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린님!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 폐하께 알렸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드디어 그녀가 눈을 떴다. 눈물짓는 단비와 궁녀들이 먼저 보였다. 몸이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서둘러 달려온 의원이 맥을 짚었다. 느리지만 확실히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린-!”
“(끄덕)”
“아아… 린, 괜찮으냐?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달라고, 이렇게 깨어난 게야?”
“(도리도리)”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렇게 다시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얼마나 걱정하게 만들 셈이었어...”
“(손을 뻗어...)”
린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온 윤의 얼굴을 만졌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또 괴롭게 했어요…. 그녀의 손을 부여잡은 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이마에 살짝 입술이 닿았다. 서로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황제폐하! 아직 혼례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허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
-혼례? 윤이?
린은 미처 상상치도 못한 일에 눈을 깜빡였다. 적어도 자신이 생을 마치면 그 후에 일어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이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녀도 질투를 한다. 비가 될 여인이 밉다. 윤에게 섭섭하다.
“이렇게나 무력한 황제다, 난.”
“((윤…))”
“네가 먼저가 아니라서 미안하구나.”
“(도리도리)”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함께인 것은 너 뿐이다. 불안해하지 말거라.”
“(끄덕끄덕)”
정신이 없고, 쉬어야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윤은 혼례장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장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혼약을 맹세했다. 황비가 된 아영은 초라하고 비참했다. 이 혼인식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는데... 전혀 배려하지 않은 황제의 태도에 화가 나고 분했다. 원망스럽고 미웠다.
“저도! 저도! 여인입니다! 지아비를 연모하는 한 여인이란 말입니다!”
“……”
“어쩜 그렇게도 잔인하게 구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리 험하게 다루십니까?!”
“황비는 진정하라. 여봐라, 황비를 모셔라.”
결국 터져버린 악소리. 아영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혼례를 위해 준비해둔 상을 밀어트리고 집어던지고 떨어져서 깨졌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표정 없는 무감정한 말로 자신을 내치는 황제.
“오만하게 제 사랑을 욕보이지 마세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으십니다.”
“뭣들 하나! 황비를 모시래도!”
“두고 보세요! 후회하실 겁니다! 제가 아픈 만큼, 폐하도 아프게 만들 것입니다!”
“잔치는 끝났다. 모두 돌아가시오.”
질질 끌려서 사라지는 아영. 그녀를 바라보는 그도 사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놀아나고 있지 않는가. 그 흑막에게 말이다. 그래서 더 독하게, 심하게 다루는 걸지도 모른다. 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이는 바로 린이었으니까.
“약 기운이 도나보네요. 조금 멍하시죠?”
“(끄덕)”
“조금 더 주무세요. 그렇다고 계속 그러시면 안 돼요.”
“(끄덕)”
궁녀 하나가 단비에게 다가가 급히 귓말을 했다. 놀란 표정의 그녀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방을 나왔다. 악에 바쳐 헝클어진 머리칼, 번뜩이는 두 눈의 황비가 있었다.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린을 불렀다.
“신녀 따위가 황비가 왔는데도 인사도 없구나.”
“송구합니다, 황비마마. 지금 린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미처 나오실 수가 없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거냐. 신녀는 당장 나를 모시고 안으로 들이라!”
“황비마마!”
드르륵 문을 열고 멋대로 들이닥치는 아영. 린은 정신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선홍색 피부가 지금은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다. 서있는 것도 불안한데 예법을 차리는 그녀.
“감히! 감히 네 따위가 나를 욕보이더냐?”
“(도리도리)”
“나는 너를 아꼈다. 그것에 대한 대가가 이것이냐?”
“(도리도리)”
“말도 할 줄 모르는, 모자란 네 따위가!”
짜악-! 아영은 린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의 강하고 악센 손길에 휘청하며 쓰러지고만 린. 일어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깔깔깔 비웃는 황비. 린을 모시는 단비와 궁녀들이 경악과 분노를 표출한다.
