛으로 칠판만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가라고 외쳐대는 것일까? 어차피 대학 졸업 후에 갈 곳도 마땅히 없는 세상인데……. 그래도 목이 쉬어라 외쳐대는 대가로 나는 쥐꼬리만한 월급이란 걸 받는다. 어쩌면 쥐꼬리만도 못할지도 모르지. 그나마 몇 달 전부터 소개로 들어온 과외 수업이 내 월급을 쥐꼬리만큼은 만들어주고 있다.
그날도 나는 학원에서 녹초가 된 다음 과외 수업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익숙한 아파트 화단. 어두운 길을 비추는 한 줄기 가로등 불빛. 더 이상 옮기기 싫은 발걸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터에 다다르게 하고 있던 그 순간에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돌개바람을 만났다.
101동과 102동 사이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 키 만 한 나무 세 그루가 삼각형을 이루고 마주보고 서있는 그 공간에 바람이 머물렀다. 아니 형체 없는 바람이 윙윙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 나무들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과외시간에 늦은 것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세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나는 분명 그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철컹하는 쇠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나는 그 형체 없는 바람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다.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들이 은하수를 가로질러 퍼져있다. 삼경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밤늦도록 주군의 기침 소리가 멎질 않으셨는데…….’
하늘을 보며 옥체를 걱정하던 좌장군 이무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자국을 물렸다. 조금 전까지 맑던 하늘 가운데에서 먹색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어전에 알려야 한다!’ 걸음을 돌려 어전을 향하던 그는 더 이상 달려나가지 못했다. 바로 앞에 주군께서 근정전 기둥을 붙들어 잡고 하늘을 쏘아보고 계셨다. 주위를 지키던 부하들이 곁으로 달려왔다.
“전하를 뫼셔라!”
“예! 좌장군.”
그때였다. 먹색 구름이 소용돌이치던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전에 없었던 굵은 빗줄기였다.
“피하십시오. 전하!”
“나를 이곳에 있게 해 다오.”
“허나…….”
“좌장군, 저, 저기를 보십시오!”
다급한 수하의 목소리를 따라 하늘을 향하던 좌장군 이무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빗물들이 근정전을 바치던 기둥의 수십 배의 굵기로 모여 소용돌이치면서 거꾸로 치솟고 있었다.
“허엇!”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다급한 좌장군과 달리 그의 주군은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거꾸로 치솟는 물기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좌장군은 옥체를 안아 뫼시고 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미친 듯한 광풍이 주위를 모조리 쓸기 시작했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에 주위를 호위하던 부하들과 궁인들은 바람에 밀리고 날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온몸의 기를 끌어올려 땅을 움켜잡고 주군을 막아서던 그는 자신의 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하는 주군의 눈동자를 보고 놀랐다. 지금껏 한 번도 뵌 적 없는 표정의 용안이었다. 그리고 그도 곧 눈을 들어 주군의 시선을 따랐다. 저것은!
‘용의 머리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용이다! 무야, 천신이……, 천신이 오신다!”
‘천신?’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데 뭉쳐진 거대한 물기둥이 아홉 갈래로 갈라져 용의 몸이 되어 있었다. 하늘을 향한 아홉 용의 머리는 서서히 푸른 빛을 띠어 갔다. 소용돌이치는 광풍 속에서 이제 근정전 앞마당을 가득 메운 아홉 용의 물기둥은 하늘을 향해 몸을 세우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무야, 저기, 저곳이 보이느냐?”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저 용신님의 가운데 말이다.”
“저것이......, 무엇이옵니까?”
“…….”
주군은 대답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응시할 뿐. 순간, 물기둥의 가운데서부터 작은 빛이 보이더니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어버렸다. 제아무리 무예의 도가 깊은 좌장군이라 해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그랬던 것인가? 헌데, 이 느낌은 뭐지? 누군가 온다. 기운이 느껴져,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눈을 떠야 해!'
털썩-
그때 나는 비를 엄청 맞고 몇 걸음 만에 길바닥에 쓰러졌다. 비가 왔는데도 환한 빛이 가득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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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을 안아 뫼시거라.”
누군가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팔의 미세한 떨림, 품안에 안고 있는 이를 의식하는 듯한 작은 숨소리.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빠르다!
“이곳이라면 궁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것이다.”
“예, 전하.”
‘전...하? 내가 잘못들은 건가?’
“맥이 뛰느냐?”
“예, 미세하지만 틀림없이 뛰고 있습니다.”
“아직 의원을 부를 수는 없다. 궁 안의 모든 이들을 믿을 수 없다. 알겠느냐?”
“예, 전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오늘 너와 내가 본 것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절대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전하. 어명을 받잡겠사옵니다.”
