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제량 대신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아주 당당한 태도로 황제궁으로 찾아온 제량. 특유의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속셈이란 뭘까. 그러나 윤은 아주 담담하게 그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여유로운 조카님의 속내는 오죽하겠느냐만.
“들어오시지요, 당숙.”
“천희의 주인,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그간 바쁘셨습니까? 찾아 뵈도 자리에 안 계시더군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숙께서는 좋아 보이십니다.”
“저야 늘 조카님 덕에 평안하지요.”
“그러합니까? 듣자하니 좋은 패를 갖게 되셨다고.”
“벌써 소문이! 크하핫 맞습니다. 조카님도 탐내하실 겁니다.”
당장에 저 목을 비틀어 트리고 싶다. 마치 전부를 가진 냥, 자만에 빠진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린을 어떻게 했는지... 그 아이는 무사한지...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금방이라도 속내를 보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저 뱀 같은 혀를 놀리고, 독을 품은 당숙이란 자이기에. 짐이 결코 대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자신의 힘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진 건가. 제량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든 것은 자신이다. 표면이 아닌 뒤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조차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당숙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로 조카님의 자리지요. 이 나라의 모든 것, 본래의 내 자리.”
“이 황좌가 어찌 당숙의 것입니까? 적통의 피가 흐르는 것은 이 짐의 것인데.”
“그 자리가 나를 어떻게 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황실의 피는 나도 흐르고 있다. 자격이 없는 건 아니지.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겠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신녀를 넘기는 대신인가?”
“그래. 조카야, 그녀와 사라져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마라. 너의 장례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당숙도, 조카도 없었다. 서로의 탐욕을 취하려는 것뿐이었다. 순순히 그러겠노라 할리 없다. 결국은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괴물과 야수는 서로를 할퀴고 물고 뜯는다.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에 패배자가 죽어야만 끝이 나겠지.
“검은 달 아래, 백성들은 너의 모습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배 제량!”
“버릇이 없구나, 조카야. 고심해 보거라.”
“당신 또한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천희의 주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윤은 그 좌에 앉아 주먹으로 내리쳤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린도 백성들도 지켜내야 한다. 누가 더 소중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악의적인 탐욕에 희생되지 말아야 한다.
“크허...! 욱... 커어... 컥...!”
“폐하, 폐하! 지금이라도 당장 여인을 데려오겠습니다!”
“되었...다지... 않...더...냐.”
“어떻게 만월도 뜨지 않았는데...!”
“크억! 흑월이... 다가 오고 있다... 린의...힘이... 필요하구나...”
“지함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젓는 윤. 강한 힘으로 비현의 옷자락을 잡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황제를 보는 것이 비현은 더 고통스러웠다. ‘송구합니다, 폐하! 지함과 다녀오겠습니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혼자서 아픔을 참아내야 했다. 피를 토하고, 가시가 돋았다. 번지는 붉은 핏줄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함-! 폐하께서 위독하시네! 린님께 가야돼!”
“다녀와서 비마마를 뵈어야 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서두르세!”
* * * * * * * *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겨우 눈을 떴다. 몸이 성치 않고, 지쳐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법도 한데, 절대 못하게 막았다. 린은 그렇게나 눈물을 쏟아냈는데도 흐르는 눈물이 따가웠다. 자신은 왜 이리 약한 걸까...
보고 싶어, 윤... 나를 구해줘... 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분들이 오신다더구나.”
“흐아...”
“아쉽게도 황제는 안 올 모양이야. 그래도 다행이구나.”
“으.. 에...”
“큭큭 아, 오셨습니까? 제량어른.”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게 좋을 뻔 했어.”
“그러다가 죽습니다. 클클 인간도 아닌데... 조금 다를까요?”
농담에 웃어넘기는 제량. 딸랑 딸랑 아부하는 그의 수하들.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 감흥이 나지 않았다. 단지 마야만이 떠올랐다. 얼마 남지 않았다. 기필코 데려와 내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 거다.
“원망하려면 마야를 원망토록 해라.”
“(?)”
“그녀가 원인이니까.”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
저택 밖이 소란스럽다. 지함과 비현이 도착해 한참 실랑이 중이다. 황제를 모시는 사람들로서 강한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무사들을 뚫고 찾기 시작했다. 제량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린님!”
“신녀!”
“왔군.”
단번에 검을 빼내어 제량을 향해서 베어버리는 지함이 대단히 빨랐다. 비현이 수하를 치우고 묶여있는 린을 풀어주었다. 힘이 없어, 쓰러지려는 그녀를 지탱했다. 제량은 나이보다 경험치가 높아 제일검이라 불리는 지함과도 대등했다.
“그만!”
단번에 방 안은 무사들과 전사들로 가득 찼다. 2명이서 그들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압박하는 제량의 사람들은 비현과 지함을 사로잡아 저택 깊은 곳에 가두었다. 으르렁 거리는 둘은 창과 문을 깨부수려 해도 소용없었다.
“어찌해! 폐하를...!”
“그녀는 어땠습니까?”
“너 어떻게 폐하가 아닌, 린님부터 챙기는 거냐?”
“그녀는 어땠냐고 묻지 않습니까?!”
이제는 둘끼리도 싸우기 시작했다. 클클 비웃는 사람들 속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두 사람에게 정적만이 흐르는데... 캉- 캉- 캉- 부딪히는 무엇의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보는데...!
-폐하!
한 쪽 눈을 드러낸 상태로 나타난 윤이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폐하! 폐하, 여긴 어떻게? 괜찮으십니까?”
“비현. 그녀는 어디 있나?”
“지하방에 갇혀있습니다. 창에서 빛조차도 잘 들지 않는...”
“그렇군.”
“폐하! 어디 가십니까?! 폐하!”
지하방으로 향하는 윤. 온몸에서 시린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검이 얼어붙었다. 챙- 챙- 소리가 요란하지만 고요한 저택. 마침내 린의 가둬진 방으로 들어선다.
“린... 나의 린...”
“(흠칫)”
“린... 짐이 왔다. 내가 왔단 말이다.”
“으... 우...우...”
“미안하구나. 짐을 도와다오...”
“((윤!))”
결국 정신을 잃고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림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