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짧게 탄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좁은 공간에서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은 어느새 입김까지 맞닿아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욱의 얼굴은 빛 하나 없이 캄캄한 이곳에서도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살벌함이 가득했다.
양희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점차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뒷걸음쳐보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벽이 발길을 붙잡았다.
‘처음부터 여길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매끄럽고 날렵한 턱 선이 귓가로 다가오더니 뒤이어 짧은 헛웃음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너였구나. 여우같은 년.”
남자의 뜨거운 숨결에 바짝 굳어있던 양희는 뜬금없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길 들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곧바로 따지려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는 흠 하나 없이 깨끗함을 드러내고 밝은 밤색의 머리칼이 살짝 땀을 머금어 촉촉했다. 아까까진 긴가민가했던 예상이 확신이 되었다.
자신을 이 외진 곳까지 쫒아온 이 남자는 강지욱이 확실했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항상 티비에서는 매너 있고 잘 웃는 젠틀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낯설었지만 말이다.
유명인인 그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것, 그건 티비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와는 달랐다.
진짜 생생한 현실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모두가 부럽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떨리는 손을 다잡아야할 정도로 불안했다.
이 시선은 증오의 눈빛이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강렬한.
양희는 그를 일 때문에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받아 내야하는 이 상황이라니.
‘맙소사! 미쳤다고 남 일에 끼어들어서는.’
후회밖에 되지 않았다.
강지욱이 양희에게 한 말은 너무도 분명한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평소 자신의 성격이라면 이미 따지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분명히 이 상황에서는 화를 내야 정상인데…
그럴 수가 없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양희를 지켜보던 지욱은 한껏 더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우같은 년… 너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데, 이 말이면 반 이상은 다 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시선이 양희를 훑었다.
애써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듣던 양희는 한 단어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본 모습이라니. 잠시 양희를 살피던 지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참을성이 많은 건가? 그리고 너희끼리도 서로 일에 관섭은 안 하는 걸로 아는데…특히 규율에 관한 건은. 네가 생각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다 잡은 녀석을 놓쳤어.”
“….”
“왜 아무 말도 없지? 변명조차 하지 않는 건가?”
“….”
“…그렇다면…”
지욱은 말을 끝내자마자 자켓 안에 숨겨두었던 은월도를 꺼내들었다.
짧은 단도의 칼날은 매우 날카로워서 그 끝에 떨어지는 먼지조차도 잘라버릴 듯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이 지금은 양희의 목을 향해 있었다.
“규율을 어긴 자는 단죄한다. 그 과정에 방해하거나 도주를 도울 시에는 그 관련된 자도 단죄한다. 고로 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지.”
단호한 말이었지만 그걸 들은 당사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한국어였지만 외국어처럼 귀로 들어가서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의 품에서 단도가 자신을 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찰나였지만 긴 시간이 흘렀고 주저하지 않았다면 이미 칼날은 그녀를 베었을 것이 분명했다.
위협적인 차가운 칼날이 피부에 살짝 스쳐지나가면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곤두세우게끔 했다.
입이 마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양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음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온 머릿속을 휘저었다.
쿵쾅-쿵쾅
숨이 막힐 정도로 나대는 심장의 고동이 입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엇을 하든 결정을 해야 했다.
흔히 차에 치일 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는 가만히 지켜보다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양희는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잠시 떼었다가 다물었다가를 반복했다.
쉽지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그 한 마디가 이 상황을 바꾸는 열쇠가 될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양희는 행여 칼에 베일까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남자의 모습을 흘끗 보았다.
덤덤한 눈매와 차갑게 다물어진 입술,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온전히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잘근 씹으며 눈을 감았다.
@@@
지욱은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녀를 곧바로 죽이지 않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은 종종 이런 일들과 마주하곤 했다. 은월도를 꺼내야하는 일들.
그래서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밤이면 이런 일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뭔가 달랐다.
‘뭘까. 내가 뭘 놓친 거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다시 앞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
겨눈 칼날은 거두지 않은 채 시선만 돌리며 살폈지만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별 볼 일 없이 평범해 보이는 여자다.
그들이라기엔 많이 모자라 보이는 외형에 지욱은 그제야 뭔가 제대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면 좀 전에 했던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리 흥분했었다지만 자신이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건…
그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고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이 여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그녀를 처음 본 날, 그 이상한 느낌이 아직까지도 스멀스멀 온 몸을 타고 다니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원래라면 더 묻는 것 없이 바로 죽였을 터인데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지욱에겐 살의를 이렇게 주저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었다.
늘 그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나도 모르게 이성을 놓아버렸기에 가끔씩 곤란한 일들도 많이 발생하곤 했었는데…
지욱은 자신의 안에서 묘한 호기심이 치솟는 걸 느꼈다. 이상한 여자였다.
평소에도 그들 때문에 여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예쁜 여자들.
심지어 근래에는 연기라도 손대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여자혐오증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첫 만남에 그녀에게 한 자신의 행동도 그렇고 지금도 자신이 왜 저 여자에게 특별하게 반응하는지 아이러니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다시 현실에서 자신이 겨눈 칼끝에서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행동을 보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생각이 없는 것일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니.
은월도를 잡은 손끝에 미련을 다잡으면서도 지욱은 그녀의 입에서 자신은 그들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스스로에 놀라고 있었다.
기껏 몇 번 마주친 정도로 이런 생각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자신은 아주 오랜 시간 이런 일에 스스럼이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무슨 말이라도 하면 바로 베어버릴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지욱은 몰랐다. 올곧게 뻗어있던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