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꽉 감고는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팔짱을 끼고 있는 자세 덕분에 오랜 시간 검술훈련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팔뚝이 더욱 도드라져서 간호원들은 병실을 돌아다니면서 흘끔흘끔 레오에게 눈을 떼지 못하였다.
레오는 비록 두 눈은 꽉 감고 있었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면서 성문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엘레아가 메르헨의 군대와 함께 산드리아를 떠나가고 있는 소리-
레오가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메르헨의 군대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레오의 마음속엔 텅 빈 듯 한 공허함이 밀어닥쳤다.
‘ 공주님이 산드리아에 없다. 공주님이 궁에 없다. 공주님이……. 나의 곁에 없다.’
마치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 의미 없이 느껴질 만큼의 깊은 공허함이었다.
같은 시각, 엘레아는 마차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산드리아의 모든 것을 눈에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엘레아가 후계자로서 왕재교육을 받던 시절, 정치수업에서 인접국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10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 이었기에 심도 있는 내용은 아니었겠지만 엘레아는 그마저 라도 기억해내기 위해서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기후가 따뜻하고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산드리아와 달리 메르헨의 기후는 몹시 춥다고 하였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산드리아와 달리 메르헨은 산드리아와 서고트 사이에 있는 대륙 국가였다. 그마저도 대부분 산악지대인지라 곡식이 풍요롭지 못하다 하였다.
‘ 곡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드리아를 침략한 것이겠지.’
루이스는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성인이 되기 전에 왕위에 올랐다고 들었는데 어느 새에 대군을 키워 산드리아를 정벌한 것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 루이스 빌로험프……. 도대체 어떤 자일까.’
엘레아는 피네 산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려보았다. 사실 산을 내려가는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자가 조프리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모종의 위협 속에서 자라왔기에 엘레아는 자신을 향한 살기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루이스의 시선은 분명 살기가 아니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호기심어린 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호기로움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메르헨의 군대가 들이닥친 날.
그는 자신을 살려주었다. 분명 그의 군대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그는 자결하려는 자신의 칼을 막아냈다.
깨어난 뒤 처음으로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던 루이스는 레오를 처형하겠다는 험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눈빛은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루이스와의 지난 만남을 찬찬히 되짚어보니 그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했던 엘레아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엘레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 * *
유난히도 붉은 산드리아의 저녁노을이 오늘도 어김없이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침대에 앉아 요지부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레오에게 간호원이 식사를 들고 왔다.
“대장님. 식사하세요.”
역시나 레오는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다. 이렇게 아침과 점심식사를 모두 걸렀기에 간호원은 식사를 무르지 않고 재차 말을 걸어왔다.
“ 대장님. 조금이라도 드셔야지요. 오늘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어요.”
그제야 레오는 꿈쩍 않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간호원은 식사를 든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원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식사하십시오. 오늘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자신이 엘레아에게 제일 자주한 말 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자신이 식사를 건넸을 때 엘레아는 여기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치긴 했지만.
두터운 갑옷을 입고는 식사를 공손하게 양손에 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것을 자신의 수하가 보았다면 무척이나 우스웠겠다 는 생각이 이제야 들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오가 엘레아를 처음 만난 것은 13년 전인 그의 나이 12살 때였다.
레오는 이미 엘레아가 태어나던 시점부터 패트릭이 사윗감으로 점찍어놓은 정혼자였다. 패트릭은 로렌왕비가 임신을 한 순간부터 그 아이를 후계자로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한 상태였다. 여왕의 선례가 있었기에 딸이 태어나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차비의 소생인 장성한 아들 조프리가 있었지만 패트릭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난 적통 후계자에게 이 나라를 물려주고 싶었다.
패트릭이 라키스트 가문의 후계자를 일찌감치 엘레아의 짝으로 점찍어 둔 것은 엘레아의 왕위계승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조프리의 생모인 차비는 산드리아에서 가장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메릴린가문의 여식이었다. 반면 왕비인 로렌은 산드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발칸반도에 위치한 소국(小國)의 공주였기에 뒷배가 되어줄 세력이 없었다.