“전의는 믿을 수가 없다. 밖에 연통을 넣어 믿을 만 한 자를 부를 것이니, 그때까지 이분 옆을 절대 떠나지 말고 지켜야 한다. 그리고 혹여 깨어나시거든 내가 올 때까지 이곳에 모셔두어야 한다. 지킬 수 있겠느냐?”
“지엄하신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딸칵-
정신이 혼미한 중에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쾌쾌한 나무 냄새, 넓지 않은 공간에 모인 공기가 초를 태우고 있었다. 촛농이 녹는 냄새. 나는 꿈을 꾸는 것인가? 이곳은 어디지? 온몸이 비에 젖어서 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나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왜일까? 꿈을 꾸고 있어서?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주군께서는 이 여인을 보자마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이곳에 뫼시도록 했다. 그리고 그 환한 빛은 대체 …….’
-털썩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자 세상을 뒤덮었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까스로 뜬 두 눈엔 휘몰아치던 광풍도, 솟구치던 아홉 용의 물기둥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 여인이 누워 있었다.
옆에 선 주군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좌장군은 그 여인에게로 옮겨지는 발걸음을 내딛다 흠칫했다. 주군의 영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헌데…….
“이분을 안아 뫼시거라.”
주군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좌장군은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달려갔다. 주군의 목소리에 묻은 다급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분의 다급함을 덜어드리고 싶었을 따름이리라…….
다른 이의 눈을 피하려 찾은 이곳은 나라의 지존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 눈앞에 태조 대왕의 어진이 계실 뿐, 주위에 추위를 덮을 만 한 마땅한 것이 없었다. 바깥에 빛이 새어 나갈까 촛불도 꺼 둔 상태였다.
여인의 젖은 몸이 걱정되었다. 여름이 찾아왔으나 밤은 깊었고, 날은 추웠다. 여자의 입술이 핏기 없이 파래갔다.
‘이대로라면 고뿔에 걸리실게다.’
좌장군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여인의 몸 위에 덮었다. 좌장군의 도포 사이로 여인의 창백한 손이 보였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궁 밖에 어의를 부르신다면 족히 1경은 걸릴 것인데,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그렇다고 사람을 불러 침구를 가져오랄 수도 없고, 내가 자릴 비울 수도 없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남자의 옷이 내 몸을 덮었을 때 나는 그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남자의 옷이 따뜻했다. 열이 많은 사람인가. 옷에 온기가 이렇게나 남아있다니. 이왕에 움직이지도 않는 몸 그냥 잠이나 자자 싶었다. 자고 나면 다 꿈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분명 과외 수업을 가고 있는 길이었는데, 그리고 과외 수업을 끝낸……, 기억이……, 나는 없다! 그래 그 돌개 바람! 그 형체 없는 바람에 길을 멈췄고 그리고……. 이건 꿈이 아니야.
현……, 현실이다!
여인이 눈을 떴다. 무릎을 꿇은 채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좌장군은 놀랐다. 여인의 눈이 어둠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의는 아직인가?’
눈에 힘이 들어가 있을 뿐 초점이 없었다. 좌장군은 다급해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한 곳만을 응시하던 여인의 눈에 이내 핏기가 돌았다.
‘더이상 이대로 두면 아니 된다!’
좌장군은 덮고 있던 도포를 치우고 여인을 흔들었다. 세차게 흔들었다. 여인의 얼굴 위를 손으로 휘젓다가 얼굴을 붙들었다. 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이보십시오. 천...천신님,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 차리십시오!”
‘주군께서 부르시던 그 이름의 주인이 이분이라면 나 또한 그리 불러야 한다. 천신님. 천신님. 제발 나를 보시오. 그리고 제발 죽지 말아 주시오!’
좌장군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여인의 눈은 힘이 풀리면서 스르륵 감겨버렸다.
‘설마! 아니 된다!’
여인의 눈을 잡고 살펴보던 좌장군은 급히 손목의 맥을 짚었다. 맥이 없었다.
‘이럴 수가!’
“천신님! 천신님! 눈을 떠 보십시오. 천신님!”
그때 나는 누군가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 목소리는 아주 간절하게 나를 불렀다.
-그런데 저는요, 아직 할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이 곳에 우연히 왔어요. 어떻게 온 건진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가서 마저 수업도 끝내야 하고, 집에서 날 기다리고 계실 엄마도 안심시켜 드려야 해요.
그렇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에 남겨두고 다시 캄캄한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놓질 않았다. 그리고나서 나는 꿈을 깼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아닌지 아직도 꿈속인지 알 수 없는 중에 내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가 나를 불렀다.
“깨어나신 것이옵니까? 천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