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함- 지함! 아니 글쎄 동침하셨다네!”
“그것이 어쩌란 말입니까?”
“만월에 음기를 받힌 여인들은 모두 새벽녘에 달아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신녀님은 아직 안에 계시다네!”
“……”
궁녀들과 상궁들이 속닥이는 것을 보았다. 어느 흉문에는 황제가 남자구실로 못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신녀는 달랐다. 왠지 다들 되었다고 좋은 분위기였다. 비현도 흥분하여 지함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그때, 침방 문이 열리고 신녀가 나왔다. 왠지 숙덕이던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는 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현의 유독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운 그녀를 이끌어 지함이 움직였다. 왜들 그러지? 이상해서 뒤를 보았지만 그에게 끌려갔다.
“아…!”
고단하실 폐하를 깨우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비현은 손까지 흔들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폐하…!”
벌컥 문을 밀어 침방에 들어간 비현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잠든 윤을 발견했다. 아… 얼마 만에 달콤한 휴식인가. 조용히 물러났다. 상궁들에게 폐하를 잠시 깨우지 말라 이르곤 자신의 일터로 향했다.
만월이 지나고… 윤을 따라다니는 린. 어딜 가든 뒤에서 새끼오리 마냥 따라다녔다. 그만두라 해도 결코 조금 먼발치에서 졸졸 따라나섰다. 명령해도, 화를 내도 그러했다. 마치 어미오리를 쫒아 다니는 듯이 말이다.
“그만 두라 하였다.”
“(안 돼요. 불안해요)”
“얌전히 류소전에 있으라 했다.”
“(만월의 저주를 그냥 내버려둬선 안돼요.)”
린은 강하게 주먹을 쥐어서 새하얘진 손을 잡았다. 윤은 그것을 거칠게 내팽겨 쳤다. 화가 났다는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았다. 안돼요, 안돼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내버려두라.”
“((폐하…))”
“네가 해결해 줄 수라도 있더냐?!”
“(제 기운을 드릴게요. 굳이 여인들이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신령이니까, 그 정도의 힘은 있어요.)”
“그럼 내 심장도 고칠 수 있느냐?”
“(폐하… 감내하지 마세요. 죄책하지 마세요. 그 분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함부로 짓 꺼리지 말거라.”
차갑고 불안한 윤의 뒷모습에 애가 타는 린이었다. 그 상처는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사랑하고 있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행복해야만… 그래야만… 사람으로까지 분한 자격이 된다.
“오셨습니까, 린님.”
“(꾸벅)”
“궁녀를 물릴까요?”
“(끄덕끄덕)”
“네가 물러나도록.”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 가녀린 제 마음도 상처 받습니다.”
“비현… 너야말로 왜 그러는 것이냐.”
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날렸다. 작게 웃는 린이 귀엽지 아니한가. 왜 저런 애타는 마음을 폐하께서는 몰라주시는지. 비현 저까지 원망스러웠다. 익숙하게 작은 방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해 오는 린이었다.
“린님의 차는 어떻게 이런 맛이 납니까? 풀향이 상큼하고 시원합니다. 절로 편안해지는 효력이 있습니다.”
“(감사해요. 제 작은 능력이에요.)”
“오호…. 드시지요, 폐하?”
“생각 없으니, 마음껏 쳐먹거라.”
쌀쌀 맞으시기도 해라! 비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린은 차를 윤의 곁에 놓았다. 나라를 살피시는 폐하를 위해서 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래도 저렇게 내치지 않으셔놓고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린을 몰래 바라보는 윤.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쳐다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상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시 린을 살펴보는 윤. 얇고 투명한 피부, 고운 목선. 가녀린 팔과 다리.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5, 6살 되는 아이들이 읽는 설화를 읽기 시작하는 린. 집중하면서 입을 내미는 모습이 귀여워 짧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비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함의 냉랭한 모습이 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
“뭔가, 지함?”
“아닙니다.”
“싱겁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 황제. 그에 따라 일어나는 린과 비현이었다. 어떤 말도 없이 집현전을 나섰다. 계룡전의 정원 뜰로 향하는 그. 졸졸 따라붙는 것이 내심 귀엽고 우스웠다. 저 맑은 눈이 어리둥절하게 크게 뜨는 게 사랑스러웠다.
“신녀가 아니라, 새끼 오리 한 마리를 키우는 것 같구나.”
“(미소)”
“그래서 짐을 지키겠느냐?”
“(저도 할 수 있어요.)”
“우습구나.”
“(폐하는 제가 지킬 거예요.)”
살살 풀어지는 윤의 표정. 비현은 그럼 그렇지, 하며 뿌듯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함은 내심 불편했다. 저 여자가 얼토당토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 힘은 무시할 수 없으나, 그래봤자다. 강하다면 얼마나 강하다고.
* * * * * * * * * * *
“커헉...! 크으...!”
모두가 잠이 들 무렵, 옥죄여 오는 악령의 그림자. 검은 기운은 윤을 압박하고 있었다. 린의 말이 맞았다. 여인들의 음기가 아닌, 린이 부여한 땅의 양기가 저주를 밀어내려고 하자 검은 기운이 틈새를 찾아 잡아먹으려고 했다.
“크헉...! 으헙... 컥!”
“((폐하!))”