“어쩜 이리도 무례하십니까?! 린님은 하늘님께서 보내신 신녀입니다. 저희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시란 말입니다!”
“꺄하하! 그녀가 돌아가면? 너희들의 직속 윗선은 바로 나다. 지금이 아니라 그 후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
“꽤나 속이 시원해졌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네, 황비마마.”
단비를 지나치며 황비가 멀어지자, 궁녀들과 함께 린을 부축해서 침구에 눕혔다. 붉게 달아오른 뺨이... 안타깝고 슬펐다. 죄스러워지는 단비는 마주 대할 수가 없어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린님.’ 단지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연화전(沿花殿). 지아비를 따르는 꽃이란 뜻의 황비궁이다. 처소로 돌아오자, 큰 호흡을 고른다.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했다. 손을 들여다보니 아주 붉었다. 뺨을 때리면서 자신의 손도 아팠던 것이다.
황제를 때릴 수는 없으니까. 분풀이를 린에게 한 것이었다. 부럽고, 질투하고, 샘을 냈다. 그 넓은 가슴의 주인은 바로 그녀였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제가 가질 순 없었으니까. 자신이 그녀였으면... 그랬다면 온 세상이 감사할 텐데...
“비참하구나... 원통하구나...”
“황비마마...”
“왜 난 또 빼앗겨야만 하지?”
“울지 마세요, 황비마마.”
“내가 또 울고 있니?”
“네...”
언제는 눈물 흘리지 않았던가. 매일이 고통인데... 매일이 기대인데...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허무’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눈살을 찌푸리는데... 밖을 나갔다온 궁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도 오늘의 최악이었던 혼례인지라 첫날밤을 함께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폐하께서 찾아오셨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악에 바쳐 고래고래 지르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럼에도 기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벅차서.
“황비.”
“폐하…”
“미안하오. 짐이 너무 모질었소.”
“아, 아니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짐이 그대를 만져 봐도 되겠소?”
“…아… 그렇게 하시옵소서.”
자신이 마음에 품은 황제가 다가온다. 긴장되고 떨려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영의 머릿칼을 넘기는 손길, 눈을 마주치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 황제.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윽고 입술을 매만진다. 저도 모르게 기대에 차 바라보았다.
거친 야수의 모습이었다. 목을 끌어당겨 진하게 키스를 했다. 샅샅이 돌아다니는 그의 혀, 타액이 달콤했다. 아영은 신음을 흘리는 자신의 소리에 자신이 깜짝 놀랐다. 물러나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하아… 폐하… 나의 ‘윤’…”
“…그대가 불러서는 안 되는 호칭이군.”
“예?”
“당신을 모시는 궁녀 중에는 제량당숙의 사람이 심어져 있지. 이런 연극이라도 해야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랬군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깊은 절망에 돌아서서, 돌아가 달라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나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관찰할 뿐이었다. 비참해서, 죽고만 싶어서 눈물로 빌어볼까라고 생각해도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왜 저는 아닙니까?”
“그녀는 나를 다르게 보니까.”
“무슨 말씀이옵니까?”
“모를 것이다. 그대는…”
패배감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묻지도 못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말일 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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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습니다.”
“(끄덕)”
“빌어먹게도… 당신에게 홀린 모양입니다.”
“(?)”
지함은 몸이 이끄는 대로 린에게 입을 맞췄다.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데, 혀가 온 곳을 헤집고 다녔다. 이러지 말라고 저항해도, 턱을 강하게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타액이 흐르면서 린은 화들짝 놀랐다. 실랑이 끝에 벗어나자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었다.
손짓, 눈빛으로 이유를 묻지만, 냉혈한 표정을 잃지 않는 지함이었다. 입술을 혀로 핥는 것이 야한 모양새였다. 이윽고 박장대소를 하는 그가 미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의 커다란 손이 린의 얼굴을 감쌌다.
“주인의 여자를 탐하다니… 푸하하! 당신은 재앙이야!”
