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야 준비하자.”
“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에 타는 듯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
색이 고운 비단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한 가득 모여 있다.
그 사이 빛바랜 저고리를 대충 묶고 헐레벌떡 달려가는 한 여자.
여자의 몰골이 사람들이 보면서 혀를 끌끌 찰 정도다.
이 험한 땅에서 저리 막 달리면 짚신을 신은 발이 버티질 못할 터였다.
“뭐야? 쟤는 누군데 혼자만 저기로 가?”
그 모습을 보던 무리 중 셀카를 찍던 3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옆에 있던 친한 스텝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 촬영에 자주 와서 얼굴도장이 제법 찍힌 터였기에 편안하게 스텝들에게 여러 가지를 묻거나 수다를 떨곤 했다.
“아, 여기선 처음 보는 거 같은데..이름이....고..양희??? 큭큭..아까 반장이 고양이 고양이 거리면서 막 갈구는 거 봤는데! 웃기더라. 덕분에 다들 피곤한 거 잊고 오랜만에 빵빵 터졌다니까. ”
“뭐야...초짜한테 저기 들어가게 해줬단 말이야?!”
“아~초짜는 아닌 것 같던데? 조명하는 명진이가 다른 드라마촬영장에서 본 적이 있다더라~? 뭐 반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뭐야 정말…”
그녀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자기가 그렇게 여기 자주 왔는데 항상 이렇게 멀리서 점 정도의 거리에서만 서 있게 하고 저기 처음 본 계집애는 주연배우들 가까이서 촬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반장이 이미 시킨 거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그냥 혼자 분을 식혀야만 했다.
괜히 얼마 전에 한 쌍커풀 수술이 문제인 것 같아서 품에서 거울을 꺼내 살펴보지만 예쁘기만 하다.
자기애에 빠져서 거울만 보는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아까 양희라는 여자가 달려간 쪽을 바라봤다. 그렇게 달려가다가 넘어질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 상관없는 사람은 잊고 그는 곧 자기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야! 고양이!! 빨리 안 와? 뭐 하는 거야!!?”
절대로 모두가 생각하는 그 동물이 아니라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는 허름한 차림의 나, 고양희를 부르는 거다.
내 이름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저렇게 못 외울 정도인가? 양이가 아니라 양희-라고 그렇게 여러 번 말했는데도 항상 저렇게 부른다. 발음이 어려운건가?
“갑니다~!”
좀 전에 스탭이 들려주고 간 작은 짐 보따리를 부랴부랴 챙겨서 뛰어가는데 짚신이 발에 맞지 앉아 벗겨지려고 했다.
“뭐야. 이런...어쩌지?”
다시 바르게 신고 가야할지 그냥 가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 몰라. ”
양희는 그 사이 반장이 또 소리를 지를까봐 무시하고 서둘러가려했다.
급히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그러다 그만 돌부리에 짚신이 걸려버렸다.
그녀가 당황해서 주춤하는 사이 야!하고 또 다시 재촉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아 진짜…되는 일 없다.’
잠시 멈추고 바닥을 보니 천으로 된 끈으로 묶어놓은 신발이 풀어져 이건 이제 신었다고 할 수도 없는 모양이 되어 있었다.
별 수 없지.
그냥 짚신을 벗어 들고 버선발로 큰 자갈들을 피해서 껑충거리며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엉거주춤하게 달려갔다.
자갈과 돌 때문에 발바닥이 아팠지만 자칫 또 욕을 들어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랑곳없이 헤쳐 나갔다.
하지만 늦었다.
급히 온다고 달려왔지만 도착해보니 이미 촬영이 시작되고 다들 바쁘게 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달렸건만! 하..결국에는 빨리 안 왔다고 반장에게 욕을 들었다.
촬영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양희는 허겁지겁 스탠바이 해야 하는 곳으로 조용히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달려오면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양희의 주변에는 전부 스텝들뿐이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주변인들끼리 토닥이며 긴장을 좀 풀고 싶었지만 아는 얼굴이라고는 눈만 마주치면 인상을 쓰고 있는 반장밖에 없다. 그에게서 지금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말을 걸어줄 사람도 없으니 양희는 시작된 촬영에 집중해 보려 노력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처음도 아닌데…’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이렇게까지 긴장된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긴장을 없애기 위해 양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촬영이 몇 번 NG가 지속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그러다 보니 좀 전의 일이 생각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아까 들었던 기분 나쁜 말들이 떠올랐다.
참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착 가라앉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자기가 한번 10분 만에 좁은 차 안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버선신고 짚신신고 문 두 개 넘어서 달려와 보라지!! 자기가 다른 여자애들과 노닥거리느라 빨리 옷을 안 챙겨줘서 이렇게 된 건데, 뭔가 억울한 걸.’
속으로 숨 쉴 틈도 없이 불평을 해보지만 실제로는 말도 못할 뿐더러 그런 것 따위 저 변태 속물 놈팽이 놈이 이해할 리가 없다.
