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나리!”
“초란이가 아니냐?”
“움직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성은 바위 위에 몸을 뉘어 어렵게 숨을 쉬고 있었다.
“괜찮다.”
오성의 눈앞에 우현의 몸이 뒤집혀 떠 있었다.
‘피하지 못한 것인가? 우현이……, 좌장군 내, 너를!’ 오성은 주먹을 쥐었다.
“어찌 이곳에 온 것이냐?”
“대감께서 보내셨습니다. 수표교에서 혈전이 있었다고, 가보라셨지요. 혹 다치신 곳은?”
“없다.”
“대감께서 사람을 더 푸셨습니다. 기별이 늦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신단수를 찾는 일이 아닙니까? 지금쯤 온 도성 안에 사병들이 깔려 좌장군 이무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여인이었다.”
“네?”
“그 신단수라는 것의 정체가 말이다.”
“여인……이라니요?”
“니가 말하지 않았더냐? 신단수는 신물(神物)로 나타날 것이라고, 허나 좌장군이 데리고 있었던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여자였어.”
“그럴 리가…….”
“이제 날이 밝을 것이다. 좌장군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인을 궁으로 데려가려 할 것이다. 지름길을 찾겠지. 그곳을 지키고 있어야겠다. 너는 돌아가서 대감께 아뢰어라. 반드시 신단수를 찾아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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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개치마 이거 계속 쓰고 걸어야 돼요?”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수영은 아까부터 다 와간다는 말만 반복하고 사람 안다니는 골목길만 골라서 걷고 있는 이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이런 길이 궁궐로 이어진다고?’
그런데 딱 한 걸음만큼만 앞서서 걷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낯선 사람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몇 시간 같이 있었다고 익숙한 느낌이라니…….’ 수영은 왠지, 지난밤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정말 꿈은 아닌 것 같아, 좀 전에 초가를 지날 때 보았던 사람들, 그곳에 정말 사는 사람들 같았어. 그리고 주막집……, 국밥……, 맛은 없었지만, 소금이 귀한 시대에서 사람들이 흔하게 먹었을 싱거운 국밥……, 내 생각엔 이게 꿈이든 아니든, 여긴 조선시대인거 같아. 저 사람의 복장, 그리고 내금위란 호칭……, 사극에서나 어울리는 말투……, 정말, 진짜, 꿈이 아니라면 난 이제 어쩌지……?’
불안한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좌장군과 수영의 거리가 두 걸음, 세 걸음 째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걸음을 멈춘 수영은 왼쪽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세 명? 아니, 순식간에 10명쯤으로 불어난 사람들이 왼쪽 골목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 든 저것은 칼? 수영은 좌장군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칼을 든 사람들로 아수라좌장군 되어 있었다.
“피하십시오.”
좌장군의 다급한 목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수영은 뒤를 돌아 뛰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도 칼을 든 여러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뭐……, 뭐지? 왜 이러세요? 설마? 날? 주……, 죽이려고?”
좌장군은 날이 환하게 밝자 다급함을 넘어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천신님을 궁으로 모시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분명 주군께서 크게 걱정하시고 계실 것이었다. 어서 이분을 궁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뒤에서 따르고 계시는 천신님과의 거리를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뒤통수에 날카로운 기운이 와 닿았다.
‘이런!’
간신히 칼을 피한 좌장군은 곧바로 여러 명이 휘두르는 칼을 막아내야 했다. 이 곳의 모든 골목으로 칼을 든 사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 했는가…….’ 앞의 네 사람을 일시에 베고, 뒤를 돌아 천신을 향해 달려 나가려는 순간, 이번엔 골목 오른편 벽을 뛰어 넘어 칼을 쥔 자들이 공격해왔다. 그들을 그으며, 천신을 향해 피하라는 말을 외쳤지만,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가를 금방 깨달았다.
‘이런 바보 같은……, 저분이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잖은가!’
