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당신께…
“안돼!”
강렬한 살기를 느낀 윤은 검을 피했다. 그 또한 강한 전사였기 때문이다. 퍼붓는 공격을 막으며 린을 보호했다. 구체적으로 파악 못할 마구잡이 칼질이었다. 근접해오는 불의 기운은 제법 매서웠다.
“청아!”
“닥쳐! 내 이름 부르지 마!”
“무슨 짓이지? 감히 무녀 따위가!”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나의 아버지도, 나의 어머니도 죽인거야! 이 원수를 갚을 테야!”
무녀 청아. 황제의 당숙 제량과 대무녀 마야를 강간하다시피 관계를 맺고 버린 딸이었다, 눈 앞에서 죽어간 부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의 원흉은 반드시 황제일 것이다, 그리 여겼다.
그 생각이 들자,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렸다. 그래, 쉽게 죽어버리면 아쉽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당신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봐!”
“린!”
이제 무력해진 린이 청아의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운데... 윤은 린을 보호하기 위해 급히 다가왔다. 불에 약한 그녀를 아니까. 그러나 제 아비처럼 힘을 이어 받은 청아를 막을 수가 없었다.
“린-!!!”
“아... 아...!!!”
“크흡... 컥...”
“윤! 안돼! 윤-!”
피가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정통으로 맞은 불의 기운으로 인해 내상을 크게 입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청아는 그를 찔렀다. 이제는 입 안에 피가 고였다. 결국 한 쪽 다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린은 신음만 내뱉으며 쉴 새 없이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아보아도 계속해서 눈이 감겨왔다. 울부짖는 나의 연인. ‘괜찮아, 걱정 마. 난 누구보다도 강해. 그러니 울지 마.’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뱉을 수조차 없었다.
“폐하, 무슨 일이라도...”
“아아-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저도 당신들을 따라 갈게요.”
“감히 한낱 무녀 따위가! 지금! 지엄하신 폐하를!”
소란스러운 소리에 들어온 지함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베었다. 그의 검은 자비가 없었고 매섭고 날카로웠다. 청아에게서 하늘님의 힘을 빌려오던 양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보고 린은 당장은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아의 양기를 흡수했다. 제 몸에 맞게 잘 걸러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일회성이긴 하지만. 흐릿흐릿하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윤을 감싸 안았다. 이대로라면 그가 죽을 지도 모른다.
땅의 힘, 생명을 부여하고
물의 힘, 치유를 부여했다.
점차 윤의 시야가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린은 모든 힘을 토해내고 힘겨웠다. 정말로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지함은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애틋했고 안타까웠다. 그 역시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란 걸 아니까.
“윤... 아영님에게 잘 해주세요.”
“으... 으...”
“저의 기억은 그냥 떠나보내세요.”
“으... 흐아...”
“미안해요. 곁에서 있을 거란 약속을 어겨서...”
“리, 린...”
마치 멀게만 느껴지는 목소리. 윤은 린의 그리움이 담긴 미소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이 그들의 작별이었고, 마지막 모습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지함님.”
“알겠습니다.”
“고마웠어요. 끝까지 잊지 않을게요, 이 은혜,”
“참으로 끝까지 미운 사람이십니다.”
그 말에 그녀는 웃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녀가 온전히 떠난 뒤, 지함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잘 가요, 나의 첫 번째 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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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왔느냐? 이런... 쯧... 전부 고갈한 모양이군.”
“네. 아무것도 못하는 게 더 싫었어요.”
“이미 생명줄이 끊어지려 하는구나.”
그저 씁쓸하게 린은 웃었다. 자민은 가엾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어길 수는 없었다. 그것이 다 하늘님의 뜻인 것을 어찌하나. 흐릿흐릿 혼만이 빠져 나왔다. 힘없이 쓰러지는 혼의 그릇. 조금 전까지 그 분의 손길이 닿았던 몸이었다.
“감사했어요, 아버지.”
“네 소원이 만족스러우냐?”
“네. 잠시나마 욕심을 부렸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래. 그럼 되었다.”
반투명 상태인 린이 자연에 녹아들고 있었다. 아버지를 한번 안아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애써 웃으며 이별을 고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주던 그들에게 감사했고, 보고 싶었다.
“잊어버리는 게 두려웠는데, 지금은 차라리 잊고 행복하기를 바라요.”
