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어두웠다. 오성은 자신의 주인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지금까지 이분을 모시면서 이토록 노기 띤 얼굴을 뵌 적이 없었다. 필시 궁궐에서의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초란이가 걱정이구나.’
“초란이는 아직인 것이냐!”
주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전갈을 보냈으니, 곧 당도할 것이옵니다. 대감.”
오성은 초란의 집에서 우물이 말라버린 것을 알고 주인께 고하기 위해 달려오는 길이었다. 헌데, 그보다 먼저 도착한 주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 집안 대대로 지켜온 우물이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우물이 모두 말라버린 것을 고한다면……. 오성은 초란에게 미칠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
“대감 마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혹여, 궐에서의 일이 잘못된……, 것이옵니까?”
서문기는 오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묻는 듯싶었다. 오성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니가 지금 뭔가를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 초란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오성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소,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궁을 나서면서부터 무엇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서문기였다. 사실 그는 초란이 와서 모든 상황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대로 말해 보거라. 어서!”
“그, 그것이……, 우, 우물이……, 말라버렸습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이냐?! 우물이 마르다니!!”
앉아 있던 서문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사실이옵니다. 대감마님! 소인이 초란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좌장군이 다녀간 뒤였사옵고, 초란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사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초란이 우물을 열었을 땐 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사옵니다. 대감!”
“물이 남아 있질 않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은 서문기의 머릿속에 대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분명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대전에 입시한 그였다. 심지어 주상이 자신의 손에서 물병을 뺏어 갈 때도 그 안의 찰랑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다. 헌데…….
‘그렇다면, 그때의 일이……, 우물의 물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대감. 물이 남아 있지 않았사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초란의 목소리였다. 막 도착한 초란이 문을 열며 발을 들이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대감, 소첩을 죽여주십시오. 하늘의 물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서문기는 엎드려 조아리는 초란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허공에 눈을 두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것이로구나! 신단수가 하늘의 힘을 하나씩 되찾고 있는 것이야! 그래서 우물이 마르고, 내가 쥐고 있던 물병의 물도 사라졌던 것이야!”
서문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초란아, 붉은 검을 던진 자들이 다시 궁으로 찾아들 것이라 하였느냐? 그때가 언제이냐?”
초란은 영의정의 눈빛에서 집념을 읽었다. 그는 신단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신점에 의하면 사흘 후이옵니다.”
“오성은 지금 당장 부여로 내려가 큰 형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그것을 받아오너라. 당장!”
“그것이라 하오시면……. 예, 알겠습니다.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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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부셨다. 환한 빛이 온 세상을 뒤 덮고 있었다. 그 환한 빛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뭔가가 서 있었다. 미미한 움직임. 눈을 뜰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그것은 ……, 나무였다. 하얀 나무. 난 이 나무를 본 적이 있다. 꿈속에서……, 그런데…….
나무의 뒤를 돌아 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나무를 어루만지고 지그시 바라보던 그 사람이 나무를 불렀다.
<<신단수야. 나의 신단수야. 이곳이었느냐? 이곳이 니가 선택한 곳이냐?>>
나무의 하얀 잎사귀들이 반짝거렸다. 마치 그러하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삼위산 아래 태백이라, 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 곳이로구나. 내 이제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겠다. 너의 백성들을 통해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정말이옵니까? 환웅 천황이시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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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천신님께서 뭐라 하신 것인가?”
새벽이 되도록 여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있던 임금이 맹의원을 향해 말했다.
“무엇을 말이옵니까?”
“분명, 뭐라 말씀하셨소. 방금, 방금 말이오!”
“송구하오나,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전하.”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맹의원이 황망해하며 말했다.
“박상선, 박상선도 듣지 못하였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무 것도…….”
박상선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허어!”
임금은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를 꿈결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천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사옵니까?”
임금의 고무된 표정을 읽은 맹의원이 다시 물었다.
“방금 ‘환웅 천황’이라 하셨네. 분명히 그리 말씀하셨네.”
맹의원은 여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 이제 때가 온 것 같사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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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마마, 소식 들으셨사옵니까?”
평소 침착한 소영 공주가 아주 비밀스런 얘기를 올리듯 얘기하고 있었다.
“무슨 소식 말이냐?”
“어젯밤, 근정전 뜰에서 일어난 일 말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중전은 공주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마저 알고 있다면 이미 궁 안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젯밤 내금위들이 궁을 돌아다니며 소란스러울 때 이미 중전에게는 대전의 모든 상황이 보고되고 있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 받는 일은 중전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되었으나, 아직 열 세 살 밖에 되지 않았고, 돌아가신 중전에게서 낳은 대군들이 비록 한양을 떠나있다고는 하나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언제 어느 때 그 대군들이 돌아와 왕위를 찬탈할지 모를 일이었다. 주상 전하의 옥체가 미령하신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중전은 초조했다.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중에 천신이 내려왔다고도 하고, 신룡이 나타났다고도 하는데…….”
“소영공주. 공주는 대전에서 일어난 일에 언제까지 그리 신경을 쓸 참인 것이냐?”
“하오나, 어마마마, 오늘 조참엔 그 일로 아바마마께서 신료들과 크게 언쟁을…….”
