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런! 전하께선 도대체 어디 계신 것이냐!”
하워드 대공이 다그치듯이 루이스의 행방을 묻자 베런은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전하께선 알렉산더 대장과 함께 사냥을 다녀오신다 하셨습니다.”
“어디로 사냥을 가신 것이냐? 요즘 어찌하여 궁을 자주 비우시는 것인지......”
“송구하옵게도...... 서신 한 장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신지라...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워드는 시종장이 국왕의 행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되겠냐며 호통을 치려다가 다시 꾹꾹 눌러 담았다.
궁궐 수비대장인 자신의 아들놈 알렉산더 역시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자신이 알고 있는 루이스는 막무가내로 무책임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선왕인 카를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태어나 말문이 트이기도 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자란 – 그야말로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선왕의 혹독했던 후계자수업과 어린 나이에 갑자기 앉게 된 왕좌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성실한 군주였다.
이런 루이스를 잘 알고 있는 하워드였기에 최근의 잦은 비밀사냥이 무척이나 걱정 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건지……. 알렉산더 이놈은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않고!’
애먼 불똥이 엉뚱하게도 만만한 알렉산더에게로 튀어가고 있었다.
* * *
하워드가 궁에서 루이스를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시각, 루이스는 메르헨과 산드리아의 국경인 피네 산을 넘고 있었다. 루이스의 예상대로 산드리아의 국경수비는 엉망이었다.
이백년 동안 전쟁이 없어 국방 수비에 소흘하기도 했고, 피네 산의 산세가 워낙 험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기 힘들다는 생각에 국경수비대의 대부분은 아얀느 평야 쪽으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차례의 피네 산 정탐을 통해서 국경수비대가 없는 위치를 파악하여 오늘은 직접 국경을 넘어 볼 요량으로 알렉산더를 대동하고 나선 것이었다.
루이스는 왕세자 시절부터 늘 산드리아가 탐이 났다. 메르헨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데다가 기후마저도 추워서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당연히 백성들은 매년 곡물 부족 현상을 겪으며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반면 산드리아는 국토는 작아도 대부분이 너른 평야지대인데다가 남쪽에 위치한지라 기후가 따뜻해 작물이 항상 풍요로웠다.
“알렉산더. 국경을 중심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길을 다시 확인해보고 오거라. 나는 산드리아의 도성을 다녀오마.”
“혼자 도성까지 다녀오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음번에 호위무사를 대동하시고 다녀오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산드리아에 내 얼굴을 아는 자가 없을 테니 걱정 할 것 없다. 오히려 호위무사와 함께 다니는 것이 더 눈에 띄어.”
“그래도……. 아버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찜찜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알렉산더를 뒤로 한 채 루이스는 성큼성큼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곁을 지켜주는 사람과 함께였기 때문에 낯선 장소에서 완벽하게 혼자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마치 처음으로 소풍을 나서는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도 살짝 일어났다.
산책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피네 산 초입까지 내려왔다. 그동안 아스라이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산드리아의 너른 평야가 루이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손끝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따스했다. 라일락나무들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며 향을 바람에 날렸다.
그저 산 하나만 넘었을 뿐인데. 아직까지 차가운 칼바람이 불고 있는 메르헨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루이스는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따스한 바람과 흐드러지게 핀 꽃, 그리고 바람이 전해주는 꽃향기를 느끼며 산드리아의 따스한 봄 풍경을 감상했다.
그 때 루이스의 귓가에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분명 칼이 만들어내는 바람소리였다. 방금 전까지의 여유로움이 싹 달아나며 온 몸에 긴장감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루이스는 칼자루를 잡은 채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살금살금 이동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작은 검술 훈련장이었다. 루이스는 몸을 숨기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훈련장 안에는 두건과 복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여인이 혼자서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감춰지지 않는 몸의 굴곡으로 인해 루이스는 검객이 여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인의 검술 솜씨는 한 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체구는 작고 가녀렸지만 검법은 대담하고 재빨라 어느 기사와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솜씨였다. 루이스는 여인에 대한 궁금증에 계속 숨어서 지켜보았다.