“네 소원은 ‘잊혀 지지 않게 해주세요’였지.”
“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어요. 더 바라는 건 없어요.”
“아이야- 시간이 흘러서 다시 만나자.”
“그랬으면 좋겠어요.”
차마 자민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이미 사라진 후다. 유독 신경 쓰이던 아이였다. 순수했고, 영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웠다. 한동안 린이 남긴 여운을 떠올릴 것 같았다.
((똑똑. 대신령님, 계세요?))
“누구냐?”
((아직 어린 신령이에요.))
“무슨 일로 나를 찾지?”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했어요.))
“이 놈의 풀떼기들이 뭐라 떠들어 된 거야!”
당분간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감들 행세라도 해야 하나 싶다.
* * * * * * * * * *
윤은 먼 곳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 안에는 칠백화의 머리장식을 매만지면서. 그렇게 가버리는 게 정녕 나를 위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져만 버리면 좋냐고 따지고 싶었다.
“명문가 규수들 명단입니다, 폐하.”
“시간이 남으면 보겠다.”
“지금 널널해 보이시는데요?”
“닥치거라.”
“예이-”
실없는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다. 빈자리가 너무 커서 막막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해주질 못했다. 그것이 후회로 남았다. 비현과 지함이 배려해주고 안타까워하는 걸 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최가(家)... 유가(家)... 진가(家)...”
“아뢰기 송구하오나, 황후를 책봉하셔야 합니다.”
“그래. 대신료들이 아주 시끄럽다.”
“상냥하고 어진, 현명한 분을 추려보겠습니다.”
“그러도록.”
다시 천희국을 위해서 황제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그래도 일에 몰입하면 다른 생각은 잠시나마 접혀지니까. 오늘도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달이 높이 뜨고 나서야 침소에 들었다. 그러나 밤중의 손님이 찾아왔다.
“남가 제 1후궁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하라.”
“취침 중이셨습니까?”
“아니오, 괜찮소. 무슨 일이오?”
“내일이 바로 신녀님의 제사이지 않습니까. 제에 올릴 물품을 대상궁 추가(家)와 의논해보니, 잘 아시는 것은 폐하라는 생각에…”
“그렇소? 그렇다면 이것으로 하시오.”
폐하께서 아영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칠백화의 머리장식이었다. 그녀가 자신과의 기억을 잊지 않아주길 바라며 제사를 지내기를 바랐다. 아영은 한 해 동안 많이 성숙해졌고,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으며 애썼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그녀가 부럽고 쓸쓸하고 서럽지만... 그래도 자신을 많이 위해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괜한 시샘이 나지는 않았다. 황궁의 임시 안주인역할이기에 해야하는 일이었다.
“계룡전 뜰에 푸르른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잎사귀가 초록빛이 아닌, 하늘의 푸른색이었습니다.”
“뜰에…?”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 다 성인이 될 만한 큰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청색 나뭇잎이 무성하고, 갈색 보다는 노랑에 가까운 가지와 나무통, 뿌리였다. 나무에 손길이 닿으니 바람이 불어와 잎들이 살랑살랑 흔들었다.
“꼭 너를 보는 것만 같구나, 린.”
그리운 향기가 맡아진다. 그래, 네가 있구나… 탕- 탕 치자, 소리가 울렸다. 꼭 말하는 것처럼.
“태지(兌祉)전으로 가자.”
돌려받은 머리장식을 나무 아래를 파서 묻었다. 마치... 그녀인 듯 싶어서... 희미한 미소가 잠시 스쳐지나갔다. 윤은 아주 오랜만에 평온함을 느꼈다.
“폐하-! 폐하!”
“왠 소란이냐?”
“연통이 왔습니다! 이제야 기억이 나서... 송구합니다, 폐하.”
“누가 보낸 거냐?”
“모르겠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윤에게...
당신이 보고 있다면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서겠죠?
잘 있나요?
아프지는 않나요?
외롭지는 않나요?
지금 당신을 생각하며 쓰는 나도 괴로운데...
“누구십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
있죠, 윤.
나는 말이죠.
당신에게 깃들어 있어요.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집중 해봐요…
“그래. 아직 네가 생생해.”
연통을 읽으며 오랜만에 달콤하고 그윽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들이 그녀를 대신해 속삭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계속해서 읽어 내렸다.