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매화나무 아래, 린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염없이 바라보았더랬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윤의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
‘무거우냐?’
‘(도리도리)’
‘잠시만 이러고 있자.’
‘(끄덕끄덕)’
아예 배 쪽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안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부끄러웠지만 좋았다. 매화나무향이 짙었지만 윤의 살 냄새는 아찔할 만큼 좋았다. 린은 얼굴이 달아올라 마치 홍매화로 일원이 되어 분한 것 같았다.
떨쳐내기 위해 성큼 돌아섰다. 궁 내외를 걸으면서 아른거리는 그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다. 류소전으로 향하던 길, 총총 걸음으로 따라오던 그 아이. 뒤를 돌아보면 힉! 놀라서 당황하던 모습.
손을 부여잡으면 꼼지락 거렸지만, 떨쳐내지 않았다. 좀 더 강하게 깍지를 끼기도 했다. 수줍게 웃으며 윤을 바라보았다. 작은 키로 그림들을 감상하는 모습이 힘겨워 보여 직접 안아 올려주자, 미안하다는 듯이 도리질 치곤 했다.
“의원은 왔다 갔느냐?”
“예, 폐하.”
“깨어날 기미는?”
“아직은... 하지만 계속 이런 상태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빌어먹을 양반이군.”
“이젠 신녀님이 쓸모가 없어지자, 바로 태도를 바꾸는 신료들입니다. 제량은 아예 확실히 신녀님을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겠지요.”
“제사장 길수의 여식이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린을 깨울 것이다. 하겠다고 한 것은 꼭 해내는 짐이 아니더냐.”
“폐하의 뜻대로!”
겉보기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린. 대무녀 마야가 옆을 지켰다. 윤이 다가와 잠시 물러난다. 폐하께서는 잠자코 지켜보시다가 이마에 입맞춤을 하셨다. 이제 그만 일어나, 나의 신령... 슬픔과 예감하는 절망에 가슴이 찢겨나갈 듯 했다.
“린, 짐의 린. 어서 돌아와.”
하루에 열두 번도 찾아오는 황제는 이내 돌아섰다. 지함과 마야에게 맡긴 채 편전으로 향했다. 그 살쾡이들이 또 뭐라 짓거릴 텐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그들과 마주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그때완 다르다, 그는 이 천희국의 황제이고 같은 혈족 당숙이라 해도 농락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녀님께서도 저리 되셨으니... 남가의 여식을 비로 책봉하여 주시옵소서!”
“이 황궁에 안주인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부디 저희들의 뜻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짐이 여태껏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소? 신녀는 깨어날 것이오.”
“하오나 폐하!”
“닥치시오! 그녀가 잠든 지 일주가량도 지나지 않았소! 성급히 생각지 마시오!”
언제나 여유가 넘치고, 능구렁이 같았던 황제는 강한 뜻을 밝혔다. 오히려 잠자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량이 더 수상쩍었다. 그래봤자 라는 듯이 말이다. 큰 어른인 제량이 조용히 타이르자, 언성을 높이던 대신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짐의 말보다, 당숙의 말을 더 잘 듣는 구려.”
“송구합니다, 폐하. 그들은 결코 폐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당숙께서도 할 말이 있으십니까?”
“신녀님을 비로 맞이하시려고 했으나, 저주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결코 황후로 맞이하지 않으셔도 남家의 여식을 안아 후계를 이으시는 노력이라도 하셔야만 합니다. 황비라도, 후궁이라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여지를 주고 싶진 않소.”
“저희들을 다 잃고 싶진 않으실 것 아니옵니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다. 지금은 아주 위태로웠다. 결국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황후의 자리는 공석, 그러나 남아영은 직책 높은 가문의 규수다. 후궁으로 들일 순 없다. 그녀는 결국 황비로 책봉될 것이다.
“어떡하나요, 린님? 남가 아영아씨가 황비가 되신다고 해요.”
“……”
“미력하지만 제 힘을 부여하고 있는데, 왜 아직 꿈속이세요? 일어나셔서 아영아씨를 밀어내세요. 저는 린님의 편이에요.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
“폐하가 울고 계세요.”
그 말에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야의 두 눈이 커질 대로 커지고, 성급히 지함을 불렀다. 깨어나실지 모른다고 서두르라고 말이다. 말을 듣고 달려온 듯한 윤은 린을 살폈다. 모두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았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하아…”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다. 움직인 것은 사실이냐?”