분노의 마음을 담아 분노의 원흉이 있는 곳을 노래보지만 그는 감독 옆에서 모니터화면만 보고 있을 뿐이다. 이 분노를 풀 곳이 없다. 뿌드득. 내 귀에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가 갈렸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 건지...
벌써 6개월째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성질 같아서는 그냥 콱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지 마시어요! 곧 저희 도련님이 오실 거에요.”
낭랑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요즘 한창 주가상승 중인 여자아이돌이 사극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한 풀 메이크업을 하고 대본을 읽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읽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그 현장을 보면서도 못 본체 하느라 어정쩡하게 피하고 있는 것이 꽤나 우스운 모양새였다.
그래도 촬영하는 영화에 주연이니까 욕하고 싶어도 그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양들이 커다란 사회의 모습을 축소해놓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저걸 못 외워서.’
연기를 못해도 주연을 하는 배우들도 많다.
그렇지만 저건 최소한의 준비성도 없는 거 아닌가? 어이없었지만 다들 그러는 것처럼 짐짓 모르는 척 했다.
양희는 알고 있었다. 세상은 어차피 재물과 권력과 외모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결정하다는 이치를.
이 일을 통해 더욱 뼈 절이게 깨달았다.
하지만 탐탁지 않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저런 짧은 것도 못 외우는데 영화 한 편을 어떻게 찍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자주인공인데…나참.’
이 쪽 세계에서 짧게나마 일하면서 느낀 건 이 세상은 진짜 ‘빽’ 아니면 ‘외모’라는 거다.
그 둘 중에 하나라도 가지면 저 자리에 설 기회를 잡는 거고 아니면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저 쪽은...정말 답이 없는 연기력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양희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다시 깨달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조그마한 얼굴의 그녀를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 빽 보다는 얼굴인가……
뭐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겠다.
예쁜 얼굴에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진한 화장만 아니면 영판 부잣집 아가씨의 모습 그 자체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가 맡은 역은 집안이 몰락하여 쫒기는 노비.
그런 상황의 노비라면 몰골이 말이 아닐 것으로 상상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노비는 참으로 단정하고 예쁘기만 하다.
“그러지 말고~ 어차피 쫒기는 신세인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살면 호강하게 해준당께?”
여주가 노비인가, 양반집 규수인가에 대해 고민이 될 즈음에 그녀의 앞에서 비열하게 대사를 내뱉는 중년의 남자가 어색했던 발 연기를 끊고 극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제야 진짜 사극 같았다.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탄탄한 몸에 개성 있게 생긴 얼굴, 항상 저런 역으로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유명한 분이다.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르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양희가 꽤 오래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그 남자배우는 어색한 연기를 잘 받아서 능청맞게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역시 뭔가 다르네….”
무심코 생각하던 것이 말이 되어 나왔다.
혹여나 작게 내뱉은 한 마디를 누군가가 들었을까 놀라서 그녀가 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모두들 촬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디오감독조차 꿈쩍하지 않았으니 다행히 목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휴-.”
안심하고 다시 조용히 촬영에 집중해보는데 어디선가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느낌을 따라 고개를 돌린 양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촬영장 저 끝에서 반장이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저 표정을 보고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 대상이 나만 아니길 항상 바랄 뿐이었는데…
‘이런! 구경하다가 그만 신호를 놓쳤어!’
좋지 않았다.
카메라 밖에서 반장이 대기 중이던 양희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촬영구경에 빠져 그만 나가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양희는 따가운 눈치를 받으며 서둘러 그가 아까 지시했던 대로 움직이기 위해 준비했다.
“아이구~ 분이 아가씨! 이걸 우쨌을까!”
혼자 긴장해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낯익은 얼굴의 여성이 주연배우를 보면서 달려 나갔다.
양희는 좀 전에 도착했을 때 스쳐지나가듯 말했던 반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양희는 조연배우가 달려 나가고 나면 그 옆을 지나가면서 그곳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 때 남자주연이 그 뒤로 나타나서 여주를 구한다는 뻔-한 스토리.
한마디로 양희가 해야 할 일은 주연들의 적절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늘 하던 일이었기에 그녀는 큰 걱정 없이 타이밍에 맞춰 걸어 나갔다.
좀 전에 나가서 대사를 했던 조연이 여전히 방방 뛰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양희는 집중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나는 테러범과 맞먹는 악인이 되는 것과 다름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는 그곳을 보면서 양희 역시 서둘러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긴장해서인지 자연스럽게 나가려고 했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총총걸음으로 뛰어 나가고 말았다.
‘어디서 싸움 구경이 났나~?’
어색한 등장을 무마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입으로 뱉을 순 없는 대사도 속으로 내뱉으며 이번엔 꽤나 자연스럽게 여주인공쪽을 보는 척을 했다.
사실 양희는 자신한테 집중되는 카메라에 떨려서 거긴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웅성웅성-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