‘왜 이런 곳에서 혼자서 훈련을 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이상한, 그리고 궁금한 여인이었다. 무엇보다도 두건 속의 감추어진 모습이 못내 궁금했다.
‘어휴, 이럴 때가 아니지.’
무언가에 홀린듯이 여인을 지켜보던 루이스는 시간이 한참 흘렀다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켜 다시 산드리아의 도성을 향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에 도성을 둘러 볼 시간이 충분치 않아 마음이 더 급했다.
바삐 이동하는 루이스의 앞을 검은 복장의 검객이 길을 가로막아 섰다. 루이스는 멀리서 보이는 검객의 모습에 칼자루를 힘주어 잡았다가 다시 긴장을 풀고 검객 앞에 마주섰다.
검객은 훈련장의 여인이었다. 여전히 복면과 두건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마주 섰기에 두 눈만은 똑바로 바라 볼 수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있는 커다랗고 맑은 눈 속에는 차갑게 루이스를 쏘아보고 있는 은색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넌 누구지? 왜 나를 염탐하는 것이냐?”
여인이 냉정하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몰래 지켜보던 것을 여인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괜한 큰소리를 내었다.
“누, 누가 염탐을 했다는 것이냐? 인적 없는 산속에서 칼소리가 들려 확인을 해본 것뿐이다.”
“보아하니 귀족 같은데 시정잡배처럼 몰래 염탐이나 하다니.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신분을 밝히 거라.”
“하, 시정잡배라니!”
루이스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답답함과 자신을 시정잡배 취급을 하는 여인에 대한 괘씸함이 동시에 부글부글 끓어올라 명치끝이 체한 것처럼 꽉 막힌 것만 같았다.
또한 자신에겐 신분을 밝히라 하면서 정작 본인은 꽁꽁 싸매고 있는 여인이 얄미우면서도 미치도록 궁금했다.
“상대방의 신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신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리고 내 신분을 알게 되면 넌 이 자리에서 죽어야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이스는 칼을 빼어들고 여인에게 향하였다. 갑작스런 루이스의 공격에 여인 역시 급히 칼을 빼어 막아섰다. 여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힘과 체격, 기술에서 루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루이스는 장난치듯이 검을 겨루다가 여인의 두건을 베어냈다. 두건이 벗겨지며 숨겨져 있던 풍성하고 윤기 나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차갑기만 하던 여인의 은색 눈동자의 당황하는 기색이 비춰졌다.
메르헨과 서고트, 그리고 산드리아가 자리 잡고 있는 대륙에선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없다. 보통 대륙의 사람들은 갈색이거나, 적색 혹은 금발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여인의 백금발은 굉장히 특이한 것이었다.
여인이 당황하며 전력을 다해 검을 들이댔지만 루이스가 가볍게 막아내며 물었다.
“너야말로 도대체 정체가 뭐지? 산드리아인 맞아?”
루이스는 마주한 칼을 돌려 여인의 복면마저도 베어냈다. 복면이 바람에 날아가며 여인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은색 눈동자와 예쁘게 자리 잡은 콧날과 빨간 입술. 대륙에서는 본 적이 없었던 외양과 본 적이 없었던 미색을 가진 여인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자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으로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내색을 보이며 그대로 뒤돌아 루이스에게서 멀어져갔다.
여인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루이스는 마치 꿈을 꾼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도성을 다녀오기엔 시간이 늦은 듯 하여 루이스는 알렉산더와의 약속 장소로 몸을 돌렸다.
피네 산을 오르며 다시 몸을 돌려 산드리아를 바라보니 어느덧 노을이 붉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은 더욱 향기를 만발하며 흩뿌리고 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라일락 꽃잎이 휘날리며 꽃잎 바람을 만들어냈다.
눈앞에 보이는 꿈결 같은 풍경에 루이스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꿈 자락의 한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산드리아의 노을과 바람, 그리고 신비롭게 아름다웠던 낯선 여인까지 -
산드리아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어느 봄날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