“예.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
“폐하께서 울고 계신다는 말을 하니, 손가락이 움직이셨습니다.”
“……이 아인, 끝까지…!”
* * * * * * * * * *
‘((아악! 안돼! 윤!))’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신령 따위가 나를 모독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으으... 이악! 아! 아아!))’
‘죽을 거라며?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버려!’
푸른 매화나무를 베고 또 베어내는 황제 윤. 그 고통이 나무에게, 린에게 전해져 온다. 아픈 말을 내뱉는 그 사람이 너무 슬펐다. 상처로 울부짖는 윤과 린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도망쳤다. 그래도 따라다니는 그대...
‘깨어나지 마.’
‘((당신이 그걸 원해요?))’
‘그래. 네가 무엇이 길래 짐을 괴롭히지?’
‘((미안해요, 미안해요.))’
끔찍하다, 너를 증오한다는 아픈 말. 충격과 슬픔이 혼란을 빚어온다.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은 나의 윤... 사랑하는 나의 윤... 과분한 것을 탐한 죗값일까?
-폐하가 울고 계세요!-
나 때문에? 저도 모르게 생겨버린 기대감.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걸까 하는 설렘. 피 묻은 손으로 붙잡는 또 다른 폐하. 그리고 비웃는 악령의 모습. 싫어-----!!!
“꿈이 아닐까?”
“아씨, 아니에요. 정말 황비가 되시는 날이라구요!”
“아아… 폐하 곁에 있어도 되는구나! 정말 그렇구나!”
“아유, 아가씨... 그동안 얼마나 우셨어요. 이젠 행복하실 거예요.”
아영은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께 청을 하여 고운 옷, 장신구, 제 물건들을 사드리고 준비한 결과 드디어 황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환희로 반짝이는 그녀를 두운이 찾아왔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편하고 가장 정답고 친한 이였다. 그러나 두운은 아영을 연모했고 숨기기에 바빴다.
“축하한다, 아영아.”
“고마워, 두운.”
“행복해. 친우로서 힘들면 나를 불러.”
“응. 다 네 덕분인 것만 같아.”
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신녀는 저주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그로서는 아영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황제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한 편, 그녀를 위해주고 울지 않게 해주면 좋겠다.
“황비님, 모시러 왔습니다.”
“흡! 가볼게, 두운.”
“그래. 축하해.”
“응.”
최상의 가마에 올라탄 그녀가 창을 열고, 작별을 고했다. 궁에는 이미 아비가 대기하고 있었다. 설레고 두근거림이 멈추지가 않았다. 옛 생각도 문득 들었다. 윤과 아영은 혼인을 약조한 사이였다. 정략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사 올립니다, 해가(家)의 누리라 하옵니다. 앞으로 황비마마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아영이라 불러줘요.”
“예, 그러겠사옵니다. 아영님.”
“그럼...”
붉은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장식을 한다. 호박목걸이와 팔찌를 끼우고, 분홍색 화장을 칠했다. 고아하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얕은 천을 베일로 덮고, 화려한 동백꽃을 수놓은 신을 신었다. 한 걸음 내딛어 혼례장으로 향했다.
“폐하…”
“어서오시오, 황비.”
다정한 미소에 저절로 떨리면서도 황홀했다. 손을 내미는 그에게 손을 얹자, 강하게 끌어 당겼다. 귓가에 속삭이는 나의 지아비.
“결코 내 연심을 탐하지 마시오. 짐은 당신의 남자도, 지아비도 아닐 것이니.”
“…폐하…!”
“당신은 그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말일 뿐이오.”
“으흐... 흑...”
“웃어야지.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어쩜 저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나. 상처로 갈기갈기 찢겨가는 심장이 너무 아팠다. 비록 혼자 사랑하지만, 그녀도 여인이고 가여운 사람인데... 아영은 마치 상처를 안 받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일까...
“맞절 하시옵소서.”
“서로에게 약지를 끼어주시옵소서.”
“혼인주를 나눠 마시옵소서.”
한창 혼례 중이었다. 눈물을 꾹꾹 눌러 참는 아영이었다. 대무녀 마야가 성급하게 다가온다. 대신들이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폐하! 린님께서 깨어나셨사옵니다!”
쓰고 있던 혼례모를 벗어던지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나갔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하필 왜 그 날이었을까. 마치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린의 심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