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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엘레아
작가 : 마리장
작품등록일 : 201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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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낯선 곳이 가장 편안한 법
작성일 : 17-07-31     조회 : 307     추천 : 0     분량 : 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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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오라버니! 좋은 아침 이예요.”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사라 대공부인과 알렉산더에게 활기찬 아침인사를 건네며 에리카 역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곧 시종이 에리카의 식사를 가지고와 앞에 얌전히 놓아주었다.

 

  “우리 늦잠꾸러기가 웬일로 일찍 일어난 것이냐?”

 

 알렉산더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사라 대공 부인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궁에 들어가려고요.”

 

  “ 이렇게 이른 시각에 궁에는 무슨 일로?”

 

  “ 그, 그냥... 전하의 도서관에서 빌릴 책이 있어서요.”

 

 사라 대공부인과 알렉산더가 번갈아 질문을 하자 에리카는 대충 얼버무리며 몇 술 뜨지도 않은 아침식사는 그대로 두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는 어제 엘레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얇은 옷차림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3월이면 꽃이 만개하는 산드리아와 달리 메르헨은 4월이 되어도 가끔 눈이 내릴 정도로 추웠다.

 

  루이스가 왕녀의 옷까지 일일이 챙길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또 신경을 쓴다 한들 왕녀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부터 급히 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시종을 미리 보내 찾아뵙겠다는 연락을 넣었기에 루이스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에리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고요하여 적막감마저 감도는 본궁에 에리카의 급한 발걸음이 쿵쿵 울려 퍼졌다.

 

  쿵쿵 울리는 급한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 뭐가 저리 급해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에리카가 들어섰다.

 

  “전하.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잠은 푹 잘 잤다마는 아침부터 뭐가 그리 급해서 이 소란인거야.”

 

  루이스의 질문에 에리카는 대답 없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루이스 앞에 앉았다. 에리카는 자리에 앉자마자 엘레아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전하. 엘레아 왕녀를 마음에 두신 게지요?”

 

  “이상한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냥 가여워 그런 것이다.”

 

 루이스는 에리카의 직접적인 물음에 민망해져 시선을 손에 들고 있던 책에 파묻으며 대답했지만 왠지 얼굴도 화끈거리고 귓가도 간질거렸다.

 

  하워드 대공에겐 솔직하게 엘레아의 미모에 끌려 살려준 것이라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에리카는 – 아무리 왈가닥이라 하더라도 – 여자이고, 어리게만 보이는 동생인지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에리카는 루이스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다시 물었다.

 

  “에이 전하. 제가 전하를 한두 해 봐온 것도 아니고. 어찌 이렇게 티가 나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거예요. 정말 엘레아 왕녀에게 아무 흑심이 없으신 거예요?”

 

  “흑심이라니!”

 

  루이스가 ‘흑심’이라는 표현에 발끈하여 소리를 높였지만 에리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남자들의 그렇고 그런 마음은 다 흑심이죠 뭐. 전하라고 다르시겠어요.”

 

  “어휴……. 도대체 아버님께서는 너의 어디가 마음에 드시어 그리도 총애를 하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루이스의 말에 에리카가 여느 아가씨들처럼 ‘호호호’ 작게 웃었지만 루이스의 귀에는 이마저도 호탕하게 들렸다.

 

  “선대왕께서는 저의 이러 당돌함이 어여쁘다 하셨지요. 전하. 제가 엘레아 왕녀와 가깝게 지내도 될까요? 처소를 드나들고 만나는 것은 전하의 허락을 받아야 될 듯싶어서요. 사실 어제도 왕녀의 처소를 찾아가서 만났어요.”

 

  에리카가 엘레아를 만났다는 이야기에 책에 파묻혀 있던 루이스의 시선이 다시 에리카에게로 향했다.

 

  “뭐? 왕녀를 왜 찾아간 거야?”

 

  “궁금해서요. 어제 전하께서 레지덴 궁에 당도하시지 전부터 이미 소문이 파다했어요. 전하께서 엄청난 미모의 산드리아 왕녀에게 푹 빠지셨다고. 전하의 연애사는 온나라의 관심사인데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어요?”

 

  벌써 왕녀의 소문이 파다하다는 소리에 루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소문이 안 날래야 안날 수 없는 솔깃한 이야깃거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해도 엘레아에 관한 일들은 남자 루이스에게도, 국왕 루이스에게도 조심스러운 사안이라 그녀로 인해 궁이 소란스러운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

 

  걱정과는 별개로 엘레아와 에리카의 만남이 내심 궁금하긴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할까.

 

  “그냥 인사만 나누었을 뿐이에요. 전하께서 푹 빠지실 만 해요.”

 

  “저기, 에리카……. 자꾸 누가 푹 빠졌다는 거야.”

