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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엘레아
작가 : 마리장
작품등록일 : 201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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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어여쁜 날
작성일 : 17-07-31     조회 : 310     추천 : 0     분량 : 5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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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식사를 마친 엘레아는 책을 한권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켈리 공작부인은 공주이지만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그녀의 도서관에는 꽤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있었다.

 

  엘레아는 켈리 공작부인의 도서관에서 주로 메르헨의 역사에 관련된 서적을 읽었다. 자신이 메르헨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주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산드리아와 달리 메르헨은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대륙의 위치한 삼국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군단을 가지고 있지만 여식에게는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검술뿐 만아니라 여식에게는 정치나 역사 등의 학문도 심도 있게 가르치질 않았다. 메르헨에서 여자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사교춤과 악기, 미술, 자수 정도였다.

 

  반면 산드리아는 아들이 없으면 여식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경우도 흔해서 가르침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엘레아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선별해준 학자 밑에서 제왕학과 정치학을 배웠고, 7살 때부터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폐생활 중에는 레오가 제왕학과 정치학 서적을 공급해주어 스승은 없지만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검술 역시 레오에게 직접 배웠기에 기술적인 면에서는 어느 기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엘레아는 유폐생활이 힘겹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헛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메르헨에 도착한 이후 엘레아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도서관 덕분이었다.

 

  엘레아가 한창 책을 읽고 있을 때 마가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채비하러 나오시지요.”

 

  엘레아는 이 시각에 루이스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에 의아해졌다. 메르헨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식사를 같이 한 이후, 루이스는 매일 아침 엘레아를 불렀다.

 

  아침식사 시간은 루이스가 개인적으로 보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각종 회의와 공무로 가득 차 있어서 엘레아와 한가로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엘레아가 책을 덮고 도서관에서 나와 그대로 루이스에게로 가려하자 마가렛이 엄한 목소리로 저지하였다.

 

  “이대로 가실 겝니까? 의복을 갖추시고 가시지요.”

 

  엘레아는 루이스가 자신을 아름답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엘레아 는 한 나라의 군주를 꿈꾸던 여인이었다.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한다는 것이 우습고 치욕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엘레아는 마가렛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하게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나는 궁인의 말조차도 거역해선 안 되는 처지 아닌가.’

 

  엘레아는 권력이 신분과 지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레지덴 궁에서 왕녀의 지위를 인정받아 예우를 받고 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일개 궁인만도 못하다는 것을. 마가렛의 말을 거역하기 위해서는 마가렛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져야만 했다.

 

  사실 멸망한 나라의 왕녀인 자신을 이 정도로 예우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엘레아는 순순히 마가렛이 입혀주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 마가렛은 엘레아의 윤기 흐르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으며 나직하게 말하였다.

 

  “제가 왜 굳이 공주님을 치장 하는지 궁금하시겠지요.”

 

  마가렛의 말에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던 엘레아가 거울 속으로 비치는 마가렛의 눈을 응시하였다. 마가렛은 엘레아의 머리를 빗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의 유모였습니다. 전하께서 장성하신 이후에는 본궁의 관리를 맡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전하께서 직접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루이스가 자신의 유모를 궁인으로 보냈다는 말에 엘레아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마가렛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공주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전하께로 가시지요.”

 

  마가렛은 엘레아의 머리를 빗은 뒤 리본으로 장식한 후 항료를 발라주는 것으로 꾸밈을 마무리했다.

 

  엘레아는 마가렛이 루이스의 유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의 유모라면 자신의 최측근이자 정서적으로도 무척 소중한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을 자신에게 보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이 루이스에게나 마가렛에게나 미안한 일을 한 것이 없는데도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나쁜 자식이야. 내 나라는 망하게 해놓고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도록 살려놓고. 이젠 마음대로 미워하지도 못하게...... 왜 잘해주는 거야.’

 

  엘레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껏 원망하고 싶은데 원망할 수 없다.

 마음껏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 수 없다.

 

  따뜻한 눈빛에 마음이 녹아 그를 정말 사랑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엘레아는 두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루이스에게로 향하는 엘레아의 발걸음이 전투를 나가는 기사처럼 비장했다.

 

 

 * * *

 

 

  루이스는 엘레아와 에리카가 산책을 지켜본 뒤 곧바로 자신의 정원에 작은 온실을 만들도록 지시를 하였다.

 

  자신이 비체트 궁에서 보았던 정원을 떠올려보니 레지덴 궁의 정원은 정말 삭막했다. 엘레아가 커다란 숲처럼 느껴지는 정원을 거닐며 더욱 산드리아를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되었고, 산드리아의 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작은 온실이지만 산드리아에서 직접 꽃을 공수해와 제법 비체트 궁에서 본 정원의 화려한 모습을 제법 갖추었다. 꽃을 관리하기 위해서 정원사 역시 비체트 궁의 정원사를 데리고 왔다.

