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장군이 통막골 쪽으로 말머리를 잡은 것 같사옵니다. 대감.”
“그럴 테지.”
“좌장군이 우물의 물을 찾는다면……, 막아야 하지 않사옵니까?”
“초란이가 잘 해결할 것이다. 설사 우물의 물을 구해 온다 해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니……. 지금은 신단수를 찾는 일이 급하다. 가마를 재촉해라.”
“예,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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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초란은 한바탕 굿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 하늘이 열리고 나서부터 신령님들의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굿으로 다독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신령님들의 동요하는 기운은 쉽게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신령님들이 침착해져야 그 여인의 점을 쳐 볼 수가 있다……. 어찌 신단수가 여인으로 왔단 말인가?’
그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립문을 돌아 우물이 있는 뒷마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님이 왔군.”
기다렸다는 듯이 초란은 손에 방울을 들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키가 큰 관복을 입은 사내가 우물의 덮개를 막 밀어내려던 참이었다. 초란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그자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시오? 이곳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신령님께서 노하시기 전에 어서 썩 물러가시오!”
좌장군은 고개를 돌려 무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초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대가 무녀 초란인가?”
“........”
초란은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채 초점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내금위 소속 관원이다. 이 우물의 물을 떠가야겠다. 어서 우물의 덮개를 열어라.”
그때 초란은 어릴 때 신내림을 받기 전, 동네를 돌아다니며 신점을 숨 쉬듯 내뱉고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때, 마치 그때처럼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령님을 처음 모실 때처럼 온몸이 떨리고,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이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엇하는 것이냐?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명이다. 어서 우물의 덮개를 열어라.”
“아, 아니 되…….”
말을 맺지 못하는 초란의 눈에 붉은 범이 기다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환영이 보였다. 초란은 눈을 뒤집으며 한쪽으로 쓰러졌다.
“헉- 어, 어머니…….”
숨을 헐떡이며 쓰러진 초란이 희미하게 뭐라 중얼댔다. 놀란 좌장군은 초란을 살폈다. 경기가 난 것 같았다. 재빨리 초란을 똑바로 눕히고 옆으로 얼굴을 돌려놓고는 맥을 짚었다.
‘숨이 막히진 않을 것이다. 의원을 찾아야겠군. 성가시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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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그것이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금 영의정께서 우물의 물을 가지고 대궐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임금은 황망해하며 맹의원을 바라봤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이는 필시 천신님을 만나겠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맹의원은 영의정 서문기란 자를 알고 있었다. 그는 백제인의 후손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신단수에 대한 예언서를 목숨같이 지켜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신단수의 환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온갖 주술을 행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보다 먼저 하늘의 물을 찾아 우물을 짓고 이미 몇 대 째 그 터를 지켜 오고 있었다. 지금 그가 신단수를 살릴 수 있는 하늘의 물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곧 신단수 만나겠다는 것이고, 이는 곧 신단수를 뺏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허나, 그자에게 천신님을 보일 수는 없네! 홍안은 듣거라, 지금 좌장군은 어디에 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좌장군께서는 소인에게 먼저 대궐로 가 이 사실을 아뢰라 하시고, 직접 통막골로 가셨사옵니다. 전하.”
'시간이 없구나....... 무야, 어서 하늘의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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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장군은 물병의 마개를 막고 우물의 덮개를 덮었다. 누워있는 초란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는 듯 했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좌장군은 동리를 나서며 약방 의원에게 초란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그림자도 없이 달린다는 무영마(無影馬)를 타고 궁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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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께서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셨는가?”
영의정 서문기는 강령전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박상선을 향해 물었다. 박상선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감히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자였다. 조선의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자. 더구나 지금은 상황이 영의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주상 전하께오선 이곳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이곳에 아니 계시다? 헌데 박상선은 왜 이곳을 지키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근정전에서 대신들과 조참(朝參) 중이시옵니다. 근정전으로 가시지요.”
“그래?”
서문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쓰다니…….’
대전엔 이미 조참(朝參)을 위해 당상관부터 모든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주상은 어떻게든 서문기와 천신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좌장군이 하늘의 물을 가지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주상 전하, 영의정 서문기 대감, 입시 옵니다.”
“들라 하라.”
서문기는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며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는 허리를 굽히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가슴에 품은 물병을 꺼내 양 손에 받아 쥔 채 주상의 코앞에 와서야 허리를 숙였다.
“주상 전하, 영의정 서문기 문안 여쭈옵니다. 밤새 평안하셨사옵니까?”
“평안하였소.”
‘평안이라……,’ 서문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헌데, 소인 어젯밤 궐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길 들었사옵니다.”
‘이자가, 기어이 천신의 이야기를 꺼낼 참인가!’
어좌에 앉은 임금은 초조한 낯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궐 안에서 갑자기 큰 비가 내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중에 아홉 마리의 신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말이옵니다.”
모여선 대신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 중에 좌참찬과, 우참찬이 자신의 당수인 영의정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무슨 영문인지 알려고도 들지 않고 일을 부풀려 대기 시작했다. 금세 대전의 분위기는 정말 그 일이 일어났는지 보다, 임금에게 진위를 묻는 분위기로 급변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 나라의 영의정이라는 자가 유언비어를 가리지 않고 믿는 단 말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유언비어가 아닌 것을 저도 알고, 주상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서문기는 신단수를 되찾을 것이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신단수에 대한 공론을 만들어 주상을 궁지에 몰아넣을 작정이었다.
“그런 일은 없었네!”