저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좁고 외진 골목을 찾아 궁으로 가는 좌장군의 길을 꿰고서 수십의 장정들로 그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한 무리들이 천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둘레의 겹이 두꺼워 좌장군은 이제 천신을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좌장군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들이!’
“꺄아- 놔, 놓으라고! 내 몸에 손끝 하나 갖다 대봐, 경찰에 신고해버릴거야 악-!”
‘칼 든 사람들 앞에서 바보 같은 말인거 아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 발악밖엔 없다. 저 좌장군이란 작자는 보이지도 않잖아. 내 몸은 내가 지키자. 그런데 왜 이분들은 이렇게 험상궂게 생겼노, 진짜……,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그런데 저 사람? 맨 앞줄에서 칼 들고 서 있는 저 사람은 아까 새벽에 아침도 안 먹고 초가집 나서던 그 아저씨인데? 저 사람이 왜 날?‘
“윽.”
“커헉.”
수영의 등 뒤에서 사람들이 두세 명씩 한꺼번에 쓰러졌다. 좁은 골목 안에서 좌장군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씩 도움닫기를 하고 땅에 내릴 때마다 마치 볏단 쓰러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쓰러졌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제가 길을 열 것입니다. 뒤를 따르십시오.”
어느 새 내 앞을 막아 선 좌장군이 피 묻은 칼을 세우고 있었다.
“아……, 안 돼요.”
순간 좌장군은 멈칫 했지만, 여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지금이 기회다. 적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이자들을 베고 가야 한다.’
이제 그는 천신을 모시고 궁으로 향하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그 어떤 것에도 여지를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인이 좌장군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이분들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기 온 사람들 같아요. 저기, 저 아저씨, 아까 그 초가집 지나올 때 봤던 사람이잖아요? 안 그래요? 봐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칼도 제대로 못 쥐고 있잖아요?”
앞에 선 자들은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자기들을 베려고 하고 있는 큰 키의 무사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이미 베고 지나온 자들은 훈련된 병사들이었지만, 남은 자들은 돈 몇 푼에 칼받이로 불려나온 양민들인 듯 했다. 좌장군은 멈칫했지만, 칼을 거두지 않았다. 저들 속에 무사들이 기를 숨기고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냐?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웅성거림만 있을 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칼을 버리고 길을 터라.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벨 것이다.”
사람의 몸을 볏단 베듯이 쓰러뜨리는 무사의 모습에 겁을 먹은 자들이었다. 관모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빛에 맨 앞에 선 자들부터 칼을 버리고 옆으로 비껴서기 시작했다.
길이 열리자 좌장군 이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뛰었다. 이곳으로 몰려드는 자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천신님을 또다시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뒤를 따르는 여인의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멈출 때가 아니었다. 여인의 손을 잡고 골목 끝을 돌아 언덕 위로 이어지는 숲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수영은 거의 넘어지다시피 하며 좌장군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잡혀 있는 손부터 어깨까지 아파왔다.
“잠깐만요, 팔이 너무 아……ㅍ.”
수영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앞서 달리던 좌장군이 소리쳤다.
“저 곳이옵니다. 저 길 끝에 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사옵니다. 조금만 더 힘을…….”
그때였다.
“헉-”
누군가가 내 등에 불을 갖다 댄 것 같은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그 느낌은 마치 뾰족한 것을 불로 달군 다음, 등에 대고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좌장군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나를 받아 안았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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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님, 천신님, 정신차리십시오. 천신님!!”
흐릿한 의식 속에서 좌장군 이무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등이 타는 것처럼 아파왔다.
“정신을 놓으셔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천신님!”
‘이 사람 많이 놀란 모양이네……, 그런데 그 나무는……?’
수영의 의식은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천신을 업고 달리던 좌장군은 마침 주상의 명을 받고 좌장군을 찾고 있던 수하들과 만났다. 홍안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 당장 궁으로 가, 대전으로 가는 모든 길의 궁인들을 치워라.”
