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 없는 그녀!! 이쪽으로 오세요!”
수십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정신이 없는 신사역 출구 앞에서 웅성대고 있다.
그 속에 편안한 후드 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은 양희의 모습이 있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 50분. 다들 촬영 팀으로 모여들어 일지를 내고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극이다 보니 사람들이 굉장하게 모여 있었는데 구석구석 둘러봐도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 참! 얜 왜 안 오는 거야? 혹시 잠들었나?”
자신도 집에 가자마자 뻗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샤워하고 겨우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잠의 유혹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미남이는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칼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피곤해도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와 있곤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상했다.
또 다시 1분이 지나 51분이 되는 순간, 그냥 기다리기 보다는 연락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미스 테리~너만 보면 난 미스 테리~
최근 어딜 가든 들려오는 익숙한 노래가 연결음으로 들려왔다. 누가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양희는 노래가 들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초조하게 노래를 감상하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노래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폰은 가만히 귀에 대고 있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수가 있나?
그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또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려했을 때 불쑥 그녀의 왼쪽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으악-!뭐야!”
“나요, 양양 양~에헴”
익숙한 목소리. 불쑥 양희를 향해 들어온 건 한때 유행했던 캐릭터 안마 봉이었다. 애써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사극말투를 쓰는 사람은 그녀가 지금까지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야~놀랐잖아! 그리고 양양양이라니…그건 진짜 아닌 거 알지?”
어떻게 들어도 이상한 그 명칭에 치를 떨며 거부의사를 밝혀줬다.
‘내 이름은 진짜 시대극이랑 안 어울린다니까.’
물론 미남이 본래 이름인 양희가 아니라 양양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더 심하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이상하지 않은가. 양희 양, 거꾸로 해도 양희 양 그대로 해도 양희 양. 으아. 어지럽다.
“아~왜~. 으하핫! 사극이라니~ 나…지금 엄청~ 피곤한데 뭔가 흥분해버렸다. 데헷”
‘…아. 얘가 지금 많이 힘들구나.’
안하던 애교를 잔뜩 부리며 친구를 보는 미남은 몇 시간 사이 한층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양희는 자기가 애를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어쩌지. 지금 다시 보낼 수도 없고, 미치겠다.’
어느새 그녀들 말고는 다른 사람들 모두 차에 타버린 상태였다.
버스 앞에서 인원을 체크하던 단발머리의 중년여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 1분이었다.
“저기? 혹시 영화 촬영 오셨어요?”
마지막 확인을 위해 온 사람이었다. 멀뚱거리며 서있는 친구를 대신해서 자기가 더 챙겼어야했는데 하는 생각에 서둘러 그 여성에게 달려갔다.
“아~네! 저희 둘이요.”
“성함이?”
“고양희, 안미남입니다.”
“아~네. 여기 있네요. 저쪽 끝에 있는 버스에 타시면 됩니다. 바로 출발할 거니까 어서들 가세요.”
지금 출발한다니! 세상에.
그렇다는 건 우리가 제일 마지막인거다. 여전히 멀뚱히 자신만 보는 미남이를 끌고 양희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맨 뒤쪽 바로 앞, 붙어있는 두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자리 빼고는 모두 꽉 차 있는 걸 보니 오늘 굉장히 인원이 많이 들어가는 날인 것 같은데.
“미남아~여기!”
먼저 자리에 들어가 뒤 따라오던 미남이를 불러 앉혔다. 이제 보니 미남이는 제법 큰 백 팩에 무언가를 가득 채워 들고 온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왔어? 사극이라 옷 같은 건 다 준다니까~”
“아…이거? 후후훗. 별거 아냐.”
“???”
“근데, 생각보다 차도 크고 괜찮은데?”
무섭게 웃는 그녀가 의심스러웠지만 딱히 당장 궁금한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녀가 내뱉은 말이 더 신경 쓰였다.
“하, 넌 몰라. 오늘은 멀리가고 사람도 많으니까 이렇게 큰 차를 빌린 거지. 다른데서는 12인승에 13명을 꾸겨넣고~그 안에 사람만 타는 줄 아니?다들 짐 가방을 한가득 들고 타는데!!그건 뭐 피난민도 아니고, 거기다가!! 옷도 그 안에서 다 갈아입는 경우가 많다니까. 그나마 여자끼리 앉으면 다행이지! 남녀끼리 앉으면 얼마나 불편한데…”
“너…한이 많이 맺혔구나.”
친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촉촉해졌다.