“어허, 네가 어찌 조참의 일을 입에 올리느냐? 그 일이라면 더 들을 필요가 없다. 네 나이가 몇이더냐, 이제 곧 부마를 간택할 때인데, 더욱 행실을 정갈히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괜시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좋을 것이 없느니라. 그만 물러가 보아라.”
“하오나……. 예, 중전 마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소영 공주는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매일 한스러웠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늘 아들인 3살 터울의 동생만을 보살폈다. 첫째로 태어난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시지도, 따뜻하게 안아주시지도 않았다. 언제나, 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건 동생 영이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공주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니? 그만, 처소로 돌아가자.”
땅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조상궁이 놀라듯 말을 이었다.
“하온데, 저기……, 좌장군이 아니옵니까? 어찌 이 시간에 중궁전엘…….”
좌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소영 공주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좌장군이 서 있었다. 낮은 궁궐의 담들 사이로 늘 키가 큰 좌장군의 머리가 보이곤 했었다. 소영 공주는 늘 아침저녁으로 대궐을 한 바퀴씩 산책했다. 다 큰 처녀가 대신들의 눈에 띄는 짓을 하지 말라는 어마마마의 꾸중이 있었지만, 소영 공주는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대궐의 일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좌장군 이무를 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아들로 태어나 세상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한스러운 일이었지만, 좌장군 이무에 대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보상이요, 행복이었다. 소영은 앞으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 있는 좌장군의 옆모습이 조금씩 더 또렷해졌다. 큰 키, 묵직한 어깨, 긴 목을 흘러내리는 관모의 줄 사이로,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입술과 턱 선이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 공주 마마.”
조상궁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자꾸 앞으로 걸어나가시는 공주마마를 불러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러다, 눈이라도 마주치시면 어쩌시려고……. 어휴…….’
그러나, 조상궁의 부름에 돌아 본 것은 소영공주가 아니었다.
“공주 마마.”
좌장군 이무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제서야 소영 공주는 언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
“허면, 이만.”
좌장군은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부하 장수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공주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공주는 좌장군 이무가 떠나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시려구요, 이제 곧 부마 간택이 시작된다 하옵니다. 마음을 그리 두시면…….”
“안다……. 그런데 어쩌겠니? 내 마음엔 저 분 한 분뿐인 걸…….”
주상전하로부터 궁궐 수비를 은밀히 강화하라는 분부를 받은 좌장군은 믿을 만한 자들을 풀어 대전을 비롯해, 중궁전의 상황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홍안이 급히 주군의 전갈을 알렸다.
“깨어나셨다고?”
“그러합니다. 장군. 강녕전으로 들라는 분부이시옵니다.”
“알았다. 너는 동궁전을 살피거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거든 즉시 내게 알려야 한다.”
“예! 장군.”
고개를 숙이는 홍안을 뒤로 하고, 좌장군은 발길을 돌려 서둘러 강녕전으로 향했다. 그 뒤에 남은 어린 공주의 마음을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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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전하, 소상궁이 입시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곱게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단장한 소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한 걸음씩 조심히 걸으며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궁녀가 되어 임금님의 처소인 침전에 들어선 다는 것이 얼마나 큰 광영인지를 소상궁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2년 동안이나 궁을 떠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단순한 광영은 아닌 듯 싶었다.
소상궁은 천신님을 보필할 상궁을 들이라는 명을 받고 박상선이 데려온 아이였다. 천신을 궁 안에서 모시기로 결정을 한 이상, 그 분을 보필할 궁녀들은 어디에도 편을 두지 않는 믿을 만한 자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궁 안에 있는 모든 궁녀들은 중전 마마의 휘하에 있었다. 막막한 가운데 박상선은 2년 전, 병이 생겨 궁살이를 그만 두고 다시 환가한 소상궁을 떠올렸다. 생각시 시절부터 봐 온 아이였다. 서른을 넘어 상궁이 될 때까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불리한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심지가 곧은 아이였다. 다행히 그동안 병도 다 나았고, 또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었다.
예를 마치고 정중히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소상궁을 향하여 임금이 물었다.
“네가 소상궁이더냐?”
“그, 그러하옵니다. 주상 전하.”
소상궁은 처음으로 주상 전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풀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는 가난한 집에서 다섯째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궁살이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항상 나인들의 처소나 근처만을 맴 돌뿐 궁 안에서 25년을 사는 동안 임금님의 용안은커녕 발끝도 뵙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들린 주상 전하의 음성은 하늘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이 분이 너의 주인이시다. 목숨을 다해 모시거라.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라. 알겠느냐?”
“예……,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주상 전하.”
소상궁은 주상 전하께 조아리는 자신의 머리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이제부터 자신이 모실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를 들 수 없어 여인의 버선코에 수놓인 연꽃무늬를 기억하려 했다. 그때 하얀 손이 그녀의 눈앞에 들어왔다.
“잘 부탁드려요.”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허나 그런 말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상전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주상 전하께 하는 말을 잘못들은 것인가 싶어 순간 고개를 들던 소상궁은 놀랐다. 그곳엔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주상 전하와 노인 한 명이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