 

  루이스는 정원 의자에 앉아 엘레아를 기다리며 향기를 만발하는 꽃과 새까만 하늘과 그리고 달빛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어여쁘고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지금 눈앞에 서있는 여인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루이스는 엘레아를 볼 때마다 그녀의 미모가 놀라웠다. 엘레아가 너무 아름다운 것인지 자신이 사랑에 빠져 더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에리카도 아름답고, 메르헨에서도 산드리아에 비체트 궁에서도 아름다운 여인은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들 뿐,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엘레아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싶었고, 아기피부 만큼이나 투명한 볼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과 마음을 가진 얼음공주님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면-

 

  엘레아는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엘레아에 인사에 루이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섰다. 엘레아가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올려다보자 서로의 눈이 마주하였다.

 

  눈이 마주치자 루이스는 미소를 지었지만 엘레아는 어색함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루이스는 그런 엘레아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꽃구경이나 하자.”

 

  갑작스런 손길에 엘레아가 깜짝 놀라 손을 빼려하였지만 루이스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더욱 꽉 잡아버렸다. 엘레아의 작은 손이 루이스의 손 안으로 쏙 들어와 포개졌다. 루이스의 손 안에서 느껴지는 엘레아의 작은 손이 너무 차가워서 루이스는 또 다시 마음이 아려왔다.

 

  ‘이 여인은……. 손끝마저 이리 차가워서 내 마음을 아프고 안쓰럽게 할까.’

 

  루이스는 엘레아의 차가운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온실로 들어섰다.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 밖의 정원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엘레아인지라 아무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작은 정원은 매우 놀랍고 아름다웠다.

 

  루이스가 여전히 엘레아의 손을 꽉 잡은 채 온실을 거닐며 말했다.

 

  “네게 보여주고 싶어서 산드리아에서 가져왔어.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온실에는 시클라스, 데이지, 수국, 아이리스 등 비체트 궁에서 아름답게 만개하였던 꽃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엘레아는 어느 누가보아도 아름답고 청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늘 여성스러운 면이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치장하는데 관심이 없어서 드레스나 보석에도 관심이 없었다. 음악이나 춤, 자수에도 관심이 없었고 소질도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어머니에게 처음 바느질을 배우면서 바늘에 손가락을 마구 찔렸던 기억만큼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다만 엘레아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래도 여자이구나.’라고 생각할 때는 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 느낄 때였다.

 

  물론 꽃꽂이 솜씨는 없지만 – 배운 적도 없고 앞으로도 배울 생각은 없지만 –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에서, 들판에서, 산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꽃을 바라보던 엘레아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덩달아 엘레아의 보폭에 맞추어 걷던 루이스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엘레아는 카라꽃 앞에서 무릎을 굽혀 앉아 한참을 말없이 응시하였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루이스는 덩달아 같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런 엘레아를 말없이 응시하였다.

 

  산드리아에서 카라꽃은 로렌왕비를 상징하였다.

 

  아버지인 패트릭 왕이 로렌을 처음 보고 한 말이 ‘카라꽃처럼 고결하고 아름답구나.‘ 이었다. 그래서인지 로렌왕비의 탄일을 장식하는 파티 장에는 늘 카라꽃이 가득하였다.

 

  여느 왕실의 결혼이 그러하듯 패트릭 왕과 로렌왕비 역시 정략결혼을 하였다. 발칸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공주였던 로렌이 산드리아의 왕비가 된 것은 두 나라 사이에 무역 분쟁을 무마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패트릭은 이미 30세가 훌쩍 넘은 나이로 첫 번째 왕비가 자식없이 병으로 죽어 국모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하였을 뿐, 산드리아 3대 귀족인 멜리아 가문 출신의 차비에게서 조프리를 얻어 이미 12살의 생일을 보낸 상태였다.

 

  로렌은 힘이 없는 작은 나라의 공주로 분쟁을 막기 위해 팔려가듯 패트릭과 혼인을 하였지만 패트릭은 로렌만이 자신의 유일한 아내인 것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로렌과의 사이에서 엘레아가 태어나자 조프리가 있음에도 그녀를 후계자로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엘레아가 보았던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에게도, 자신에게도 차고 넘쳐흐르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 시절에는 ‘아버지와 결혼할거야!’라고 외치고 다니던 엘레아였다.

 

  메르헨에서 카라꽃을 보니 엘레아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산드리아의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도 어머니의 시신은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 채 피네 산의 돌무더기 속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절대로 루이스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겨우겨우 참아냈지만 눈가가 발갛게 충혈 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루이스는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엘레아를 일으켜세워 품에 안았다.

 

  갑자스레 품에 안긴 엘레아는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루이스는 그런 엘레아는 단단한 두 팔로 가두었다.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울어. 마음 아프게 하려고 이런 건 아닌데…….”

 

  루이스의 다정한 말에 엘레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루이스의 단단한 두 팔이 믿음직스럽게 든든해서, 온 몸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따뜻해서, 얼굴을 기댄 가슴에서 요동치는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서 - 엘레아는 루이스 앞에서 항상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스르륵 풀어버렸다

 

  새까만 밤하늘에 달은 맑은 빛을 내고, 별은 반짝거렸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도 감정이 비쭉거리며 튀어나오게 되는 시간-

 

  달빛과 별빛과 꽃향기가 함께 만들어내는 – 마법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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