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소는 비현이 알려줄 것이다. 오늘은 이만 쉬도록.”
“(꾸벅)”
“자, 린님.”
“(끄덕끄덕)”
윤을 뒤로하고, 기다리던 비현에게 마야가 부탁했다. 안내한다는 그를 따라 나섰다. 지함과 지나치면서 냉랭한 그의 태도가 다소 싸늘했다. 마야는 그를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신녀님께서는 류소전(留所殿)에서 지내시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 추가(家)의 상궁이 보필할 것입니다. 너무 불안해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단비님은 상냥하신 분이세요. 걱정 마세요, 린님.”
“오호, 고운 이름이시군요!”
“그렇지요? 후후후”
어색하게나마 웃는 린이었다. 거의 다 도착한 듯 싶었다. 과하게(린이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정갈하고 바르게 서있는 미모의 상궁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를 갖추어 절을 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녀님. 앞으로 신녀님을 모실 추가의 단비라 하옵니다. 이 아이들이 성심성의껏 모실 것이옵니다.”
“으... 에...”
“아마도 고마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비.”
“네, 마야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께서 고되다고 엄살을 피우실 것 같아... 신녀님, 마음 편히 계십시오.”
“살펴가십시오, 비현님.”
단비에게 눈을 한쪽 찡긋 날리는 비현이었다. 그를 보며 손이 덜덜 떨리고 몇 대라도 패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삼켰다. 생각보다 젊은데도 대상궁이었다. 아마 궁에서 나고 자란 탓일까?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은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린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말이 안 나오시니... 땅의 글자를 알지 못하시지요...”
“정 필요하시면 저를 부르세요. 저에게 하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은 바로 린님을 위해서 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마야님.”
“저 또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단비.”
“(꾸벅)”
“쉬세요, 린님.”
그렇게 모두가 돌아가고, 어린 상궁들이 커다란 대야 같은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향기 나는 꽃잎들을 뿌리고 귀한 약초술을 부었다. ‘실례 하겠습니다’라며 단비가 린의 옷을 벗겼다. 먼저 발 먼저 닿는 물의 온도는 적당했다.
“백옥같이 고우세요.”
“(도리도리)”
“진담입니다. 저 역시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끄덕끄덕)”
“안타깝네요, 얼마나 답답하실까...”
“으... 에...”
매끈매끈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 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밝아진 얼굴이 귀여워, 보는 사람이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분이구나’ 단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새 옷으로 시중을 들고 이젠 밥상을 들고 왔다.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수저로 가리키다)”
“열매요?”
“(끄덕끄덕)”
“좀 더 드셔요. 그렇게 마르셔선...”
“(도리도리)”
소금으로 이까지 닦고 오늘을 마감할 시간이었다. 푹신한 잠자리가 좋아 싱글싱글 웃으며 촉감을 느껴보는 린. 불을 끄며 물러나는 단비와 상궁들. 그녀는 곧 잠에 들었다. 새벽 무렵, 잠든 침방 밖에서 소리 작은 말들이 오고갔다.
“폐하!”
“추. 그 아이는 어떤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순수하고 순하십니다.”
“그런가... 잠깐 살펴보지.”
“예? 폐하, 하지만!”
“비켜 서거라.”
엄한 말투로 일갈하는 윤. 방문을 열어 들이닥쳤다. 색- 색- 잠들어 곤한 숨소리를 내는 린을 보며, 왠지 모르게 몽롱하게 젖어드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 차마 이용해서는 안 될 것만 같다고 마음으론 다그쳤지만 머리로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호흡이 달라진 그녀. 서둘러 단비를 부른다. 그 소리에 놀라 들어오니 겨우 숨만 내뱉고 있었다. 흉부에 손으로 꾹 눌렀다 떼어내고를 반복했다. 강한 힘으로 누르자, 입에서 ‘헉!’하는 소리와 함께 안정을 되찾았다.
윤은 놀랐고 초조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한번 내려다보고는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린의 입에서 한줄기의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다급히 소녀를 깨우자, 눈을 떴다가 곧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잠이 들었다.
“왜? 왜...?”
아침이 밝았다. 일찍 일어난 린은 차분히 잠자리를 정리했다. ‘단비입니다, 린님’ 그러곤 문을 열고 들어와 그것을 보자 펄쩍 뛰면서 말렸다. 그렇게 실랑이 하다가 린이 졌다. 입이 삐죽 나왔다.
“일어나셨사옵니까, 신녀님. 대상궁님, 문오 지함 무사님께서 오셨사옵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오늘부터 신녀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들어가도 되겠지?”
“네, 알겠습니다. 신녀님, 이 분은 문오 지함님이십니다.”
문무가 모두 뛰어난 천희국 제일의 검이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그의 가문 또한 명문가로, 모든 형제분들도 뛰어나시지요. 황제폐하의 호위무사이시고 든든한 아군이십니다. 그러나 본 적이 없는 것은 믿지 않는 분이라, 신을 포함한 존재들은 믿지 않으시다고 소문이 자자하지요. 성품 또한 차갑고 대쪽같은 분이십니다.
“그만.”
“송구합니다, 문오님.”
“신녀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부디 얌전히 계시길 바랍니다.”
“(끄덕끄덕)”
쌀쌀맞기 그지없는 남자. 그 의모는 여자들이 줄서고 남을 텐데 그 성정이 영 재수가 없었다. 궁내 여인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큰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저 순수함이 보이지도 않는지...
“축하연회를 연다고 하셨습니다. 신녀라는 증좌를 보이셔야 되니, 능력을 연마하라 하셨습니다.”
“아...?”
“할 수 있는 게, 있긴 합니까?”
“……”
땅의 기운을 받아, 나무와 함께 태어났다. 물의 힘으로 탄탄하게 자랐다. 햇빛으로 인해서 잎을, 꽃을, 열매를 피었다. 모두에게 도움 받은 것밖엔 없었다. 대지를 윤기 있게, 고르게, 양기로 치유할 수는 있었지만 연회에서 내세우긴 힘들다.
“으에...”
“네?... 음? 마야님을 말씀하세요?”
“(끄덕끄덕)”
“모시고 오겠습니다.”
상궁들은 저기 멀찍이 서있고, 린과 지함이 대면하고 있었다.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떨리고 무서웠다. 매우 춥게만 느껴졌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따위 믿지도 않지만, 폐하께 짐이 된다면 단칼에 목숨을 거두겠다.”
“……”
“그러니 제.대.로 해내는 게, 좋을 거야.”
“(꾸벅)”
겁먹지 말자, 린.
넌 이미 소원을 이뤘어.
더 욕심 내지 말자.
“부르셨습니까, 린님?”
“(시늉)”
“챙겨왔어요. 여기요.”
“((문오님, 전 땅의 힘과 나무의 힘을 다룰 수가 있어요.))”
“뭐지? 마야.”
“머릿속 말을 전달하는 가루약입니다. 급하지 않으면 다량으로 사용할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