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윤… 내가 또…”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미안해요…”
머리를 짚은 윤은 고개를 숙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주 괴로워 보였다. 그럴수록 신령들에게 금지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대가인 것만 같아,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질서를 어지럽힌 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주의 뱀은 손 주위에 감겨있었다. 마치 눈치라도 보는 것 같았다. 혀 놀림이 풀이 죽어서 힘이 없었다. 그 위를 감싸 덮었다.
“그것을 없앨 방법은 없는 건가?”
“아마도... 사경을 헤매고 깨어나서 치유된 양기로 사라졌어야 했는데, 제 수명의 어두운 음기를 갉아먹어서 남아있는 듯 해요.”
“고얀 놈이군.”
“왠지 정이 들었어요. 아이도 미안해하고 있어요.”
“넌! 참...!”
할 말이 없어진 남자였다. 뱀은 눈을 감은 채 안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린은 그저 웃었다. 마냥 울 수는 없으니까. 자신보다 더 아픈 이는 바로 당신이니까.
“궁에서만 지내기 갑갑하지 않느냐?”
“그러네요. 숲에서, 궁에서만 지냈으니까. 밖이 궁금해요.”
“내일 잠행을 가자. 짐의 천희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마.”
“정말요? 우와!”
“어린 아이마냥 좋아하는 구나.”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린의 이마에 달콤히 입 맞추고, 오늘은 자신의 침방으로 향하는 황제폐하이셨다. 들뜬 린의 얼굴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수건과 대야를 가지고 들어온 단비는 깨어난 린이 왜 그러는 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기쁜 린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개국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장이 들어섰구나.”
“장?”
“시장 말이다. 여러 가지를 팔고 사는 곳이지. 이때가 가장 활발한 시기야.”
“신기해요.”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린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설탕과자의 모양을 뜨고 있었다. 한 아이가 실패하자, 입 안 가득 밀어 넣는다.
“이게 뭐니?”
“이거 처음 봐요? 달고나예요.”
“달고나? 주전부리야?”
“네. 아저씨, 하나 더 주세요!”
“저도 하나 주세요.”
집중해서 모양을 본 딴다. 생각보다 쉽지 않아 끙끙 대는데, 그만 부러졌다. 아아... 아쉬운 탄식을 내뱉으며 한 입 먹었다. 달았다, 무지무지. 윤이 키득키득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가 건넨 달고나 조각 하나를 먹었다.
“달아요. 꽃술보다 단 것 같아요.”
“설탕이니까. 제법 비쌀 텐데?”
“아! 미안해요... 그게...”
“큭큭 얼마입니까?”
여러 가지의 것을 보았다. 중년의 남자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있었다. 화려한 그림의 종이로 내기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잎으로 감싼 둥근 것을 가지고 놀았다. 장사꾼들은 소리 높여 값을 흥정해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전부리를 들고 먹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시끄럽기도 했지만, 생기가 넘쳤다. 마치 미지의 공간에서 혼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그들이 부럽고 아팠고 슬펐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 지 윤이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좋겠어요. 그죠?”
“그래.”
“나도 차라리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무엇이든 좋다.”
“응-”
그렇게 시장을 돌아보다가, 장신구를 갑판에서 팔고 있는 게 보였다. 린도 여자인지라 예쁘고 고운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머리 장식부터 보석들, 반지, 주머니 여러 가지가 있었다. 칠백화(七白花)의 머리 장식(핀)에게 사로잡혔다.
“어울리겠어.”
“고와요. 그런데... 사치겠죠?”
“아니. 아주머니 얼마입니까?”
“5냥만 주쇼. 어여쁜 아가씨라 장식이 딱이네.”
“고맙소.”
해보라는 그의 말에, 린은 부끄러웠다. 되었다고 도망가려는 그녀를 잡아 머리에 꽂아주었다. 물색 머리칼에 예쁜 꽃이 피어 근사했다. 남들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뺨에 짧게 뽀뽀했다. 린의 얼굴이 붉어져서는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돌아갈까?”
“네, 재미있었어요. 고마워요.”
“네가 좋았다면 됐다.”
“달달해요, 윤.”
그녀도 싱그러운 웃음꽃을 피웠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궁으로 돌아간다.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생이 끝나도 말이다. 너무 행복해서 윤 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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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어찌 남가를 풀어주신 겁니까!”
“짐도 전혀 남자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폐하! 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내치셔야 합니다!”
“한 번 내린 명을 거두지 않는다. 린 역시도 바라는 것이었다.”
아영은 풀려났다. 즉위는 황비에서 후궁으로 떨어졌다 해도 여전히 황제 품의 여자였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린의 당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비현은 펄쩍펄쩍 뛰었다. 폐하 앞에서 예를 갖추는 아영이 고울 리가 없었다.
“짐이 온전히 너를 용서한 게 아니다. 그것을 명심하라.”
“예. 제 죄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린의 마음을 내치지도 말라. 그녀의 배려를 헛되게 하지 말란 말이다.”
“예, 폐하.”
결국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황제와의 대면이후 그녀는 린을 볼 수가 없었다.
“마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가여운 우리 마마. 흑 흐윽...”
“호들갑떨지 마. 생각보다 많이 유하셨어. 그녀 때문이지만... 난 이제 그걸로도 족해.”
“아니에요! 신녀 그 여인 때문에!”
“수이. 주제가 넘는 구나!”
“저, 저는... 단지... 아영님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바로 죽여 버릴 거야.”
아영의 사람 궁녀‘수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달래주지 않는 자신의 주인. 그녀도 바로 제량의 사람이었다. 분란을 만든 것도 그녀로 인해서였다. 수이는 어렸고, 무서웠고, 미련했다. 그래서 함부로 아영이 내칠 수도 없었다.
그 옥 안에서... 린이 찾아왔을 때도... 이미 많이 지쳐버린 아영이었다. 정말 신녀의 말대로 그녀에게 한줄기의 빛을 폐하께서 내려주실까...?
“만월이 뜨는 시기가 얼마 안 남았죠?”
“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윤은 강해져야만 해요. 그러기 위해서…. 지함, 나를 도와줘요.”
“신녀님의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나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부탁해요, 제발… 내 마지막을 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평생 기억하는 순간이 죽음이고 싶지 않아!”
“……”
지함은 그 명을, 그 비명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그녀의 마지막을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두려웠으니까.
“폐하, 신녀님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 하게.”
“윤? 많이 바빠요?”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내가 너의 처소로 가면 되는데.”
“오늘은… 당신의 침방에 들고 싶어요.”
“… 지금… 뭐라고…?”
황제의 침방에 든다는 말의 의미는, 몸도 마음도 당신에게 바치겠다는 야릇하고 은밀한 속삭임을 뜻한다. 사람으로 분한 린이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눈빛이 흔들리는 윤이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비현이 차를 마시다가 풋학- 내뿜었다.
“지, 진심이야?”
“네.”
“린, 도대체…!”
“윤. 그러면 안되나요?”
“아, 아니 그게…!”
주객전도된 것 같은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온화하고 은은한 향기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린과 대조적으로 크게 놀라 당황해 얼굴이 붉어진 윤이었다. 꽃잠은 이루어질까? 그리고 그 여운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