괜히 흥분해서 한탄을 해버린 듯 한 느낌에 뻘쭘 해진 양희는 진정하고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오늘은 운이 좋은 거야, 늘 이렇진 않다는 거지”
차분하게 잘 마무리한 것 같았지만 이미 촉촉해진 눈가는 마를 줄을 몰랐다. 잠시 어찌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등을 세게 툭툭 두드렸다. 문도 아니고 두드린다니. 하지만 그 강도와 느낌은 두드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했다.
“아얏!”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힘을 어마나 준건지 어깨가 파이는 느낌이었다. 순간 울컥해서 뒤돌아 째려보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이~!고양희! 너 맞지? 내가 확실히 기억하지. 쿡쿡.”
“아…안녕하세요.”
옆에서 미남이 궁금한 눈빛이었지만 말을 해줄 틈이 없었다. 양희 자신도 지금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오늘도 가는 거야? 저번에…난리도 아니었다던데…”
말꼬리를 흐리며 말하지만 그 의미가 확실하다. 저번에 난리쳤던 네가 여길 왜 또 왔냐는 거다. 양희는 불편해진 마음으로 익숙한 얼굴을 살폈다. 늘씬한 몸매와는 다르게 기형학적으로 생긴 외모로 뒷모습 미녀로 주로 쓰이는 30살 언니였다. 양희는 딱히 좋은 인상이 아니라 이름도 가물 한 그녀를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인데 좋은 평가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 네. 박 부장님이 부르셔서요.”
그냥 조용히 넘기고 싶어서 간결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작정하고 덤벼든 그녀는 재차 이야기를 던졌다.
“그 때 막 강지욱한테 달려들고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너 강지욱 팬이였니? 저번에 우리가 잘생겼다할 때 관심없는 척하더니. 그래도 팬 질은 따로 나가서 해라. 괜히 우리까지 욕먹게 하지 말고.”
양희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대체 소문이 어떻게 부풀려 진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언제 그에게 달려들었단 말인가. 이야기가 완전 스토커설로 변형된 것 같은데 당황스러웠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별달리 길게 변명할 가치도 없어서 아니라고만 말하자 그녀는 흐응~거리며 앞쪽으로 가더니 다른 이들과 수군 수군거리며 양희가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상당히 기분이 나쁜 상황에 옆에 있던 미남이 욕을 하며 일어서려는데 양희가 급히 말렸다.
“뭐 저런 기분 나쁜 게!!”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사람이야. 사실도 아니고, 내가 실수한 건 맞으니까.”
“하! 나 진짜…”
조용해진 양희를 힐끔거리며 미남은 홀로 분노를 삼켰다. 자기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친구인 양희였기에 그녀가 말리는데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는 눈들도 많은데 잠깐 왔다 가는 자기야 괜찮지만 여기서 계속 일해야 할지도 모르는 양희는 시끄러워지면 앞으로 이 일을 할 때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조용해진 채로 차는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가는 차에서 둘은 그렇게 말없이 잠이 들었다.
**
“여자들은 옷 입은 사람들 이쪽으로 와서 머리하세요!”
“자-차례차례~머리한 사람들 이쪽으로 와서 분장해야합니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문경의 아침은 여름이지만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직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날씨였지만 제법 더웠기 때문에 이곳의 온도는 딱 좋은 상태였다. 보송한 느낌에 모두들 기분이 좋아 들떠있는데 그 사이에서 양희는 우울함에 울기 직전이었다. 그런 양희의 옆에서 미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있었다.
“양양아…어쩌니…”
그녀는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친구로서 그녀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양아…”
“어? 야! 저기 좀 봐! 세상에. 키득키득”
음울한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양희에게 어쩌지도 못하고 이름만 불러대는 상황만 십 여분이 지났을 즈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분장까지 마치고 나가던 한 사람이 양희와 미남이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기 시작한 거다.
“응??뭔데?”
“저기~안 보여? 곰이 있잖아! 킥킥킥~아 대박 쩔어! 진짜.”
“뭐?!어디 어디~어! 진짜네. 뭐야 저게? 우하하하핫.”
“……”
“그 옆에 기생이랑 대비되니까 더 웃긴다. 히끅. 아 너무 웃겨”
지금 상황을 너무 사실적으로 말해주는 그들의 대화 때문에 미남은 지금 매우 곤란해졌다. 그렇다. 지금 그들은 곰과 기생이었다. 오자마자 각자의 역할을 정해주며 이동해서 옷을 받아왔다.