“주상 전하, 지금 강령전에 누워 계신 분은 누구이옵니까?, 그분은 어제 그 신룡과 함께 내려오신 천신님이 아니옵니까?”
“강령전?”, “천신?”, “강령전에 천신님이 계시다고?”
이제 근정전 안의 대신들은 간밤에 일어난 일이 천신의 하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어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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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공주마마, 아무래도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 때문인 것 같사옵니다.”
조상궁은 공주의 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와 까만색 머리끝을 감고 있는 붉은 비단 댕기가 상전의 백옥 같은 하얀 피부색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간밤에 그 돌개바람과 갑작스런 비말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마마, 그것뿐만이 아닌 듯하옵니다.”
“허면……? 어? 저기, 좌장군이 아닌가?”
공주의 하얀 두 볼이 금세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하옵니다. 공주마마.”
“헌데, 어디를 저리 급히 가시는가? 아바마마께선 대전에 계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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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선! 박상선!”
강녕전 안에서 맹의원의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아직, 좌장군은 보이지 않는 것이오?!”
맹의원은 전에 없는 초조한 낯빛이었다.
“아직, 기별이 없사옵니다.”
“허! 큰일이로구나!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맹의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빛이 한 눈에 보아도 심각해 보였다. 검은 빛이 돌고 광대가 드러났다.
“아니, 어찌, 짧은 시간에 저리 변하신단 말입니까?”
“안되겠소. 빨리 대전으로 달려가 주상 전하께 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시오! 어서!”
“예……, 예!”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온 박상선은 천신이라 불리는 저 여인이 만약 이 대궐에서 세상을 뜬다면 필시 피바람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다.
‘반드시 저 여인을 살려야 한다.’
대전으로 달리는 박상선의 앞에 좌장군 이무의 모습이 보였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그의 손에 하얀 물병이 쥐어져 있었다.
“좌장군! 좌장군! 급하게 되었네. 어서!”
좌장군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박상선을 제치고 천신이 누워 있는 강녕전으로 곧장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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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용히 하시오.”
주상의 목소리는 대신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였다.
“허-면! 영의정께오선 지금 하신 그 말을 증명하실 수 있으시오?”
우의정 김명기가 소리쳤다. 일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대신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우의정의 말에 공감하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서문기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말엔 사람을 설득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지난 밤 주상 전하께오선 궐 안의 기이한 일이 일어난 후 갑자기 궁궐의 수비를 강화하셨소. 그리고 민가의 의원을 불러 침전에 들이셨소. 또한! 주상 전하의 최측근 좌장군 이무가 새벽에 한 여인을 업고 급히 침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자가 있소이다.”
“허나, 그 여인이 천신이라는 근거가 있소?”
“있지요.”
“무엇이오?”
“그 여인은 오래도록 전설로 내려온 신단수의 환생이오. 그리고 지금 알 수 없는 자들에게 공격을 당해 강녕전에 누워 계시지요. 그 여인은 지금 이 물병의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아날 가망이 없소이다. 이 물은 하늘의 물로서, 우리집안 대대로 지켜온 신단수의 물이오, 이 물로 여인이 살아난다면 필시 그 여인은 하늘이 내리신 천신! 신단수일 것이오.”
“신단수라니? 천신이라니?”
“아니, 그럼 그 전설이 사실이었단 말이야?”대신들의 웅성거림은 다시 시작됐다. 용상에 앉아 계신 임금은 깊은 숨을 내쉬면서 감은 눈을 떴다. 이들 앞에 천신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서문기 네 이놈……, 어쩌자고 일을 이 지경에 빠뜨리는 것이냐!’
“허니, 주상 전하, 이제 이 몸이 가져 온 하늘의 물을 천신님께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좀처럼 노기를 비추지 않는 임금이었다. 우의정 김명기는 어두워진 임금의 낯빛을 보면서 서문기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상 전하, 영의정의 말이 사실이옵니까?”
묻는 김명기를 비롯해 대전에 모인 대신들의 모든 이목이 임금에게 집중됐다. 그때였다. 대전 입구에서 좌장군 이무가 허리를 숙였다가 이내 일어섰다.
‘되었구나!’
주먹을 말아 쥔 임금은 천천히 일어나 대신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영의정이 들고 있는 물병을 뺏어 땅에 내리쳤다. 서문기는 이제 주상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물로 천신을 살리고 자신이 천신의 일을 주도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주상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하늘의 물이 담긴 병을 깬 것이었다.
‘왜? 천신의 생명이 위험할 터인데? 허면……, 초란이 쪽에서 일이 틀어진 게로구나…….’
서문기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런데
“어? 물병에 물이 없어!”
“어? 그러하이, 물병이 깨졌는데도 물 한 방울 튀지 않잖은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어허! 이 사람들이 그럼, 지금 영의정께오서 농을 하셨단 말씀이신가?”
“그렇지 않은가? 물병 안에 물이 없으니…….”
서문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초란이 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들고 오는 내내 병 안의 찰랑거림을 느꼈는데?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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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천신님.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눈이 부셔……, 목이 너무 따가워……, 물……, 물을.”
맹의원은 좌장군이 구해 온 물병을 통째로 여인에게 건넸다.
“여기에 있사옵니다. 헌데 지금 시료에 쓴다고 물이 얼마 남지 알았사온데…….”
겨우 몸을 일으킨 천신이 의원에게 건네 받은 물병을 들고 물을 넘기기 시작했다.
-벌컥 벌컥
“대전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