“폐하, 폐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폐하!”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린이 다시 윤의 손목을 잡고, 혈관을 통해서 땅의 기운을 불어 넣고 있었다. 땀이 맺히고, 그녀는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감추려고만 했다. 방대한 힘을 사용하고 그만 쓰러지고야 말았다.
“((폐하…))”
“린님! 신녀님!”
“크헙... 하아... 하악... 린? 린?”
“의원은! 의원은 아직이냐?!”
혈색이 안 좋았다. 윤이 일어나서 린을 깨우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험하고 강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폐하…)”
“린? 깨어난 게냐?!”
“(끄덕끄덕)”
“어떠냐? 어디 아픈 곳이 있느냐?”
“(도리도리)”
“후우….”
미안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린. 그녀가 참으로 애달프다. 이대로 가버릴 까봐, 윤은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이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짐을 따라다니며 꽥꽥 울어야 하지 않느냐. 이번에도 네가 나를 살렸구나.”
“(도리도리)”
“오리야, 배가 고프지는 않느냐?”
“(끄덕끄덕)”
“여봐라-! 밥상을 들이라!”
온통 풀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바라보는데...
“육식은 안한다고 들었다.”
“(웃음. 끄덕끄덕)”
“많이 먹어라.”
“(끄덕끄덕)”
윤이 한 입 집어 먹더니... 젓가락을 내려놨다.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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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을 보내셨나요, 남가 아가씨?”
“넣지는 않았어요. 린님이 안 계신가요?”
“네, 지금은 하루 일과를 충실하게 하고 계십니다. 발 빠른 아이에게 오셨다고 이를까요?”
“아니에요. 그런데 그 일과가 뭐죠?”
“그것은 말씀 드릴 수가 없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가씨.”
연통을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꽤나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궁에 와도, 보이지 않은 신녀. 아영은 대신해서 오라비인 주호를 만나러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총총 폐하 뒤를 따르는 린을.
다급해졌다. 왜? 왜?
“폐하, 남가의 아영이 인사드리옵니다. 그간 평탄하셨는지요?”
“어... 아...”
“오랜만이오, 아영. 주호를 만나러 온 것이오?”
“린님을 뵈러 왔으나, 안 계셔서...”
“아, 미안하오. 짐의 용태가 안 좋아, 신녀가 치료해주었소. 짐이 너무 붙잡아둔 모양이군.”
“그럼!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많이 아프셨나요?”
“괜찮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는 린, 아영은 불안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달라졌다. 윤과 린의 그 공기가 달라졌다. 신녀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계신다. 안돼-! 안돼!
아영에게 다가와 손을 부여잡는 린. 그 손을 내팽겨 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폐하께서는 여유롭고 다정하셨지만 언제나 선을 긋고 계셨다. 그것을 허물고 애정 담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비가 되면 그 역할은 자신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미안하오. 시급한 문제들이 많아 시간을 내주진 못하겠군.”
“폐하……!”
“오늘은 쉬도록 해라, 린.”
“(끄덕)”
아시는 거다. 자신이 무엇을 말할 지를 폐하께선 아시는 거다. 결국 울음이 터졌다. 린 역시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다. 아영은 그녀를 약한 힘을 때리고, 또 때리고 몸부림쳤다.
“(미안해요.)”
“뭐가요? 뭐가 말이죠?!”
“(잠시만 욕심낼게요. 많이는 바라지도 않아요. 나를 용서해줘요.)”
“하아... 무슨 말이죠?”
“(하늘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세요.)”
“떠난다는 말인가요?”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눈물이 멈춘 아영은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금방 드러나는 슬픈 미소가 믿고 싶게끔 만들었다. 주저앉은 그녀를 일으키고, 소류전으로 향했다. 걸음 걸음이 느렸다.
* * * * * * * * * *
“오리야- 오리야-”
“((폐하?))”
“덥지 않느냐? 오리는 자고로 물에서 놀아야지.”
“(웃음)”
“후원에 호수로 가자-.”
호수가 거울같이 달을 비추는 밤, 신녀를 안고서 앉혔다. 다정하고 달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폐하셨다.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긴 물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볼을 매만지는 윤.
“짐의 오리야-. 내가 너의 어버이가, 형제가, 친우가, 연인이 되어주마.”
“(안돼요. 그러지 마세요.)”
“어째서지?”
“(저는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 거예요.)”
“받지 않도록 노력하마.”
“(안돼요. 짧지만 행복한 꿈이었다고 생각할게요.)”
그런 말하면 빠트려뜨린다? 엄하게 말해보지만, 린은 거부했다. 결국 첨벙하고 호수에 빠져버렸다. 켈록 켈록 기침하는 그녀. 그리고 윤도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꽤나 커서 수영할 수도 있었다. 정말 물속을 적응시키려는 건지 따라하라고 시늉한다.
“어푸 어푸...”
“아직 너무 어린 오리구나.”
“후읍... 켈록 켈록...”
“내 손을 잡고 있어라. 모든 것은 내가 해결해주마.”
그러지마, 윤….
다음 날, 여전히 윤을 찾아온 린. 이제는 황제가 거느린 상궁들과 궁녀들 뒤에서 따라간다. 그 뒤에 린을 모시는 사람들이 이어서 따라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리야?”
“((네, 윤.))”
“짐의 오리야, 어디 있느냐?”
“((여기 있어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