“(도리도리)”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도리도리)”
그 때, 문 밖에서 단비가 아뢰었다, 대무녀와 무녀들이 왔노라고. 린은 당황스러웠고 어색해졌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지함은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미소를 띤 마야가 보였다.
마야는 깨어난 것이 기뻐 달려왔건만, 왠지 린이 이상했다. 뭐지? 살펴보자, 입술이 부어있었다. 누구의 짓인 게야! 도대체 아직 쉬어야 하는데! 순간 지함을 쳐다봤다. 결코 눈을 피하지 않는다. 뭐가 저리 당당한 거지?
“(마야, 고마워요.)”
“아닙니다, 린님.”
“(무녀들은 왜?)”
“상태를 좀 더 빨리 호전하실 수 있도록 데려왔어요.”
“(미안해요, 정말)”
아니라며 상냥한 얼굴과 말로 안심을 시킨다. 지함이 나가있겠다며 사라졌다. 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워 졌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느 무녀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조아린다.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지 않아도 되요.)”
“청아야. 준비를 끝내거라.”
“네, 대무녀님.”
양기와 음기가 조화를 이루며, 잠드는 린. 조용히 깨지 않게 대무녀와 무녀들이 나왔다. 마야는 왠지 수상쩍은 청아가 신경 쓰였지만 이내 돌아선다. 황제의 측근들만이 알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새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청아라는 무녀는 조금 더 조심히, 긴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둠이 내려앉고 무녀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유일무이한 사랑하는 아비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었다. 흡족해하시며 어여쁘게 봐주신다. 많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유독 자신에게 특별히 대우해주신다. 자신을 버리면 그녀는 살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대감, 무녀 청아가 찾아뵙습니다.”
“이리 오너라. 오늘은 또 무슨 소식으로 이 아비를 기쁘게 할 테냐?”
“황제의 호위, 무사 지함과 그 신령에 대한 것이옵니다.”
“답답하고 어리석은 문오 말이더냐?”
* * * * * * * * * *
“많이 야위었어. 혼인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렇게 얼굴이 상했어?”
“이젠 끔찍해. 그녀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널 아프게 한 모든 사람들을 치워버릴게, 걱정 마.’
“신료들도 당황하고 있어. 원래 이곳에 오면 안 되는 존재였다. 너의 황제폐하의 눈을 가리는 여인이야.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피를 묻혀야겠어.”
두운은 바람을 일으켰다. 4대문파의 힘인 풍(風). 그것을 이어 받은 자가 두운이었다. 진짜 현옥된 것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눈빛이 사나워지고 흉폭해졌다. 나의 황비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자신은 끌려 다니며 움직일 것이다.
달빛조차 숨죽인 시간, 긴 밤중에 가장 어두운 시각. 잠든 린에게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무들이, 풀들이, 꽃들이, 동물들이. 문이 열리는 음산한 소리도 다 들렸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누군가. 위험하다는 본능을 일깨운다.
린은 무거워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그녀를 올라탄 검은 사내. 망설임도 없이 칼로 찌르려한다. 간신히 피해도 바로 잡혀버린다. 목표를 벗어난 칼이 헛 질을 하고, 침구들에 박혔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물러날 곳이 없어진 린이 눈을 꼬옥 감았다.
칼로 찌르는 감각이 없었다. 갑자기 발소리가 늘어났다. 영문 몰라 눈을 뜨고 살피자, 무사들이 검은 사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배 제량.’ 윤의 당숙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으...”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쪽으로...”
“(도리도리)”
“제가 신녀님을 어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순수한 호의일 뿐입니다.”
“……”
한 발씩 떼어서 따라갔다. 제량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두운, 그는 옥으로 끌려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황제의 당숙.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 황실에 심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낱 귀(神) 따위가 폐하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
“제 아이가 알려준 거랍니다. 걱정 마세요, 신료들도 아직은 모르니.”
“(뭘 하려는 거예요?)”
“큰 재미를 볼 참입니다.”
강한 힘으로 린의 팔을 끌고 갔다. 점점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저주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량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