그랬기에 엘레아의 후계자리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군권을 가지고 있는 라키스트가문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워낙 어릴 때 혼인이 약조된 터라 레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유모는 ‘못난이 공주님과 결혼해야하는 불쌍한 레오!’라며 장난스레 놀리곤 했었다.
못난이 공주님과 결혼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슬퍼서 놀림을 받을 때마다 엉엉 울던 꼬마 레오는 어느덧 자라서 12살이 되었다. 12살은 귀족가문의 자제가 후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는 나이였다.
패트릭의 탄신 파티에서 처음 만난 공주님은 눈부신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귀여운 꼬마아가씨였다. 패트릭과 로렌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며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파티 장을 뛰어다녀 시종들을 진땀나게 만들던 쾌활한 말괄량이 아가씨.
그리고 엘레아가 10살이 되던 해-
조프리와 그의 외가인 몬디아 가문은 패트릭이 엘레아를 후계자로 세우기 전에 그를 독살하고 유서를 조작하여 권좌를 움켜쥐었다. 엘레아의 어머니 역시 조프리가 즉위 한 뒤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외적으로 패트릭과 로렌의 사인은 병사였고, 조프리는 패트릭의 유지를 받고 즉위한 왕이었기에 엘레아를 직접적으로 죽일 명분이 충분치가 않았다.
어린 엘레아까지 죽인다면 패트릭에게 충성했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거센 지탄을 받을 것이 두려워 탑 속에 유폐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서 엘레아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지만.
15살의 레오는 급작스레 벌어진 모든 일이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조프리의 즉위식에 참가했을 때 엘레아가 보이지 않아 묻자 아버지는 ‘ 공주님은 더 이상 너의 정혼자가 아니다.’
라는 엉뚱한 말을 대답으로 내놓았다.
모든 것이 궁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라 패트릭과 로렌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조차 레오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패트릭에게 충성했던 라키스트 가문은 다시 조프리에게 충성하였다. 아버지는 원래 우리 가문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산드리아의 왕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왕좌에 앉는 사람이 우리가 충성을 바칠 주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꼬마 엘레아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레오가 20살이 되던 해- 라키스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궁궐 수비대장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엘레아가 비체트 궁 꼭대기에 유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현 시점에서 궁궐 수비대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엘레아를 감시하는 일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렇게 다시 만난 15살의 엘레아는 더 이상 쾌활한 말괄량이 꼬마아가씨가 아니었다. 레오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이 소녀가 자신이 기억하는 엘레아가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엘레아가 머무르는 방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앞은 무장한 병사 2명이 지키고 있었다.
처소를 지키는 병사들에 말에 의하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거르고 하루 종일 멍하게 창가를 바라보며 앉아있다고 하였다.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로 레몬케이크를 먹던 꼬마아가씨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레오는 모든 임무를 마치고 귀가하기 전에 엘레아의 처소에 들려 작은 철창을 통해 엘레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임무 확인 차였지만, 점점 탑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리고 엘레아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쓰리고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매일 눈가가 짓물러 빨갛게 충혈 되어 있는 이 어여쁜 소녀에게 쾌활한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점점 더 엘레아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아른거렸다. 집에 돌아가 잠을 청하기 위해 누울 때도 생각이 났고, 검술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식사를 할 때도 –
처음 겪는 욱신거리고 간질거리는 마음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레오는 점차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엘레아는 원래 자신의 정혼자였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고 싶었다.
게다가 비열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조프리는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국가 재정을 탕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는 결심했다.
아버지와 라키스트 가문을 지키면서 엘레아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라키스트 가문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산드리아의 왕을 섬기는 것이라면, 엘레아를 산드리아의 왕으로 만들겠다고.
그렇게 엘레아는 레오 라키스트의 유일한 주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