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도 찬란한 빛을 내뿜는 그는 바로 ‘태가서 자민’ 숲의 대신령이었다. 쓰러진 윤을 보며 아무것도 못하는 그녀는 눈물만 떨구다가,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많이 약해졌다는 의미였다.
“((미련한 것. 내 인간과 엮이면 안된다 그리 말했건만.))”
“((아버지! 도와주세요, 제발!))”
“((내 품의 신령을 차마 못 본 척은 할 수 없구나. 그리고 여기서 시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너의 생명력이 얼마나 남아있는 지는 알고 있느냐?))”
“((……))”
“((무리하게 힘을 써대니 문제다.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을 깎아먹었으니... 내 책임도 있으니...))”
청량한 기운이 린과 윤을 감싸고 스며들었다. 약간의 힘으로도 압박하던 사슬을 풀어내고, 갇혀있던 방에서 나왔다. 빠져나온 윤을 끌어안고 양기를 불어넣으려는 그녀를 막은 자민이 안정을 되찾게 도와줬다.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거라. 무사와 책사는 내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할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버지!))”
“((서둘러라.))”
순식간에 그들이 사라지고, 깊숙이 갇혀있는 지함과 비현에게 향했다. 대신령이 그들의 흔적을 손쉽게 알아내었다. 다른 모습으로 바꾼 자민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새벽에 깨어있던 두 남자가 경계했다.
“황제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서둘러서 나오셔야 됩니다.”
“누구십니까?”
“폐하의 그림자입니다. 오랫동안 그 분을 숨죽여 지켜왔습니다.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하지요.”
“예. 그럼 이쪽으로...”
황제와 그의 사람들이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왔다. 현자 자민의 말을 듣고 단비가 대기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긴장이 풀려 무너져 내리는 린을 부축하여 처소로 향했다. 황제 역시 계룡전으로 모셨다. 그 뒤에 지함과 비현도 도착했다.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나보다도 황제폐하가 괜찮으신지 봐야겠어요.)”
“괜찮으십니다. 강하신 분입니다.”
“(아니요, 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덜 고통스러워.)”
“명이 계셨습니다. 린님께서 온전히 회복할 때까지 류소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알겠어요.)”
단비는 저도 모르게 린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자신에게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고맙다는 듯이 상냥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안도했다. ‘그래, 온화한 분이시지.’ 황제폐하의 전담시중을 맡았던 단비는 두 분이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아영이 먼저 혼인하고 폐하의 여자가 되었지만, 진정한 황후는 린이었으면 했다.
린의 스승 자민이 소식을 전하면서 요 며칠을 입궁했다. 마치 아비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상궁과 궁녀들은 감사했다. 마야가 린을 찾아왔을 때, 셋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지만.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자극을 주면 어떨까요?”
“아직 폐하께서 완치하시지 않았다.”
“검은 달이 뜨게 되면...! 백성들의 신뢰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일 텐데...”
“아마도... 린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거다.”
“네?”
“네가 성심성의껏 힘을 보태주거라.”
‘알고 있습니다. 제량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결코 폐하와 린님을 지킬 것입니다.’ 마야는 그리 말했다. 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도 한계가 있으니, 부디 부탁하건데... 이 아이를 도와다오.
“점차 밤이 밝아집니다.”
“당숙께서는 즐기고 계실 테지.”
“저... 폐하, 지함이 아무래도...”
“알고 있다. 이 전투가 끝나고 해결할거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치셔야 합니다!”
“비현, 잊지 마라. 그는 천희 제일의 검이다.”
린 곁을 지키고 있는 지함. 이미 그의 눈빛을 몰라볼 황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의 이유이던 간에 또 잃을 수는 없다. 그리고 또한 지함은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다. 쌓아온 서로의 경험과 마음이 있다.
“린님!”
“어디계세요?, 신녀님!”
“신녀님 못 봤어?”
“아니.”
내일이면 검은 달이 뜬다. 그러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 린이었다. 궁녀들과 상궁들이 찾아봐도 어디에 숨은 건지 없었다. 무리하면 안 되는데... 바로 흑월이 뜰 것인데...!
“(윤!)”
“린? 네가 어찌?”
“(당신이 무사하길 바라며... 나의 땅의 기운을 담았어요. 걸고 계시면 작은 위험은 피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너는, 너는 괜찮으냐?”
“(네. 저 괜찮아요.)”
“짐이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아느냐?”
“(웃음)”
그러나 답 없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난 곳에서 찾아도 없었다. 윤은 더 애가 탔다.
“흑월이요---!”
“하늘님께 기원을 드립니다.”
“오늘 무사히 천희를 구해주시옵소서!”
“어둠을 삼키시고, 빛을 내려 주시옵소서!”
드디어 대망의 전투가 시작될 시간이 왔다. 황궁을 나와 윤은 제사를 지낸다. 백성들의 온 시선은 황제에게로 향해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지켜보는 제량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시기가 가까워진다. 10, 9, 8 … 3, 2, 1!
“크헉! 크으... 흐...으.... 큽...”
“괴물이다!”
“황제의 탈을 쓴 저 괴물을 해치워라!”
예복이 찢어지며 비늘이 돋아난다. 한 쪽의 붉은 눈이 이글거렸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를 쏟아내는... 방금 전까지 멀쩡한 나라의 주인이 괴물로 변모했다. 웅성웅성 백성들이 놀라 수근 거렸다. 끔찍한 거라도 봤다는 듯 아이의 눈을 가리고, 뒷걸음을 쳤다.
백성들은 달아났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팠다. 피가 곯고 가시가 올라왔다. 돌, 낫, 칼 등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 눈에는 단지 징그러운 괴물일 뿐이었다.
“푸하하학! 푸하하! 이래서 안 된다는 거다, 조카님!”
“폐하를 보호해라!”
“감히 역모를 꾀해?!”
“저 역적들을 물리쳐라!”
아비규환, 아수라장이었다. 린은 윤의 곁에서 끌어안고 양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점차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가라앉는 상처들과 안 좋은 혈액이 빠져나왔다. 몸을 덮은 비늘도 이내 사라졌다.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생명수로 망가진 몸을 치유했다.
“린… 고맙고, 미안하구나.”
“(도리도리)”
“이제는 직접 짐이 나서마. 짐의 상대는 당숙이다.”
“((윤.))”
“괜찮다. 걱정 말거라.”
그의 뒷모습이 왜 이리도 불안한 건지… 지켜만 보고 있어야 되다니… 차가운 눈물이 곧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