다들 똑같은 옷을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미남은 다시 만난 친구의 옷이 아닌 옷 같은 그 털을 봤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다시 떠올렸다. 짧고 속살이 드러나는 기생 옷을 입고 너무 불편해서 그 불평을 하려고 양희를 찾았을 때 그녀는 저 털옷을 들고 멍하니 망부석처럼 굳어있었다. 개그도 아니고 정통사극 영화라고 한 것 같은데 곰 역할을 탈을 쓴 사람한테 시키다니. 상상도 못했다. 거기다가 하필이면 그게 자신의 친구라니.
토닥토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주는 미남이었다. 털옷으로 덮여진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친구의 손길은 참으로 따스했다.
“더워…”
아무리 문경이 서늘하다고 해도 이 여름에 털옷이라니 상상도 못했던 열이 보존되고 있다. 양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리라. 오자마자 끌려간 곳에서 이 옷을 받았을 때,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 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 부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문자를 보낸 건지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나한테 딱 맞는 역이라더니… 내가 곰이냐!!!?”
“양아…참아.”
“못 참아! 이건!!!! 더워 죽겠어 진짜!”
내려쬐는 태양빛에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극세사 털로 된 곰 옷을 입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었다. 두터워진 몸집 때문에 양희의 걸음걸이는 매우 어정쩡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가려니 아까보다 훨씬 먼 길처럼 느껴진다. 미남은 따라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뒤늦게 따라나섰다. 하지만 힘겹게 아까 이 옷을 건네줬던 사람에게로 도착한 양희는 곧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되돌아서 걸어왔다. 그 뒤를 따르던 미남은 당황했다.
“미남아!!가!가!”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미남이쪽으로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뭔가에 쫒기는 모습이었다. 그 급박한 분위기에 미남은 별다른 말도 못하고 다시 반대편으로 걸음을 재촉해야했다.
“뭐야! 따지러 간 거 아니었어?”
그 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달려왔을 때 미남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 양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아씨. 그 놈이 있어.”
“그 놈?”
“그 반장 놈!!!!보면 한 마디 할까봐 도망쳤어…하-더워죽겠는데 정말.”
옷이 갑갑한지 목을 늘려 바람이라도 들어가려고 하려는 것 같지만 신축성도 그다지 없는 곰 형태의 그 옷은 햇빛에 털만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기왕 하려면 좀 좋은 털을 쓰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번쩍이는 탓에 더 어색했다.
“야! 그렇다고 그대로 오면 어쩌냐? 계속 그 옷 입고 하게?”
“어쩔 수 없지, 이것도 경험이지 뭐. 허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차라리 마음을 편하게 놓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친구 미남의 행색이 눈에 띄었다.
“뭐야? 너 기생이야?”
“어. 그런가봐. 흑. 불편해죽겠어! 아까 너한테 이거 말하러 갔는데 네가 너무 좌절모드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 내가 아무리 불편해도 너만 하겠냐고…”
“…왜 예쁜데.”
진짜로 불편한 듯 짧은 저고리를 애써 더 내리면서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는데 양희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너무 예뻤다.
확실히 몸매도 좋고 예쁜 건 얼핏 알고 있었지만 굳이 꾸미지 않고 수수하게 다니는 친구였기에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진짜 황진이가 돌아온 것 같았다. 시스루로 된 저고리에 비치는 살결은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고 그 속에 얼핏 보이는 풍성한 가슴의 윤곽이 더욱 색스럽게 느껴졌다. 치마도 길고 풍성한 일반 한복과는 다르게 기생치마는 색감이 더 화려고 끈으로 한 번 묶어 얼핏 발목까지 보일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시원하긴 한데 글쎄, 예쁜 건 잘 모르겠다. 한복은 자고로 단아해야 제 맛인데.”
“…”
틀어 올린 머리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머리꽂이와 핀들을 매만지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이 부셨다.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사극인데도 화장까지 아주 예쁘게 다시 해준 모양이었다. 양희는 미남이를 부럽게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갈색의 털들이 여전히 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자신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으로 변해있는데 예쁜 자신의 친구는 더 예쁘게 변해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왠지 비교하게 되고 기분은 우울해졌다.
“자자!!모두들 스탠바이하세요! 준비 다 되신 분들 이쪽으로 옵니다.”
“가야되는 거 맞지?”
“응…가자.”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 서둘러 곰 탈까지 챙겨서 이동했다. 1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오늘의 촬영지로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모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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