“예! 장군.”
“길을 터라 대전으로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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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오성은 자신의 주인인 영의정 서문기 앞에 엎드려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어찌 된 것이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서문기는 좌장군의 손에서 신단수를 찾아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심할 수 없는 조선 최고의 무사였다. 오성과 무예가 뛰어난 무사들을 여럿 보냈지만, 그것으로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좌장군의 입궁을 막고, 신단수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오성이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방금 신단수가 칼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로 신단수가 칼에 맞았느냐?”
“그……, 그러하옵니다. 대감,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하……!”
서문기는 휘청이는 몸을 겨우 가누며 깊은 한 숨을 뱉었다. 초란에게서 신단수의 정체가 여인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언서에 적힌 대로라면 신단수는 신물(神物) 중에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여인이라니? 예언서가 잘 못 된 것일 수는 없었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었다. 전쟁이든, 가난이든, 목숨과 바꿔가면서 지켜 온 유산이자, 가보였다. 저 멀리 ‘백제’의 이름으로 살던 때부터 한 번도 이 집안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누구였느냐? 누가 칼을 던진 것이냐?”
서문기는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물었다.
“소인이 좌장군을 앞질러 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좌장군의 뒤를 베고 신단수를 찾아올 요량이었습니다……, 헌데……. 좌장군이 신단수를 데리고 그곳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반대편 숲속에서 붉은 색 옷을 입고 복면을 한 자가 나타나 신단수의 뒤를 향해 붉은 색 단검을 던졌습니다.”
서문기는 감았던 눈을 떴다.
“붉은 색 옷과 검?”
“그러하옵니다. 대감, 소인이 손 쓸 새가 없었사옵니다. 아무 기척도 느낌도 없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검을 던진 것이옵니다. 좌장군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사옵니다. 대감.”
듣고 있던 서문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들이 움직인 것인가?”
“그들이라면……, 아시는 자이옵니까?”
“나와는 반대의 이유로 신단수를 찾는 자들이다.”
서문기의 눈밑이 떨렸다.
“허면?”
“이 세상을 그대로 두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신단수를 살려두려하지 않을 것이야. 그들이 던진 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다. 예로부터 존재해 온 자들의 무기는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닐 터. 초란을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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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 마을이 보였다.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시원하게 뻗은 강줄기를 따라 작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주 평화로워보였다. 배를 타고 낚시를 하고, 농사를 짓고 배불리 먹었다. 마을을 안고 서 있는 산과 풍족한 들판엔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고, 작은 짐승부터 덩치 큰 짐승까지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며 어울려 살았다. 그네들의 삶을 산 위의 나무 한 그루가 굽어보고 있었다.
처음 그 나무는 아주 작은 묘목이었다. 하늘의 빛을 받고, 하늘이 내려주는 물을 받아 점점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났다. 겨울이 와도 그 나무만은 나목이 되지 않았다. 나무의 밑둥이 어른 여럿이 둘러 안아야 할 만큼 자랐을 때, 나무는 보름달이 뜨면 하얀 나무가 되었다. 사람들은 하얀 나무를 사랑했다. 마을의 잔치가 있을 땐 나무를 찾아 제를 올리고 나무에 색색의 줄을 달아 치장했다. 나무도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봄이면 붉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녹음을 만들어 사람들을 쉬게 해주었다. 가을엔 바람을 불러 추수하는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고 풍작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리고 겨울엔 무성한 잎으로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었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하늘과 세상의 이야기를 속삭여주었고, 낮이면 따스한 햇빛 아래,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서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왔다. 그리고.....
“천신님, 정신이 드십니까?”
흐려진 시야에 흰 머리를 곱게 빗은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누구?’ 수영은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천신이시여. 참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노인의 머리 가운데 금빛 장식이 빛났다.
“제가 천신님을 불렀사옵니다. 하늘님께서 천신님을 다시 이 땅에 내려주셨사옵니다.”
‘이 노인이 날 불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