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실의 독
“아악! 흐으... 흡... 흐허엉...”
“아영, 아영! 문 좀 열어봐! 나 좀 보자!”
“싫어! 가! 가라고!”
“이럴수록 난 황제를 죽이고 싶어. 그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열어!”
덜컥, 여닫이문이 열리고... 아영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4대문파의 풍(風)의 힘을 지닌 한설가(家)의 두운은 그녀를 안아주었다. 언제나 그녀를 울게 하는 것은 그 빌어먹을 황제셨다. 아영을 오랫동안 봐오며 연정을 품었었다. 아영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두운, 흑... 흑... 두운”
“울지 마. 걱정 말아, 네가 원하는 걸 줄게.”
“흑...흑...”
아아-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녀를 울리지 않았을 텐데... ‘사랑하고 있어, 아영아.’ 멋대로 굴러 들어온 돌을 빼내야겠지. 아영의 자리를 다시 찾아줘야지. 그러니 아파하지 마, 내 가슴이 미워지니까.
“신녀에 대해서 알아봐. 사람을 붙여서라도.”
“알겠습니다, 두운님.”
“그리고, 제량 어르신을 뵈어야겠다.”
* * * * * * * * * *
“말라가는 땅에 촉촉이 비가 내리는 구나.”
“(제 힘이 아니에요.)”
“안다. 그렇지만 모두 네 능력이라고 생각하겠지.”
“(속이는 게 미안해요.)”
“아니야, 괜찮다. 너의 매화나무는 신성했어. 신령인 너 또한 그렇지.”
나란히 서 린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윤의 손길. 그녀의 물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매만졌다. 눈 안 가득 애정이 충만했다. 그는 린이 부끄러워하자, 귀엽다며 놀려댔다. 이마를 맞대고 가득 미소를 짓는 둘은 달콤하고도 짧은 입맞춤을 했다.
“짐의 비가 되어주겠느냐?”
“……”
“린?”
“(미안해요.)”
“무슨 의미인 거냐?”
“(나는 자격이 없어요.)”
린은 윤의 손길을 빠져나오곤 도망쳤다. 뒤에서 부르는 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황제는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가버릴 그녀가 아니었다. 뭔가가 있다, 뭔가가.
도망친 린이 호흡을 다스렸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쏟아낸다. 그저 옆에 있고 싶다고 욕심 부려서는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럴 자격도 없는 한 낱의 신령이.
“폐하! 과실의 숲에서 나타난 악령들이 주변 땅들과 사람들을 헤치고 있습니다. 그 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많이 희생된 상태입니다.”
“여태껏 뭘 한 게냐! 그런 보고를 왜 이제야!”
“그것이... 바로 2일 전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은막이 있는 것인가? 갑작스럽게 악령이 나타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편전에 대신들이 소집되었다. 신료들도 이상한 현상에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의자를 내리치며 시선을 모으는 황제는 보고를 받았다. 젊은 나의 신료는 의견을 피력했다. 과실의 숲에서 대해서 말이다.
“악령은 달콤한 냄새에 민감하다 하옵니다. 그리고 과일을 먹고 독을 표출하기 때문에 사태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신녀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된다고 사료됩니다.”
“신녀를 말인가?”
“그렇습니다. 단가(家)의 발언이 맞습니다.”
“제량당숙...”
“현명하게 대처하셔야 됩니다, 폐하. 신녀는 나라의 수호신입니다. 이럴 때를 위해서 존재한단 말입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릴 지도 모르는데, 짐의 오리를 보낼 수는 없었다. 신녀라고 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빠르게 소식이 전달되어 도망쳤던 린은 알현을 청해왔다. 겨우 이틀 만에 보는 것인데도 헬쓱하게 보였다.
“린,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폐하.)”
“너는 어린 신령이다. 위험할 것이다.”
“(전 어리지 않아요. 무려 97년을 살아온 걸요.)”
“무어?”
“(걱정 마세요. 폐하의 나라를 저도 지키고 싶어요.)”
허리를 숙여 예를 한 채, 물러났다. 건너편에서 제량을 보았다. 린도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인 듯 하다. 물색 머리칼과 투명하면서도 선명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이는 신녀뿐이었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신녀님, 가까이는 처음 뵙습니다. 저는 황제폐하의 당숙이자 배가(家)의 제량이라 하옵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폐하가 무슨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하셨어요. 저도 이 나라가 좋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분. 감사하옵니다.”
그럼 이만, 자리를 뜨는 제량. 린도 돌아가려는데...
“한설가(家)에서 찾아온 분이 안계셨습니까?”
“(도리도리)”
“제가 아끼는 아이가 신녀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합니다. 부디 맞이해 주십시오.”
“(끄덕끄덕)”
“조심히 살펴 가시옵소서.”
“(끄덕끄덕)”
꼭 뵙고 싶다는 이유가 좋은 것만 아닐 테지만. 차가운 눈과 탐욕스러운 혀가 날름거린다. 물론 아직은 신녀가 필요했지만. 그 애송이가 저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단비. 한설가에서 연통이 있었어요?)”
“아니요. 누가 그러던 가요?”
“(배가의 제량이.)”
“아마도... 아영아가씨의 오랜 친우 ‘두운’님을 말하는 것 같네요.”
“(나를 보고 싶댔어요.)”
단비는 입을 다물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생각으론 아마 좋은 쪽으로 만남을 바라는 게 아닌 것만 같다. 린님을 지켜야한다. 그러나 말로 내뱉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린님, 화전이랑 매실주 드시겠어요? 요새 계속 비를 내려주시니 맛이 남다를 거예요.”
“(끄덕끄덕)”
“금방 준비해올게요.”
“(끄덕끄덕)”
비가 내리니, 제법 운치가 좋았다. 창에 기대어 밖을 보자 모든 것이 이슬이 맺혀있었다. 고였다가 흘러내려 사라지는 모양새가 꼭 자신과 닮았다. 자신을 휘두르며 이용하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저 보고, 듣고, 곁에 있기만 하면 되었다.
“커헉!”
마치 몸속이 불타는 것처럼 울컥 솟아올라온 피를 뱉어냈다. 점점 시간이 촉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단비가, 궁녀들이 보기 전에 흔적을 없애야겠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서둘렀다. 밖에서 그녀를 부른다. ‘린님-.’
급히 문을 열자, 의아해 하는 단비. 방 안에서 물병과 잔이 엎어져 바닥이 물바다였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어요?’ 걱정을 먼저하고 치우는 그녀. 린은 어색하게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야님을 만나러 가야겠어.)”
“네? 대무녀님이요?”
“(응.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린님.”
그녀는 알지도, 내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