 

  에리카는 발끈하는 루이스의 반응이 재미나서 계속 놀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남매처럼 자랐다 하더라도 루이스는 왕이니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겠다 싶어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전하. 제가 아침부터 온 것은 전하께 허락받을 일이 있어서예요. 어제 왕녀를 만났을 때 보니 입고 있는 의복이 계속 신경 쓰이더라고요. 물론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그래도 왕녀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으니 제가 직접 챙겨도 될까요?”

 

  루이스는 에리카가 직접 엘레아를 챙겨준다면야 마음도 놓이고 좋았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왕녀에게 마음을 쓰는 거지? 네가 특별히 친절을 베풀 이유는 없는 거잖아.”

 

  “어제 왕녀를 보니 마음이 아팠어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은 모두 독살을 당하고, 10년을 유폐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나라도 멸망하고...... 지금 억지로 끌려온 거잖아요.”

 

  에리카가 ‘ 나라도 멸망하고, 억지로 끌려왔다’라는 말을 할 때 루이스는 찔리는 듯이 가슴이 따끔거려 자책하듯 말하였다.

 

  “왕녀가 가지고 있는 슬픔의 절반은 내 몫이구나.”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알아. 왕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에리카.”

 

 

 * * *

 

 

  루이스와 아침식사를 마치고 처소에 돌아온 엘레아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규모가 제법 큰 도서관이라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공주님. 클레인 공녀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엘레아는 어제 만난 에리카가 또 무슨 일로 찾아왔나 싶어 의아했지만 그녀의 방문이 싫지는 않았다. 혼자지내는 것이 그저 익숙한 것일 뿐, 결코 재미나고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엘레아는 급히 접견실로 이동하여 에리카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세요. 에리카 공녀.”

 

  엘레아가 에리카를 공손하게 맞이하여 자리에 앉자 곧 마가렛이 따뜻한 레몬 티와 생강쿠키를 올렸다.

 

  “분명 어제 뵈었는데 제가 아침부터 왜 찾아왔나 궁금하시죠?”

 

  엘레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하였다. 에리카가 밖에 있는 자신의 시종에게 명을 내리니 남자 시종 2명이 커다란 궤짝을 들고 와 앞에 놓았다.

 

  함을 열어보니 외출할 때 메르헨의 찬바람을 막아주는 드레스용 망토가 여러 벌 들어있었다.

 

  “어제 공주님의 드레스를 보니 너무 얇은듯하여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처소에서만 지내시지 마시고 가끔 산책이라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엘레아는 생각지도 않은 에리카의 호의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난감했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인데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그 속내가 궁금했지만, 그녀가 결코 나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직 레지덴 궁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셨죠? 물론 비체트 궁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지시겠지만 나름 웅장한 맛은 있답니다.”

 

  내숭과 가식이 무기인 귀족가의 아가씨가 어쩜 이렇게 시원시원하고 솔직할까 – 라는 생각을 하며 엘레아는 산책을 하자는 제안에 긍정에 대답을 하였다.

 

  레몬티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리카가 손수 망토를 꺼내 엘레아에게 둘러주고 리본으로 예쁘게 여미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망토도 손수 두르고는 함께 처소를 나섰다.

 

 

 * * *

 

 

  에리카와 엘레아가 함께 정원에 나타나자 궁 안은 궁인들의 쑥덕거림으로 소란스러웠다. 특히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인 엘레아가 나타나자 더욱 그러하였다.

 

  레지덴 궁의 정원은 아직 꽃이 만개하지 않고 꽃망울이 살짝 맺어있는 정도였다. 산드리아의 정원에 비하면 크기는 훨씬 컸지만 꽃 보다는 초록 잎이 더 많아서 숲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드리아의 비체트 궁에 비하면 소박하지요? 처소는 지내시기에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엘레아는 에리카의 질문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에리카는 평균의 여인보다도 큰 키를 가지고 있어서 엘레아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키가 컸다.

 

  엘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에리카를 응시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굳게 다물었던 작고 빨간 입술을 열었다.

 

  “저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속내가 궁금합니다. 저는 패전국의 왕녀일 뿐, 포로와 다름없는 신세입니다. 저와의 친분이 공녀께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으실 텐데요. 그리고 아직은 메르헨 사람과 친분을 맺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가 좋고 싫음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긴 해요. 공주님을 어제 처음 뵈었을 때부터 마음이 쓰이고 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니까요.”

 

  에리카는 멈추었던 걸음을 내딛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니 낯설고 두려운 마음도 드시겠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밀어내진 않았으면 해요. 처소에서만 지내지시 말고 궁에서 산책도 자주 다니시고요. 무엇보다도....... 저희 전하가 지금은 원망스러우시겠지만...... 이렇게 얽힌 운명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너무 밀어내지 않으셨으면 해요.”

 

  에리카의 말은 따뜻하고 다정하여 엘레아는 딱딱하기만 했던 자신의 마음이 아주 조금 말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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